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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어서 옷이 더러운 자들의 교회>의 줄거리:
사데교회를 향한 메세지에는 처음에 오직 책망과 경고만이 주어집니다. 살아있음은 이름 뿐이고 실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되는 행위 이해가 좀 특이합니다. 행위는 주머니 같은 것이라서 그 속에 내용물이 있는데 그 것에 따라서 살아있어 움직이며 활동은 하고 있지만 실은 죽은 것이 되기도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런 경우에 나타나는 일이 바로 옷이 더렵혀지는 것이랍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을 풀어 봅니다.
죽어서 옷이 더러운 자들의 교회
(계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죽어서 옷이 더러운 자들의 교회>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죽어서 옷이 더러운 교회, 사데 교회를 말하는 것이겠죠.
옷이 더러워졌는데, 왜 더러워졌느냐 하면 죽었기 때문에 옷이 더러워졌다는 얘기입니다.
죽은 자에게 옷을 입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았으나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옷이 더러워진 그런 사람들이 교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가 함께 나누면서, 우리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를 오늘도 한번 살펴보는데, 사실은 다 경고의 말씀이고 무서운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다 사랑이시고 복과 은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에서 나온 말씀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죠.
오늘 말씀 5절에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에서부터 주시는 메시지를 한번 생각을 해봐요.
왜냐하면 좀 생각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구절에도 생각할 부분이 있지만, 이 부분이 특별히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생명책에서 지우지 아니한다는 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지금 등재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우지 않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 그대로 보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되었는데, 기록이 된 후에도 지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구절대로라면.
특히 이게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우여곡절은 있고, 나의 질퍽거림과 죄 된 속성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안 드는 행위가 나오기는 할지라도, 끝까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의 내용이 아닙니까?
그런데 생명책에 씌어 있다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이 이야기와, 지금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너희가 빨리 돌이키지 아니하면 살아있다고 하지만 죽은 자다.” 라는 이 내용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살아있다고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말 뿐이지, 실제로 내용적으로는 죽었다는 것과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이 맞물려 가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이해를 해야 할까요?
교리에 대한 선(先) 이해를 가지고 이 구절을 대하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 자체만 봐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아니 한다”라는 이 말씀은 어떤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가 다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 보내시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일단 이 땅에 태어나면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겁니다.
이 구절을 전제로 해서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교리는 확정하고 교리와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이 구절 내용을 그 자체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일단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이 땅에 내려 보내서 살게 하시니까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에 거기에서부터 오늘 보면, 4절에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흰 옷을 입고 다닐 수 있게 합당한 자가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지워가는 겁니다. 합당한 자가 된 사람을 남겨두고는 다 지우는 겁니다.
지금 사데 교회는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지워질락 말락 하고 있는 상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본문 2절에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그렇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책에 이름이 일단 기록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게 하셨으니까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서 합당한 자를 골라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할 때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지워간다는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책에서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지워간다는 이런 차원에서 보면, 생명책에 관한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겠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짐작케 해주는 어떤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열두 해 혈루 병을 앓는 여자예요.
이 여자가 지금 군중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부딪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접촉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군중 속에 몰래 다가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도 열 두해 동안 앓고 있던 혈루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예수님 옷자락을 잡았는데 혈루가 나았잖아요.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거기서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고 묻고 찾으실 때에, 제자들이 하는 말이 ‘아니 예수님이 정신 나갔나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하고 부딪치고 있는데…’
예수님하고 접촉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접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한 사람만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한 사람만 각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간 사람만 각인이 된 거예요.
