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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가사(山으로 가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광인
구암지맥 3구간 졸업
양곡재(914번 도로)-△395.8m-x443.9m-△392.5m-△551.0m-약산(582.5m)-△387.7m-x397.8m-x382m-△267.6m-x265.6m-지맥 끝
도상거리 : 15km
소재지 : 경북 안동시 길안면 임하면
도엽명 : 1/5만 길안 예안
이 구간 전체적으로 능선의 상황이 좋은 편이고 약산 정상 오름 외 큰 오름의 굴곡도 없다
다만 약산 정상을 지나고 x447.0m를 지나면서부터 능선은 산불지대로 변하지만 여느 산불지대처럼 가시잡목은 없고 오히려 그로 인해서 조망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들머리인 양곡재로 접근하기 위해서 안동에서 버스가 있지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가까운 길안면 소재지는 택시가 없으니 대중교통편의 연구를 해야겠다
하산 지점인 추월마을은 임하면 소재지가 가깝지만 역시 택시는 없고 임하면 소재지에서 안동은 가깝고 버스가 자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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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
2016년 2월 14일 (일) 비 온 후 흐리고 간간히 진눈개비
본인 포함 4명
이번 구간은 도상거리 15km에 옆구리에 연결할만한 산도 없기에 다른 때보다 조금 늦은 거의 5시가 다 된 시간에 한남동 오거리를 출발한다
강원도나 전남 일부를 제외하고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서 겨울가뭄이 심해서 산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곤 했는데 3일 째 장마처럼 내리는 비는 약간의 가뭄을 해소해주는 것 같지만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도 가는 비는 뿌리니 오늘산행에서 비 맞는 것은 아닐까 싶고 전국적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대니 기온에 비해 체감온도가 낮다
임하리 추월마을 인근 신덕제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동의 서화수님과 조우 후 차량을 두고 한 대의 차량으로 들머리인 양곡재로 향하고 올라선 양곡재에도 바람이 거세니 상당한 추위를 느낀다
07시47분 천지휴게소가 자리한 고개를 출발하면서 오늘의 산행이 시작되는데 북쪽의 가파른 오름은 비에 젖어서 상당히 미끄럽게 올라선다
흙이 드러난 봉분의 몇 기의 무덤을 지나니 출발6분후 펑퍼짐한 x330.3m에 올라서며 가파름은 금방 극복된다
좌측으로 살짝 휘듯 소나무들 사이로 내려서는 마루금의 길은 초반부터 좋고 4분여 내려서니 뚜렷한 길은 날 등의 우측으로 살짝 비켜서 내리니 우측 구수리 쪽에서 양곡재에서 이어진 914번 도로로 연결되는 시멘트 임도고개다
북쪽 오름에는 차단시설의 시멘트 임도가 이어지고 잠시 오르면 쌍무덤이 나타나면서 우측으로 돌아가는 임도를 버리고 무덤 뒤로 잠시 오르면 능선 분기점이고 좌우에서 이어지는 넓고 좋은 수례 길을 만난다
▽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현재는 천지휴게소가 자리한 양곡재
