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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서울대 합격증과 첫 등교 사이의 기쁨>의 줄거리:
신앙인의 삶은 한 마디로 소망 안에서 에덴의 회복이고 가나안 복지의 삶을 누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전, 후서를 보면 성도들의 이런 기쁨의 삶의 흔적을 눈 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외부적인 박해와 내부적인 이단들의 위협에 직면하여 신앙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뿐입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소망 속에서 느끼는 기쁨이란 본래 이토록 무기력한 것일까요?
서울대 합격증과 첫 등교 사이의 기쁨
(벧후1:1~2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서울대 합격증과 첫 등교 사이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서울대 합격증과 첫 등교 사이의 기쁨!
여러분, 오늘 베드로후서를 시작합니다, 3장밖에 안돼요, 전체적으로.
근데 그 주된 베드로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가, 베드로전서에 소아시아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박해 상황 그리고 요번에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이단들에 대처해서 믿음을 잘 지켜라 실족하지 말라’고 하는 동기와 취지를 가지고 쓰여 진 편지가 베드로후서입니다.
근데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쭉 읽으면서, 한 쪽 마음 구석에 회의가 생기는 거예요.
어떤 회의가 생기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의 결과로서의 은총을, 한 마디로 총망라할 수 있는 말이 뭡니까? 에덴의 회복이에요, 그리고 가나안 복지의 삶을 실현하는 겁니다.
비록 우리가 천국에 가서 가나안 복지의 삶을 완전히 이루고 에덴의 삶을 원형대로 이루겠지마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소망 가운데서 그 에덴이라는 말과 가나안 복지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기쁨 속에 사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말에서 이 ‘항상’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돈을 벌 때도 있고 못 벌 때도 있고, 몸이 건강할 때도 있고 병이 나서 골골할 때도 있고, 가족들의 일이 잘될 때도 있고 못될 때도 있고, 나라 일을 봐도 좀 쭉쭉 뻗어가는 듯이 보일 때도 있고 콱콱 막히는 듯이 보일 때도 있고, 전쟁의 위협이 느껴질 때도 있고 안전하다고 느낄 때도 있고.
정말 이거 뭐 청룡열차를 타는 것 같은 변화무쌍한 굴곡이 있는 삶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러나 이게 기독교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힘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근데 이 베드로전후서를 읽다보면, 영 답답한 거예요.
도대체 이렇게 모든 변화무쌍한 삶의 변화를 관통하고 초월하는 승리자의 노래가 없습니다.
그런 기쁨과 승리와 쟁취, 어떤 이런 적극적인 분위기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너무 초라하고 답답합니다.
약자의 구차한 자기 합리화와 변명 같아 보여요.
맨날 박해와 이단의 위협에나 대처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되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밖에 없어요.
어디 여기 편지 속에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삶에서 그러한 승리자의 기쁨의 모습이 기미라도 보이고 있는 겁니까?
참! 이거 답답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결국 베드로전후서의 이 주제는 한 가지로 소망입니다, 소망.
소망 안에서의 기쁨을 가지고, 박해와 이단의 위협을 넘어서 승리자의 삶을 살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승리자의 삶을 사는 모습을 묘사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좀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결국은 뭐에 문제가 있느냐 하면, 소망의 문제이고 소망 안에서의 기쁨의 문제라는 겁니다.
소망 안에서의 기쁨이 강력하면, 그러면 박해가 문제될 게 없어요.
베드로 자신이 그랬습니다.
목 베임을 당하도록 결정된 전날 밤에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발로 차야 깰 정도로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평강 속에 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거지요, 소망 안에서의 기쁨이 온전치 못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대로 항변할 수가 있어요. 무슨 항변을 할 수 있냐?
소망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게 원래 한계가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소망이라는 말은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지금 돈이 안 벌리고 자식이 문제가 생기고 내가 병이 나는 건 현실입니다.
네로황제가 우리를 박해하는 건 현실입니다.