아! 이거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군중이 모여 있어도 예수님이 마음으로 만난 사람은, 그 여자 한 사람 뿐인 거예요. 어떤 여자? 예수님으로부터 그 여자에게로 능력이 빠져나간 여자.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어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흩어져서 전도한 뒤에 보고할 때에, “정말 우리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도 가만히 보면, 제자들이 지금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는 상황과 연관되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두 사건을 놓고 보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이 땅에 실현할 때에, 내 이름이 나의 존재가, 하나님 마음속에 주님 마음속에 각인이 되고 이름이 기록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자, 이런 전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살아있다는 게 말하자니 살아있는 것이지 사실은 죽었다는 내용을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죽었다고 판단하시는 예수님의 기준이 뭐냐 하면, 행위입니다.
행위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 행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본문에 “온전하지 못하다”라는 이야기를 하세요.
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 다음 2절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나옵니다.
‘온전하다’라는 헬라어 말의 뜻은, 어떤 공간이나 그릇이나 주머니가 있으면 그것에 내용물이 차서 충만하게 넘쳐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이 충만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네 행위가 주머니 같은 것인데, 네 행위의 주머니에 들어있어야 될 내용물들이 충만하게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너는 살아 있어서 활동하고 움직이고 있지만, 살아있다는 증거로 동작이 나타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볼 때에 너는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행위 속의 내용물이 도대체 뭘까요?
뭐가 내 행위라는 주머니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사업장에 나가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다 행동이에요.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행위를 하나님이 들여다보실 때에, 어떤 특정한 내용물이 없으면 나는 죽은 것으로 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이 몸이 죽어버리면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재림을 대하는 순간에는 죽을 때의 인격 그 상태로 만나게 되니까,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그 순간의 인격의 상태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은 자로서의 행위를 하다가 돌이키지 못하게 되면, 생명책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생명책에 이름이 남아있는 자들만 들어가게 되는데,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죠, 사업하다 지옥으로 가고…
행위라는 것이 사업장에서만 나타납니까? 가정에서 아빠 노릇, 엄마 노릇, 아내 노릇, 자식 노릇 할 때에 다 행위가 나타나는데, 그 행위를 들여다 볼 때에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죽은 자이고, 그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리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 뭘까?
그것을 알게 해주는 실마리가 바로 오늘 사데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타나는 말들입니다.
뭐냐 하면,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 때에는 일곱별을 가지시고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이 내용 속에서 행위 속에 들어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내용이 있으면 산 자이고 없으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일곱별이 뭐라고 했죠? 주님의 사자입니다. 교회로 보내는 사자.
그러니까 사자라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보존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방편입니다, 천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키시고 보존하시고 이끄시는 방편의 핵심 내용이 뭐냐면, 별의 비밀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천사든 사람이든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교회에 별의 비밀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깨닫게 함으로써 교회를 교회되도록 지켜나가는 것이에요.
별의 비밀이 뭡니까? 교회는 이 땅에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그런데 별의 비밀이라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어두움이 덥힐 때라야만 보이는 것이 별의 비밀이라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이 땅을 살고 있을 때에, 이 땅에 대해서 내 마음이 암흑 상태를 볼 수 있을 때, 땅은 암흑일 때에, 그 때 내 마음에 하늘이 보이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에 대낮인데 온 세상에 어두움이 임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뭐냐 하면, 어두움이에요. 이 땅의 어두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죄를 사하는 사건이잖아요. 그렇죠?
죄를 멸하는 사건인데 어두움을 가져왔어요.
왜 그렇습니까? 죄가 뭐라서?
어두움 속일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서,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스스로 가짜 빛을 만들어 낸 것이 죄악입니다.
가짜 빛이 뭡니까? 선악을 내 스스로 판단하는 거예요.
내게 좋은 것과 내게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나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 내가 만들어낸 가짜 빛들이고, 가짜 빛을 밝히는 것이 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죄악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다는 것은, 가짜 빛을 멸하셨다는 것이고 가짜 빛으로 밝혀졌던 이 세상에 암흑을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움직일 텐데 이 세상이 암흑이니까 내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암흑 속에서 어떻게 움직입니까? 움직이면 다 부딪치고 다치고 난리가 날 텐데.