▽ x330.3m은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
▽ x330.3m을 내려서면 시멘트 임도고 임도의 우측으로 내려가면 구수리다
▽ 올라서면서 뒤돌아보니 남서쪽 지난 구간 봉알산(373.2m) 이다
좌측(북서)으로 틀어가지만 넓은 수례 길은 우측으로 보내고 진행방향의 괜찮은 길을 따라 살짝 내려서면 孺人 蔚珍 林氏 무덤이 반겨주는데 사실 오늘구간 문패가 있건 없건 거기다가 돌보지 않는 폐 무덤까지 상당히 많은 능선이고 잠시 내려선 후 오름은 서쪽으로 3분여 이어지다가 2분여 북쪽으로 올라선 우측 오음실못 쪽 펑퍼짐한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틀어 잠시 후 다시 오름은 송림들이고 좌측아래 양곡재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거의 서쪽의 편안한 송림의 오름 아래로 멧돼지들의 목욕탕(?)도 보이면서 08시21분 송림들 사이로 하늘이 터진 곳에「길안22 1979.8」삼각점의 △395.8m에 올라서서 강풍을 피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시는 여유를 부리고 08시49분 출발하는데 아주 가는 비까지 뿌리면서 그나마 보이던 흐릿한 시야마저 가려버린다
송림아래 나무들이 자라난 폐 무덤들이 보이면서 거의 북쪽의 넓은 수례 길을 내려간다
6분후 내려선 우측 오음실못 골자기가 파고 들어온 안부에는 진흙탕의 멧돼지 목욕탕이 곳곳에 보이면서 삼거리를 이룬 수례 길이다
하늘이 터지는 넓은 길을 따라 오름은 북동쪽이고 3분여 올라서니 서쪽 사면으로 쌍무덤이 보이면서 넓은 길은 그쪽으로 사라지고 서쪽으로 잠시 후 내려선 후 올라야할 x443.9m가 보인다
송림아래 문패 없는 무덤과 폐 무덤들이 보이면서 길 없는 오름이 잠시 이어지니
▽ 다시 오르면서 뒤 돌아본 조금 전 오르고 내려선 △395.8m
▽ 쌍무덤에서 북서쪽으로 잠시 후 오를 x443.9m
방향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올라선 곳 우측 x421.6m가 분기하는 곳이고 잠시 평탄하다가 좌측으로 틀어 내려서야 하는 곳 역시 우측으로 능선이 분기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뚜렷한 북서쪽 길은 과수원 쪽으로 내려서는 것이고 마루금은 서쪽 x443.9m을 바라보며 내려서야 한다
분기봉에서 5~6분이면 무덤들을 지나고 내려서면 우측 건물이 보이는 과수원 쪽과 이어지는 무덤들의 임도를 만나서 내려선다
좌측(남) 멀리 흐릿한 날씨에 보이는 길안면 천지리 일대가 보이면서 잠시 임도를 내려서면 남북으로 능선을 가르는 시멘트 임도를 지난다(9시14분)
이 임도의 좌측으로 내려서면 길안면 소재지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약계정을 거쳐서 천연기념물 175호인 용계리 은행나무가 있는 곳인데 하산 후 시간이 많아서 들려보는 곳이다
절개지를 올라서면 넓은 수례길이고 일대는 무덤들이다
藥溪亭은 조선 후기 藥溪 권순기(1679~1746)가 강학을 하던 정자이며 권순기의 자는 汝則이다
1679년(숙종 5) 안동부 동쪽 산곡리에서 태어난 권순기의 생부는 僉知中樞府使 권시창 이다
본래 반변천 옆에 있었으나 수해로 유실되어 1897년(고종 34) 검박골마을 안으로 이건하였고 1989년 임하댐 건설로 길안면 용계리 산12번지에서 다시 길안면 용계리 632번지로 이건하였다
▽ 우측 x421.6m 분기점 오름에는 곳곳에 문패 없는 폐 무덤들이다
▽ 서쪽으로 내려서면서 올라야할 x421.6m를 바라보고, 내려선 임도