근데 하늘나라는 소망 안에 있지 현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다가, 돈을 많이 벌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있다 그러면, 돈을 벌어서 써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맛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천국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다가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그런 경험조차도 해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천국 소망 안에서 기쁘라고 하는데, 소망이라는 말자체가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항변을 우리가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 사실은, 천국 소망 때문에 현실의 모든 어려움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기쁨 가운데 살고 있지 못하잖아요.
실제로 살고 있습니까? 못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의 현실이잖아요.
그 천국 갈 걸 알고 믿는데도 하나도 안 기뻐요, 지금 여기서.
그러니까 소망 안에서 기쁨으로 살고, 복지를 살고 에덴을 산다는 것은, 강 건너 간 이야기 같아요.
그냥 우리에게는, 악착같이 기도해 가지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그러고,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그러고, 형통하게 해달라고 해서 이 세상 일이 잘 될 때 기쁜 거지, 다른 수가 없는 거 같아 보여요.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소망과 소망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이 뭔가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비유적으로 살펴봐요.
그게 오늘 제목으로 나온 겁니다.
서울대 합격증과 첫 등교하기까지 그 사이의 기쁨.
첫 등교까지 그 사이에서 느끼는 기쁨, 그게 어떤 기쁨이에요 여러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아니 요새는 아예 초등학생들부터 서울대반 연대반 고대반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6년 12년 세상하고 담쌓고 공부해 가지고, 서울대 합격했습니다.
서울대 시험 봤는데 합격증이 딱 왔어요.
그때의 기쁨, 서울대 시험을 봐놓고 합격증이 올 때까지의 긴장과 이게 비례하는 거예요.
긴장이 컸으면 클수록, 걱정이 심하면 심했을수록 깊은 거지요.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그 사이의 긴장으로만 얘기 될 것입니까?
12년 동안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면서 준비한 결과로써 서울대 합격증을 받아들었습니다.
이제 입학식이 언제할 거라는 통보가 왔어요.
그 입학식 전까지의 합격증을 받고 있는 고3졸업생, 합격증을 쥐고 서울대 입학을 기다리고 있는 고3 졸업생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봐요.
내가 고3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저절로 웃음이 나와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황홀하지요.
이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될 소망의 기쁨과 똑같은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면, 대학 졸업하고 5년 동안 직장을 못 구하고 있던 사람이, 삼성에 덜컥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삼성에서 어느 날 어느 시까지 첫 출근을 하라고 통보가 온 거에요.
이것도 합격증서가 온 거에요. 서류를 받아들고 첫 출근할 때까지 고 사이의 기쁨,
이거는 이거는 진짜 지구가 쪼개진다 그래도 이 기쁨을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거에요,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또, 또 이런 기쁨도 있어요.
30이 넘고 31, 32, 33이 되가는데도 이건 날 좋아하는 남자가 기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어떤 생각을 하나 하면, 이목구비만 달려 있고 건강하기만 하면 누구도 좋다, 라는 마음을 갖고 기다리고 있어요, 결혼하고 싶은 이 나이든 아가씨가.
근데 세상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킹카가 프로포즈를 하게 돼서 결혼약속을 합니다.
결혼약속을 하고 결혼식이 올리기 때까지, 그때의 기쁨.
하아! 이거는 제가 여자가 아니고 노처녀가 아니라도 알 수 있어요, 날아가지요 날아가.
봐요, 결혼식도 아직은 소망의 단계이고, 삼성 첫 출근 날짜도 소망의 단계이고, 서울대 입학도 첫 등교도 소망의 단계입니다.
근데 합격증 약혼 약속 결혼 프로포즈 결혼반지를 끼고 약속을 받고, 고 사이는 날아가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 노처녀를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대학 졸업하고 5년 만에 삼성에 취직한 그 사람의 기쁨을 상쇄시켜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한 거.
정작 삼성에 들어가 다녀보면, 하아~ 스트레스도 싸이고, 정작 결혼식하고 살림을 살다보면, 시부모님 시댁하고 부딪치고 찌그렁빠그렁 말이 많지만, 고 전까지 기가 막히지 않겠어요?