내가 판단할 수 없으니까 움직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뭐가 좋고 나쁜지를 모르니까 움직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빛을 수입해 들여와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의 빛이 들어와야만 내가 움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뭔지 아시죠?
암흑 속에서는 움직일 수 없어요, 행위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행위를 기준으로 볼 때에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자를 가려내는 것 아닙니까?
다 연관이 되어 있죠.
그러면 성령님은 뭐 하시는 분입니까? 별의 비밀에 의해서 내 마음이 이 세상에서 암흑을 봅니다. 암흑을 본다는 것은 꿈도 없고 비전도 없습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아야 꿈도 갖고 비전도 가질 텐데.
내가 판단할 수 없으니까 빛이 다 꺼졌어요, 십자가에서 빛이 다 꺼집니다.
내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 동시에 다 꺼지는 거예요.
꿈도 끄고, 비전도 끄고, 판단도 끄고, 소원도 끄고 다 꺼요, 암흑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하늘로 향하고만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마음에 주어지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성령님이 등장을 하십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성령님이 등장하시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꺼 버려서 암흑 속에서 있으면서 하늘의 빛만을 향하여 방향을 돌린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각과 말씀과 계획들을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빛을 심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살아있는 행위라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위인데, 그 행위 속에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행위는 뭡니까?
그 행위 속에 내가 판단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으려고 하고 쟁취하려고 하고 획득하려고 하고, 내가 판단해서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피하려 하고 없애려고 하고, 다 나로부터 시작된 행동의 이유와 의도가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죽은 행위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돈이 좋다’라고 하면 벌써 가짜 빛이 밝혀지고 있는 거예요.
돈을 벌어야 된다고 행동을 하는 거예요.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조차도 돈을 벌기 위해서 대화를 합니다. 모든 대화의 방향이 돈을 버는 쪽으로 쏠려있는 거예요.
자식을 양육할 때에도 돈을 벌 수 있는 자식이 되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고 대화를 합니다. 그 행위 속에 이 땅에서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죽은 행위라는 거예요.
그런데 돈이 벌리는지 안 벌리는지, 뭐가 좋은지 몰라요.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이 올바른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빛을 밝히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이 세상에 대해서 암흑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다 꺼버립니다.
다 꺼버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에 약속 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알려주셔서, 내가 행동을 하는데 내 행동 속에는 내 의도가 들어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어요.
그 행동 속에는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어요, 내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판단이 들어있어요.
이게 바로 살아있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연관 지어서 옷이 더러워졌다고 했는데, 옷이 더러워지지 않은 자가 남아있어서 그들에게 내가 흰 옷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옷이 더러워졌다는 것이 뭐예요?
옷은 신분을 말합니다.
신분이 뭐지요?
이를테면 한 여자가 있어요.
학교 다닐 때에는 학생입니다. 대학교 들어가서 남자 친구를 사귀었더니 애인이 됩니다. 이게 다 신분이에요. 그 애인이 좋아서 결혼을 하니까 이 여자는 아내가 됩니다.
학생 신분, 애인 신분, 아내의 신분, 결혼생활 하다보니까 자식이 태어나서 엄마의 신분, 이 모든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신분이 하나 있죠. 부모님이 계시니까 자식의 신분이고 딸의 신분이 있어요. 이게 다 옷입니다.
그런데 내가 학생의 신분, 여자 친구의 신분, 아내의 신분, 딸의 신분, 엄마의 신분, 이게 옷인데 이 신분 자체가 어떻게 더러워질 수 있을까요?
내가 엄마의 신분인데, 그 옷이 더러워지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자식을 키우면서 엄마의 신분으로 자식을 상대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 자식을 상대할 때에 자식을 향한 말과 행동과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나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내가 판단할 때에, ‘이 세상에서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이런 모습이다. 돈 좀 적당히 있고, 공부를 많이 해서 아무리 여자이지만 공부로 이름을 날려야 하겠다. 아니면 피아노를 잘 가르쳐서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겠다.’ 이런 기준들을 가지고 딸을 가르친다면, 그 기준을 가진 것 자체가 가짜 빛이고, 가짜 판단이고, 이게 바로 죄악이라는 거예요.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죄악이고, 죄악으로 인해서 말하고 판단합니다. 이게 바로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전부 다.