09시28분 시멘트길 고개에서 14분여 된비알을 올라선 x443.9m에는 蔚珍 林氏등 3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사면에는 활공장이 있는데 약산3.8km 보호수1.8km를 알리는 이정표인데 보호수가 바로 용계리 은행나무다
좌측아래 오대리 들판과 마을들이지만 강한 바람과 가는 비가 뿌리니 조망이 없다
잠시 지체하고 북쪽으로 틀어 잠시 평탄하다가 내려서는데 송림아래 가지치기된 것들이 곳곳에 널려있고 전면으로 △392.5m가 보인다
활공장에서 6분후 좌측(북서) 원오대마을 쪽 능선 분기점에서 우측(북동)으로 살짝 틀어 잠시 더 내려서면 우측 건방우못 골자기가 파고 들어온 곳이고 다시 오름이 5분여 이어지니 우측 약계정 쪽 능선이 분기하는 곳에는 문패 없는 무덤이다
북쪽으로 틀어 잠시 더 올라서면 봉우리가 아닌 능선상에「길안418 2004재설」삼각점이 설치된 △392.5m고 약간 더 올라서면 약400m의 봉우리다
살짝 내려서는 곳에는 문패 없는 무덤이이 자리하고 있고 곧 펑퍼짐한 지형에서 몇 걸음 올라서면 나무들이 쓰러져있고 참나무들의 좌측 卍홍은사 방향 능선 분기점이다
살짝 우측으로 틀어 내려서노라면 우측아래 용계리 골자기고 그 너머 날씨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큰 산은 와룡산(487.8m)이다
전면으로 약산이 솟아 있지만 역시 진눈개비가 내리는 고약한 날씨로 제대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체 상당히 미끄럽게 내려서는 능선의 좌측은 소나무 우측은 참나무들이다
▽ x443.9m 3기의 무덤에 그 좌측으로 활공장이다
▽ △392.5m를 지나 조금 더 올라선 卍홍은사 분기봉이다
▽ 우측 용계리 골자기와 와룡산이다
▽ 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10시 내려선 푹 패어진 안부는 좌측 홍은사 골자기 우측 용계리 골자기가 파고들어온 곳이고 좌우로 패어진 소로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바람을 피해서 막걸리 한잔들 마시고 13분 출발하며 오름이 시작되고 문패 없는 무덤을 지나며 5분여 올라선 우측 약계정 방향 능선 분기봉에는 400.2봉 표시고 약산2.6km 배씨묘1.3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다시 방향을 좌측(북서)으로 틀어 부드럽게 내려선다
좌측으로 틀어 3분여 펑퍼짐한 서쪽 홍은사 쪽 능선이 분기하면서 다시 우측으로 틀어 잠시 후 살짝 오르면 우측 용계리 쪽 능선 분기점이고 다시 북쪽으로 틀어 내려서지만 북서쪽으로 휘어가면서 능선은 고만하고 폐 무덤도 보인다
11시34분 오름이 시작되기 전 3기의 무덤이 능선에 길게 자리하고 있고 문인석이 서있는 배씨묘 인데 오래된 비석들과 상석의 글씨는 알아 볼 수 없고 문인석의 주인은 折衝將軍 정도만 알아 볼 수 있다
약산1.3km를 알리는 이정표까지 있는 배씨묘에서 오르려면 거의 폐 무덤의 주인은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醴泉 林公이다
이제부터 본격 오름은 표고차 200m 정도 줄이며 올라야 하니 오늘구간 가장 힘든 구간이자 더 이상 힘든 구간은 없겠다
하얀 깃 밧줄이 늘어져 있을 정도로 아주 가파른 된비알의 오름은 이어지고 7분여 그렇게 오르니 납작 무덤이 보이는 우측(동) 용계리 보호수 은행나무 쪽 능선 분기점이고 좌측으로 틀어 숨을 잠시 고르는 지점이다
▽ 안부에서 올라선 약계정 쪽 분기봉
▽ 오래된 무덤 배씨 묘