여러분, 기독교의 소망이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게 될, 우리가 읽은 부분에 얘기가 그 얘기인데, 영원한 약속 복된 약속 이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우리가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느끼질 못하니까, 이론적으로라도 생각해 볼 때 서울대와 비교를 하겠습니까? 멋진 남자와 결혼하는 것과 결혼생활에 비교를 하겠습니까? 삼성에 비교를 하겠습니까?
근데 안 기뻐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약속해 주신 거예요.
합격증보다 더 확실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가 있어서 안가면 안 갔지, 하나님 쪽에서 문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약속을 해 주셨으니까.
근데 안 기뻐요.
서울대학이 아니라, 신의 나라로 들어간다는데 안 기뻐요.
그 안 기쁜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아내서, 박해가 주어지든지 간에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상관없이 기쁘고, 그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합격증과 같은 거니까.
그 십자가 사건에서, 내가 죽은 거라고 믿기만 하면 합격증을 받는 거예요, 이렇게 쉬운 합격증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기가 막힌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들어 갈.
서울대도 결혼생활도 삼성도 비교가 안 되는 그런 곳인데, 왜 안 기쁘냐 이거에요.
우리가 그 기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믿음 안에서 기뻐져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믿음과 소망 안에서.
그 기쁨이 왜 안 기쁜가를 한 번 찾아봐요.
오늘 본문에 보면 3절과 4절에 그 대답이 나오거든요.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이 약속이 그거에요 합격증이에요 합격증.
‘너 이제 일상 삶이 끝나면 천국으로 와서 영원히 하늘 아버지와 신들의 세계에서, 천사들보다 더 나은 자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이렇게 얘기해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자! 약속이라고 하는 것, 약속이라는 것 때문에 정말 천국이라는 게 불확실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질까봐,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 아래로 내려가면, 베드로사도가 자기가 변화산에서 경험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천국에서의 영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에요? 서울대학도 잊고, 삼성도 잊고, 멋진 사람과의 결혼생활도 잊는, 이 세상을 다 잊어버립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래서 자기의 경험을 들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확실하다, 천국, 천국이 좋다는 거 확실하고, 있다는 거 확실하고, 너희가 간다는 거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왜 안 기쁘냐 하면, 서울대 합격증 받고 입할 때까지 기쁘고, 삼성 합격증 받고 첫 출근 때까지 기쁜데, 왜 이 하늘나라에 가도록 약속이 되어 있는데도, 세상이 까마득하게 잊을 정도로 좋은 천국으로 가기로 돼 있는데도 왜 기쁘지 않느냐,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라 그랬잖아요?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정욕이 여러분 뭐라 그랬어요, 정욕.
내 마음이 비어 있지 않습니까? 채워야 만족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기쁩니다, 기쁨이 지속돼야 행복합니다.
이거 아~주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요.
자! 근데, 이 비어 있는 마음이 만족하고 기쁘기 위해서, 몸을 근간으로 삼는 거예요.
이 육체를 통해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겁니다.
육체가 만나는 가족들을 통해서 기쁩니다, 자식들 통해서 기쁘려 하는 거, 이게 정욕입니다.
육체가 만나는 사업, 비즈니스를 잘해 갖고 기쁘려고 해요 이게 정욕입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하지 않습니까? 예배당 건축을 잘해야 기쁜 거, 이게 바로 정욕입니다, 썩어질 정욕이에요.
중세에 지어졌던 유럽의 교회들을 보세요, 썩어진 거 아닙니까? 썩어졌다는 게 그 건물이 썩어져야 썩어지는 겁니까? 이제 거기서 예배드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시청 건물로 바뀌어 버리고 그럽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을 거에요.
제가 말씀드렸나요?
96개의 예배당 건물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500억짜리, 수백억짜리 예배당들이 경매로 나와 버렸어요, 벌써 썩어질 거예요.