그러니까 모든 우리의 행위는 신분에 따라서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의 신분이면 사장님의 행위가 있고, 수위 아저씨의 신분이면 수위 아저씨의 행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행위들이 전부 나에게서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더러워진다는 거예요.
내가 사장이고 아내고 남편이지만, 아내를 향해서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께 받아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받지 않고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가장 좋은 예가 주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판단 할 수 있다. 얼마든지 너희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할 말이 많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들은 말만 너희에게 전하고 있다.”
이게 바로 신분이 더렵혀지지 않은, 죄가 없는 인간으로서의 주님의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내가 판단할게 많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왜 판단을 못합니까? 얼마든지 판단하고 세미나 들어가서 내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꺼버리고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엄마로서 아내로서 있는 신분 상, 남편과 마주하고 있는 이 시간에 뭐라고 말하기를 원하시는가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어떻게 귀 기울일 수 있습니까? 별의 비밀을 활용하는 겁니다.
지금 남편 앞에서 내가 까맣게 죽는 거예요. 남편이 하는 말과 남편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내가 옳고 그른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꺼버려요. 그러면 그 순간에 마음이 하늘로 향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넣어 주실 때에, 그걸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이 생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들을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거니는 자들이라고 하셨고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흰 옷이 무엇입니까? 흰 옷도 신분이에요.
흰 옷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영원 전부터 시간과 공간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을 그 때부터, 영원 속에서 함께 교제하시고 일체되시고 행복해하시고 날마다 웃으시면서 함께 살고 계셨잖아요.
바로 이 사귐에 우리를 참여시키셔서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1:1로 마주하시면서, 아버지 앞에서 영원 전부터 아들이셨던 신분의 옷을 입고 계시잖아요. 그 옷을 똑같이 우리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피조물인 우리를 신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당신과 같이 거닌다는 것이 당신과 똑같이 하나님을 1:1로 상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모든 신분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오직 별의 비밀을 통해서, 내가 판단하는 빛 아래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의도와 나의 계획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별의 비밀에 의해서 이 땅을 십자가로 다 꺼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들을 따라 움직이는 삶을 살 때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아서 영원히 하나님을 1:1로 맞대할 수 있는 아들로서의 신분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계시는 것이죠.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내 행위를 한 번 관찰해보세요.
몇 퍼센트 정도가 죽은 행위이고 산 행위인가?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그 동안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거의 100% 가까운 수치로 죽은 행위만 하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키라는 이야기에요.
망하게 하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니라, 돌이켜서 그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이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주님이 기억하는, 마치 혈루 병 여자를 그 많은 군중 중에서 단 한 사람을 주님께서 찾아내려고 하신 것처럼, 그게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시인하시는 그 내용 아니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며 삽니다.
그런데 나는 행동할 때에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행동이라도, 오직 별의 비밀을 따라서 하늘의 하나님의 뜻만을 받아서 행동할 때에, 살아있는 행동이 될 수 있고 살아있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필코 흰 옷을 받아 입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별의 비밀을 따르며, 성령을 따라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정말 기가 막히는 절망할 일이 벌어질 뻔 했습니다. 아휴~ 안도의 한숨이 다 나옵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때문에 여기 이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서 영적변신을 할 수 있게 하신 은총을 영원히 노래하렵니다.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내 행위를 한 번 관찰해보세요.
몇 퍼센트 정도가 죽은 행위이고 산 행위인가?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그 동안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거의 100% 가까운 수치로 죽은 행위만 하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키라는 이야기에요.
아멘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