▽ 배씨묘 바로 위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醴泉 林公
▽ 오름은 된비알이다
잠시 후 다시 오름은 시작되더니 등산로는 가파른 북쪽을 피해서 좌측사면으로 오르는 밧줄의 안전시설을 통해서 능선의 날 등으로 올라섰다(10시55분) 배낭을 내려두고 우측으로 비켜난 삼각점을 확인하러 간다
5분여 동쪽으로 진행하며 올라서니 아주 낡은 건설부 삼각점의 △551.0m다
약산 0.2km의 갈림길에 다시 돌아오고 남서쪽으로 5분여 올라서면 의자 2개가 놓여있는 좌측(남) 능선 분기점에 이정표고 잠시 더 오르면 큰 무덤과 정상석과 나무전망대가 있는 약산 정상이다 (11시13분)
이 산에 만병통치의 진귀한 약재가 많고 풍병을 고칠 수 있는 약수터가 있다하여 藥山 이라 부른다
북동쪽(1시 방향) 나뭇가지 사이로 영등지맥의 아기산(589.3m)이 보이고 지맥은 임하리 임도 금소리 이정표 방향이다 3분 지체
우측아래 임하호가 산허리를 구불거리며 휘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잠시 급격한 내림이면 나무가 자라난 處士 慶州 李公 무덤이고 능선의 좌측아래는 길안천변의 벌판들이다
慶州 李公에서3분도 걸리지 않아 평탄한 능선의 좌측 오대리 쪽 능선 분기점에는 문패 없는 무덤이고 우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에서 역시 2분후 문패 없는 무덤인데 이제 무덤이 너무 많으니 특정 무덤 말고는 언급을 말아야겠다
11시29분 약산 정상에서 13분후 좌측사면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지만 올라서보니 우측(북) x267.5m를 거쳐서 임하호로 내려서는 봉우리고 좌측으로 살짝 틀어 내려선다
▽ △551.0m
▽ 약산 정상 이후 편안한 능선이다
좌측으로 틀어 내리려니 자연스럽게 좌측(남) 저 편 아까 지나왔던 원오대마을 뒤 활공장의 x443.9m가 보이고 나무가 자라난 폐 무덤들을 보며 좌측으로 틀어 2분후 좌측 어덕마을 능선 분기점이고 우측으로 살짝 휘어져서 내려서는 곳 역시 문패 없는 무덤이고 잠시 떨어져 내려선다
내려선 곳에서 4분 정도 올라서면 폐 무덤의 x447m에서 북쪽으로 틀어 펑퍼짐한 능선을 내려서는 곳 문패 없는 무덤이다
곧 북쪽 임하호로 내려서는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틀어 부드럽게 진행하는 능선은 산불의 흔적들이고 이 산불지대는 한동안 이어진다
분기봉에서 5분여 후 능선 상에 무덤이 하나 있는 곳에서 좌측사면의 길을 따르고 화재지역은 광활하게 이어진다
11시56분 화재지역이지만 소나무들도 살아있는 좌측(남) 길안천 쪽 능선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틀어 내려서고 △387.7m를 향해 오르려는데 북쪽 저 편으로 임하댐이 보이는데 그 우측으로 뻗은 능선의 끝은 영등지맥의 끝지점이다
12시03분 불에 나무들과 넝쿨들 사이로 뚜렷한 길로 올라서니 흙이 드러난 폐 무덤 공터에「길안303 2004복구」의 △387.7m이다
진행방향 북서쪽으로 x397.8m가 비죽하게 솟아있고 그 뒤 비슷하게 솟은 봉우리에 산불감시탑이 서있는 봉우리는 x382m고 모두가 산불흔적들이다
뒤돌아보니 x447m뒤로 약산 정상이 비죽하고 북동쪽 임하호 저 편의 아기산도 아까보다 훨씬 잘 보이며 북쪽 역시 임하호 건너로 덕산지맥의 능선도 뚜렷하고 남쪽으로 길안면 소재지와 서쪽 기룡산과 갈라지맥의 갈라산도 뚜렷하다
▽ x447m을 살짝 지난 지점
▽ △387.7m
▽ 지나온 x447m와 비죽한 약산이다
▽ 임하호 영등지맥 끝자락 좌측 앞이 임하댐이다
▽ 가야할 x397.8m와 두 번째 비죽 봉우리가 산불감시탑의 x382m