그거 위해서, 500억짜리 예배당 짓기 위해서 얼마나 죽을힘을 다했겠습니까?
교인들을 달달 볶고, 목사님 마음도 달달 볶으면서 새까맣게 탔을 거예요, 근데 결국은 경매로 내놔야 돼요.
이 짓을 왜 합니까? 이게 다 썩어질 정욕이에요.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를 근간으로 육체를 기초로 해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 이걸 피해야 되는데, 이걸 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는, 서울대보다도 좋고 멋진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도, 삼성 취직하는 것보다도, 하늘나라 합격증을 받고도 기쁨이 없는 겁니다.
우리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해서 소설을 써 보면 이런 거예요.
자! 서울대 합격증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세상에, 서울대 합격증인데 서울대 합격증인데.
안 기쁜 사람이 있어요, 말이 됩니까? 말이 돼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서울대도 합격할 수 있고 또 카이스트에서 4년 장학금을 받고 유학까지 보장을 받을 수가 있는 합격증을 받았습니다.
그런 게 가능한지 안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보면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내 마음에는, 카이스트로 가서 전문분야에 더 깊숙이 빠져 갖고, 4년 장학금 받고 그 분야로 이어서 유학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카이스타라는 말도 와 닿지도 않고, 말 자체가 어감이 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어렸을 때부터 서울대 서울대 하고 자라가지고, 야! 우리 집안에 서울대 하나 있는 꼴을 좀 보고 죽자, 내 평생의 소원이다, 이래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애의 마지막 기쁨이 되고 소원이 될 수 있는데, 카이스트 가는 게 나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떡하겠냐? 해 가지고 할 수 없이 서울대를 들어갔어요, 합격증을 받았어요.
근데 이 아이 마음속에 자꾸 카이스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자꾸 카이스트 생각이 나요.
서울대 합격증을 받았는데도 기쁨이 없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삼성도 마찬가지에요, 삼성의 영업부 직원으로 취직이 됐어요.
근데 LG에서 기획부 직원으로 합격증이 또 날라 온 거예요.
기획부가 더 좋은 거 같아요, 근데 회사 이름은 삼성이 나은 거 같아요.
그래서 삼성의 합격증을 선택을 했지만, 그래도 영업부 보다는 기획부에 들어가야 이 출세가도가 열리지 않을까라는 이 아쉬움이 남아 삼성 합격증을 들고도 기뻐하질 못하는 거예요.
노처녀도 똑같아요, 여러분.
아니, 이목구비만 달리고 건강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라고는 씨도 안 보이다가, 나타났는데 Mr. Lee도 Mr. 최도 기가 막힙니다.
Mr. Lee는 장래가 촉망되는 박사에요, Mr. 최는 장래가 촉망 되는 비즈니스맨이에요.
이거 누굴 선택해야 됩니까?
그래도 명예가 좋다해 가지고 교수를 선택했어요, 사회적으로 좀 존경도 받고 그러려고.
그런데 명품가방 들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저거 사야 되는데, 외제차 타고 가는 사람 볼 때마다 나도 저차 타야 되는데… 자꾸 Mr. 최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러니 아니 이목구비만 달려 있어도 좋다고 했던 사람이, 너무너무 멋진 정말 이 신랑감이 있는데도 기뻐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Mr. 최에 대한 미련 때문에, Mr. Lee로 기뻐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똑같은 거예요.