▽ 서쪽 신덕천 골자기 멀리 갈라산과 좌측이 기룡산이고 사진 좌측 갈라지맥
서쪽으로 부드러운 능선 내려서다가 우측으로 틀어 살짝 오르면 무덤의 우측(북) x243.4m 분기봉의 좌측사면의 좋은 길을 따르고 2분후 역시 문패 없는 무덤의 우측능선 분기점을 지나고 내려선 후 살짝 오르면 여전히 산불지대에 뼈대만 남은 움막터의 봉우리고 흙이 드러난 산불지대의 능선은 여전하다
12시20분 x397.8m 직전의 불에 탄 의자가 있는 지점에서 점심식사 후 13시 출발이다
13시06분 특징 없는 x397.8m에 올라서고 고만한 능선은 모두가 불에 탄 흔적들이지만 화재이후 뿌리를 내린 참나무들 사이로 마지막 올라서니
13시16분 산불초소의 x382m에 올라서니 조망이 뛰어나다
이제까지 보았던 산들과 지맥의 끝자락 앞 반변천 건너 사부란재 인근 2~300m 대의 덕산지맥이 뚜렷하고 멀리 안동시가지며 남쪽 저 멀리 임봉산(682m) 금학산(575.5m)과 더불어 크게 보이는 산은 갈라지맥의 황학산(779.9m)이다 2분 지체
서쪽 저 아래 능선을 가르는 것 같이 지나가는 임도를 바라보면서 내려서는 곳은 마사토가 흘러내릴 정도로 미끄러지며 죽죽 고도를 줄인다
4분여 내려서면 아까 x382m 정상에 오르기 전에 좌측사면으로 이어가던 뚜렷한 족적을 만나고 산불의 흔적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간다
13시31분 정상에서 출발 13분후 살짝 올라선 진행방향 길안천 변의 x220.6m 능선을 버리고 우측(북)으로 내려서는 곳 잠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 남쪽 길안면 소재지 멀리 임봉산 황학산 들이 크게 보인다
▽ 중앙으로 이어가는 지맥의 끝자락 멀리 안동시가지고 우측은 임하마을
▽ 당겨본 임하마을 건너 천전제방 뒤로 덕산지맥 능선이다
▽ 아기산
▽ 뒤 돌아본 x397.8m와 약산 정상
▽ 뒤돌아본 x397.8m와 x382m
▽ 좌측에서 진행방향 x220.6m 능선을 버리고 우측으로 틀어 급하게 내려선다
내려서면 평탄하면서 좌측사면으로 문패 없는 무덤이고 숲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산불지대는 끝난다
곧 약280m의 북쪽 짧은 능선분기봉의 좌측사면으로 지나가는 산길의 우측으로 成安 趙氏 무덤이고 내려서는 곳에는 處士 醴泉 林公이며 능선의 사면 곳곳에 자리한 무덤들이며 금방 올라선 좌측능선 분기봉에도 문패 없는 무덤이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낙엽송도 잠시 보이고 곳곳에 방치된 폐 무덤들이다
13시46분 우측으로 x231.9m의 능선 분기봉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사면의 길이 보이지만 그냥 올라보니 봉우리 우측사면에 문패 없는 무덤이고 좌측사면에는 나무가 자라난 폐 무덤이며 북쪽에서 북동쪽으로 휘어져 잠시 내려서면 푹 패어진 곳인데 좌측 바로 아래 금소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가 가까운 곳이며 그 쪽으로 푹 패어진 흔적이고 오랜만에 오름이다
능선의 곳곳에 석축으로 쌓여진 구덩이들이 보이는데 처음 볼 때 폐 軍시설이었던가! 했지만 부장품을 묻던 아주 오래된 무덤을 도굴한 흔적들이니 석축은 石棺이 되겠다
서쪽의 오름도 좌측사면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남서쪽 금소마을로 흐르는 지능선으로 가는 길이려니! 생각하고 직접 치고 오르려니 넝쿨들이 빼곡하니 돌아갈걸 그랬다
잡목 빼곡한 봉우리에 간신히 올라서는데 남쪽 능선으로 오래된 비석의 무덤이 보였다