사도베드로가, 천국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말씀드렸듯이 서울대도 있고 멋진 사람과의 결혼식해서 사는 삶, 삼성도 있고 LG도 있고 그리고 대통령 자리도 있고, 나라의 독립도 있고, 장관자리도 있는 이 세상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좋은 곳으로 들어가도록 합격증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돈 좀 벌면 기쁘지 않을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좀 우러러 보는 자리에 서면 기쁘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노회에 모였을 때, 한 300~400억 정도 예배당을 하나 딱 갖고 있으면, 목사님들이 나를 좀 존경하고 좀 우러러 보는 그런 눈을 갖지 않을까? 내가 총회서기도 되고 뭐 총무도 되고 총회 무슨 뭐 총회장으로 출마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러고들 있으니까, 서울대 합격증을 들고도 카이스트에 대한 미련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교수 될 Mr. Lee와 결혼할 약속을 붙잡고도, 비즈니스 하는 Mr. 최에 대한 미련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는 것처럼, 천국의 합격증을 들고도 그 소망 가운데서도 기쁨이라는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하는 말이에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러한 삶이 없으면, 9절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 놓고는, 그 십자가 사건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의 덕’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믿음은 내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렇죠?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을 드려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끝내는 겁니다, 더 이상 기쁠 게 없다,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여기서 결정이 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했으면, 그 다음에 덕이라는 건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입니다.
내가 마음을 드렸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내 마음에 갖다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다음에 지식, 그 마음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이 느껴지면, 그 선하신 마음이 선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그 뜻을 내 마음에 가르쳐 주십니다.
그럼 이대로 놔두면 되나?
아주 큰일 나요, 이대로만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에 알려지게 되면, 능력도 달라붙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인지 하나님이 나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절제라는 건 뭡니까?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과 주님의 십자가 역사를 통해서 하나가 되었지마는, 분명히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보혈을 입고서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런 죄인이다, 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절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나를 알고 났더니, 아! 나는 아직도 이 땅에 머물고 있어요.
합격증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곳에 가 있지는 않아요, 천국에 가지는 못해요, 그렇게 좋은 천국에 못가 있습니까?
못가 있으니까 인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내 내면 속에서 믿음부터 인내까지의 과정이 거친 다음에, 이 모든 과정이 계속 활발하게 반복되고 움직이면서, 밖에 나가서 살 때 그걸 경건이라고 얘기합니다.
믿음부터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가 내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이게 반복되지 않으면 십자가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약속도 묻혀버리고, 소망도 사라지고, 천국 때문에 기쁘다는 게 물 건너 간 게 돼버리고, 요만한 환란과 박해가 오면 다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겁니다.
넘어가버린다는 게 뭐에요?
기독교를 버려야 넘어가는 게 아니라, 돈 조금 못 벌면 신경질이 팍~ 납니다, 이게 넘어간 거예요 마귀에게, 우는 사자 같은 마귀에게.
돈 못 버는 거 상관없거든요? 천국 때문에 기쁜 사람에게는.
근데 이게 넘어가 버립니다.
이 과정이 반복돼요.
그 다음에 형제의 우애, 믿는 사람들끼리의 우애를 말해요.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내 속의 하나님이 강화되고, 그 사람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이 강화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기대면서 살아갑니다.
형제의 우애이지요.
그 다음에 사랑, 모~든 사람을 볼 때 이제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필요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나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지요.
이 과정이 반복돼야 된다는 얘기에요.
예를 하나 들면, 고넬료와 베드로와의 관계가 있잖아요?
기도하는데 환상이 보이지요?
그래서 그 광주리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 있어서 잡아먹으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난 그렇게 부정한 거 못 먹겠습니다 그러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 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베드로의 마음이 일치가 됩니다.
그래서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에게 찾아갈 때, 고넬료가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절제가 나타나는 거예요.
고넬료를 찾아가는 건 지식이고, 고넬료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꾼 것은 덕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기 때문에, 기도하는 중에 마음을 드렸기 때문에 나타난 일인데, 고넬료가 절을 하자 베드로의 절제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나도 너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이다, 그러고 일으킵니다.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거에요.
결국 관건이 뭡니까?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아직도 서울대 합격증 들고 이 세상인 카이스트 합격증에 미련을 두고 있음으로써, 서울대 합격에 충분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약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24시간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소망의 기쁨으로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다 너끈히 이겨나갈 수 있는 신앙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서울대 합격증과 같은 천국 약속을 붙잡고, 이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피하여 온전한 소망의 기쁨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