북쪽으로 휘어 내려서니 가지치기가 되어 쭉쭉 자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푹신한 갈비가 밟힌다
▽ x231.9m 분기봉을 굳이 오르지 말고 사면 길로 가는게 좋겠다
▽ 이 봉우리도 오르지 말고 좌측사면 길을 돌아가면 편안한 송림능선이다
북쪽으로 3분여 뻗은 소나무 사이로 진행하니 우측 임하마을로 능선이 분기하는 곳이고 곧 큰 봉분의 문패 없는 무덤이고 북서쪽에서 잠시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좌측사면의 길이지만 역시 올라서보니 석물만 남은 파묘의 봉우리고 다시 좌측(서)으로 틀어 잠시 급격하게 몇 걸음 내려서면 패어진 안부에서 오름에는 소나무들이 사라지고 잡목과 참나무들이다
능선의 우측아래로 임하마을이 크게 보이는데 몇 가지 석탑들과 중요민속자료인 안동오류헌 국탄댁 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도의 표기다
14시08분 좌측(남)으로 능선이 분기하고 곧 잘록한 곳에서 오르려면 좌측사면으로 문패 없는 3기의 무덤이 보인다
다시 송림이 시작되고 잠시 후 좌측으로 분기한 x222.2m 분기봉을 오르고 북서쪽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족적만 보면서 내려서다보니 孺人 咸安 趙氏 무덤이 보이면서 자세히 보니 x222.2m 능선이다
제대로 내려서는 능선의 봉우리 하나 오르지 않고 돌아가는 사면에는 폐 무덤이고 서쪽으로 잠시 평탄하게 진행하니 △267.6m다(14시16분)
관리가 안 된 오래된 삼각점의 △267.6m에서 막걸리 한잔에 5분 소요하고 출발인데 북쪽으로 편안하게 진행하다가 북쪽 능선 분기봉을 오르지 않고 좌측사면으로 돌아가는 곳 좌측으로 석물의 무덤이 보인다
곧 패어진 곳을 지나고 서쪽으로 짧은 오름은 남쪽 능선 분기봉을 오르지 않고 우측사면으로 돌아가면서 북서쪽이다
△267.6m에서 8분후 북쪽 벽계마을 쪽 x165.9m 분기봉에서 좌측(서)으로 방향을 꺽으며 진행하는 곳이다
곳곳에 도굴한 흔적의 석축의 구덩이들이다
▽ 이 파묘의 봉우리도 굳이 오르지 말고 좌측사면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 孺人 咸安 趙氏 쪽은 x222.2m 능선이고 빨간 화살표가 지맥이다
▽ △267.6m
14시34분 x265.6m 오름 직전 내려서는 곳에는 通政大夫 承政院秘書 醴泉 林公이 누운 곳이고 곧 올라서면 구덩이가 파진 봉우리가 x265.6m이다
북서쪽으로 내려서노라면 좌측아래 35번 도로가 가깝고 곳곳에 녹색의 소나무제선충 무덤(?)들이다
금방 좌측(북서)으로 긴 능선이 분기하는 곳에서 우측으로 틀어 내려서는 곳에는 處士 義城 金公이 누워있고 좌측(북서)으로 틀어 2분여 내려선 후 다시 우측(북)으로 내려서려면 문패 없는 2기의 큰 무덤이고 떨어져 내린다
큰 2기의 무덤에서 2분후 하늘이 터지면서 똑 같은 2기의 무덤인데 아래에는 孺人 月城 李氏고 곧 義城 金公과 全州 柳氏다
3분후 살짝 올라선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살짝 틀어 내려서노라니 우측 골자기 쪽으로 과수원이 보인다
봉우리에서 3분후 내려선 능선을 가르는 수례 길 흔적에는 쇠붙이 시설이 보이고 금방 올라선 곳은 우측(북) x170.5m 능선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틀어 내려서노라면 문패 없는 잘 조성된 2기의 무덤이다
좌측 북서쪽으로 틀어 내려서는 능선에는 금방 석물과 커다란 비석의 주인은 愧窩 處士 義城 金公인데 비석과 석물과 달리 봉분은 허물어져 있으니 후손들의 손길이 끊어진 것인가!
돌보지 않으면 폐물로 변하는 것을 산행하며 수없이 보아왔으니 다 부질 없는 것이라는 게 내 개인의 생각이다
거의 평탄한 송림의 능선이고 곳곳에 구덩이 같이 도굴된 흔적들이다
▽ 通政大夫 承政院秘書 醴泉 林公를 지나 올라서면 구덩이의 x265.6m다
▽ 시설물의 안부를 지난다
▽ 愧窩 處士 義城 金公
14시59분 義城 金公에서 3분후 구덩이가 패어진 북쪽 분기봉에서 내려서려면 2기의 무덤이고 좌측으로 살짝 틀어서 내려서는 곳에는 계단식의 소나무 조림지가 잠시 보이고 좌측으로 틀어서 3분도 되지 않아서 북쪽으로 틀어 살짝 오르니 구덩이의 봉우리에서 우측아래 전신주들의 도로가 가깝다
義城 金公 이후 능선의 뚜렷하던 길은 흐지부지해지고 잡목들이지만 능선이 뚜렷하니 독도의 어려움은 없다
15시10분 북쪽으로 이어지던 능선은 약간 좌측으로 휘어지는 곳에는 孺人 宣城 金氏의 무덤인데 생소한 선성 김씨는 본래 안동 예안의 옛 지명이 宣城이라니 곧 禮安 金氏나 같은 것 이 겠다
좌측 바로 아래 추월마을이 크게 자리하고 있고 금방 북쪽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곳에는 백합나무들이 일렬로 서있고 우측으로 옛 수례 길의 흔적이다
마지막 살짝 올라선 둔덕에서 좌측으로 틀어 내리면 추월마을과 임하마을을 잇는 도로가 보이면서 지맥의 끝자락이 바로 보인다
15시15분 좌측으로 민가 한 채를 끼고 내려서면「대추나무 길」의 도로명 주소가 전신주에 걸려있는 도로 다
북쪽 비닐하우스들의 농로를 잠시 따르면 반변천 변의 신덕제방 길에 올라서고 추월마을 주민들의 소득원이니 재취하지 말라는 살구나무들이 심어진 제방을 따라 서쪽으로 잠시 진행하니 배수시설이 있는 지점이 좌측 길안천이 반변천으로 합수하는 지점이니 정확하게 이곳에서 지맥을 마친다(15시20분)
▽ 대추나무 길 도로로 내려서고
▽ 좌측 길안천 우측 반변천
▽ 터널 저 뒤가 포진교가 있고 얼마 전 軍헬기가 불시착 한 곳이다
이 반변천은 서쪽으로 흘러서 안동시가지 영가대교가 있는 곳에서 낙동강으로 합수하는데 영가대교 인근 합수점은 갈라지맥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구암지맥은 끝나고 인근에 아침에 주차해둔 차량으로 들머리로 이동해서 나머지 차량을 회수하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인근의 명소를 차량으로 둘러보기로 한다.
임하리는 임하현의 관아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현내동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변천이 흐르는 강가에 있다고 하여 임하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에 안동군 임현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추월리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31년에 임하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임하1리가 현내, 임하2리가 나중에 편입된 추월이니 추월마을은 임하2리가 되겠다
먼저 아침에 산행이 시작되자 말자 x330.3m를 오르고 내려섰던 시멘트 임도를 통해서 동쪽 용계천 변이 흐르는 도로를 통해서 산행중에 보호수 이정표를 보았던 용계리 은행나무를 보러간다
천연기념물 175호에 수령은 700년이고 본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는 것 때문에 그 자리에서 15m를 들어 올려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는데 그 공사기간이 3년에 걸쳐 진행되었단다
하기야 그림에서 보이듯 엄청난 나무를 미세하게 들어올리고 흙을 채우며 하는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끈기있는 공사였을까! 상상이 간다
선조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이곳에 낙향한 다음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행계(杏契)를 조직하여 매년 7월에 이 나무 밑에 모여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하며 탁씨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한 번씩 간단한 제를 드린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밑 부분의 속이 썩고 윗부분에서도 썩은 가지를 통하여 빗물이 들어가 나무가 상하기 시작하였으므로 1982년에 외과수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하(臨下)댐 건설로 이 나무의 9m 정도가 수몰될 처지가 되자 1990년부터 2년 9개월간에 걸려 높이 15m에 이르는 가산(假山)을 조성한 후 올려 심어 보호하고 있다.(펌)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재작년 영등지맥 산행 때 아기산 인근에서 몇 차례 안내판을 보았던 지례 예술촌을 다녀오기로 하는데 차량 없이 찾아가기에는 상당한 오지다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임금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과 그의 중형(仲兄) 방형(邦衡)의 자손이 340여년간 동족 마을을 이루어 주경야독하며 살아온 전형적 사림(士林)의 마을이었다
지촌은 의성 김씨 내앞파의 대조(大祖) 청계 김진(金璡)의 현손(玄孫)이며 학봉 김성일의 백씨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이며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의 넷째 아들이었고 38세에 문과 급제하여 40세에 제원(堤原)찰방(察訪)이었을 무렵 지례(芝澧)로 분가(分家)하여 호를 지촌이라 하였으니 지례의 입향조가 된다
지촌이 지례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도연에 은거한 아버지 표은 김시온의 정신적 영향이었다
김시온은 나라가 망하자 청에 항거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딴 도연(지명,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에 하나 뿐인 도연폭포가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남)에 은거하여 스스로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호(自號)하고 평생 독서하고 제자를 길렀던 것이다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 지촌은 조선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은둔(隱遁)생활을 좋아하여 그의 집을 도연에서 10리나 더 상류인 지례에 지었다
그는 청렴하여 한때 영암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땐 수레에 국화꽃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는 전한다. 그가 58세 되던 해 남인세력이 물러나던 경신출척(庚申黜陟)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지례에 돌아와 9년을 지냈다
당시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주도하던 노론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받고 영남인이 핍박 받던 때라 그가 기사년(己巳年)에 올린 우암타도의 상소는 임금으로 하여금 우암을 사사케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벼슬살이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벼슬을 사양한 것만 열 일곱 번이나 되었지만 당시로선 영남인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임금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70노구를 이끌고 왕명을 받들어야만 했다.
임금의 변덕으로 남인들이 다시 실권(失權)하여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전라도 동복(同福)에 유배되어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후 지례마을에서는 아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와 김대진, 난곡 김강한, 장암 김시락, 수산 김병종 같은 학자를 비롯 문집을 낸 이가 10여명에 이르고 지촌의 출계손(出系孫) 중에는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 일컫는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독립운동가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같은 이가 있다.
지촌이 지례에 터를 잡음으로서 그 의 후손들은 340여년간 교통불편과 가난을 겪으면서도 선조가 남긴 땅에서 가난하면서도 면학하는 전통을 이어 갔다.
이들은 지촌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과 제청을 지어 학문과 숭조정신을 강조했고 근대에 와서도 마을안에 초등학교를 짓고 문맹퇴치를 비롯 후세교육에 힘써서 이 마을 출신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가 수십명에 이른다.
1975년에야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녔다. 정부의 임하댐 계획이 발표되자 1985년 지촌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1986~1989동안 마을 뒷산 중턱에 옮겨 지어 한국최초의 예술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열었다.
다른 집들이 모두 도회지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했지만 지촌가의 사람들은 고향을 내려다보며 현대의 은둔지를 만들어 내외국인들로 하여금 가장 한국적 리조트를 체험하게하고 있다. (사이트에서 퍼 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덕산지맥과 영등지맥을 종주할 때 차량으로 자주 지나다녔던 곳이며 오늘 산행에서도 후반부 수시로 보였던 임하댐이다
▽ 임하댐에서 바라본 아까 산행했던 약산
▽ 강 건너 하얀 표시가 있는 곳이 영등지맥 끝자락이고 큰 산이 아기산이다
안동시 중심시가지 동쪽 18㎞ 지점인 낙동강수계의 반변천에 건설되었다. 낙동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 유역이 보유하고 있는 수자원을 개발하여 낙동강 본류 중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북부지역, 즉 대구·구미 등의 내륙공업도시와 지방 중소도시 및 농촌지역에 전력과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조절 및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1985년 12월 댐과 발전소 건설을 위한 가설공사에 착수하여 1990년 6월 댐 축조를 완료하고, 1991년 8월 발전기를 설치하여 1992년 5월 완공했다. 중앙차수벽형 사력 댐으로 높이 73m, 길이 515m이며, 댐으로 조성된 저수지는 유역면적 1,361㎢, 총저수량 5억 9,500만t이다. 여수로문비 4문과 발전소 내에 시설용량 2만 5,000kW급 발전설비 2기를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