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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의 사실과 진실
이승하 (Homepage)
아래는 제 시의 독자분에게서 온 편지글입니다.
일단 한번 읽어보시고요……
‘시에서의 오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언젠가 제가 관여하고 있는 카페에 올라온 시 가운데 ‘나팔꽃’이 들어간 내용이 있었습니다. 자정에 잠이 안 와 뜰을 걷다보니 나팔꽃이 활짝 피어 먼데서 오는 사람처럼 그리움이 피어난다는 것이었지요. 나팔꽃은 이른 아침에 피는 꽃이니까 오류가 아니냐고 했더니 “잠이 안 와서 앞마당을 서성이다가 달밤에 핀 나팔꽃을 분명히 봤다”고 하고, “공개적으로 댓글을 올려 망신을 샀다”고 하며 몹시 화를 내어 민망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또 한 번은 뻐꾸기는 여름 철새라 이르다 해도 5월말이나 6월초나 돼야 뻐꾸기가 울 텐데 진달래가 피어나는데 뻐꾹새가 운다고 한 시도 보았지요.
아래 두 편의 시도 그러한데, 특히 홍해리 시인은 ‘사단법인 우리 시’의 회장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홍해리 님의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라는 시의 첫 행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 하셨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일반 벚나무는 꽃이 먼저 피고 이파리가 나중에 피지만 산벚나무는 “매우 빨리 자라고 대기오염성에 저항성이 강하며 4월 중에 잎이 먼저 나며 꽃이 핀다”고 나와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봄에 잎과 같이 피는 꽃이라고 나와 있지만 산벚나무는 분명 꽃이 먼저 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목이 ‘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하면 시의 내용에 하자가 없는데 ‘산벚나무’라고 했으니 이것도 시의 오류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하여 여쭈어봅니다.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은적암(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붉은빛 꽃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 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그리고 또 한 편의 시는 최명란의 「색소폰 부는 걸인」입니다.
색소폰 부는 걸인
북한산에 가면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
가난하지 않은 내가 가난한 너를 잊어버릴 때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북한산으로 간다
도봉산역에 내려 천천히 김수영 시비가 서 있는 북한산 입구로 걸어가면
등 굽은 소나무 아래 날마다 색소폰을 부는 걸인 사내가 앉아 있다
목발을 내려놓고 등산로에 남루한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 내려놓고
색소폰을 부는 그 외발의 사내는
색소폰을 불 때마다 파르르 김수영 시인의 풀보다 먼저 눕는다
바구니에 동전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북한산 솔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 같기야 하랴
지금까지 산을 오르는 동안 또 산을 내려가는 동안
내가 그대를 속인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속였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동안
북한산은 사내의 색소폰 소리를 들으며 웃기도 하고 삼천사 마애불과 손잡고 춤을 추기도 한다
어느 달 밝은 밤에는 김수영 시인이 시비 속에서 걸어 나와 인수봉을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하고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시비 앞에 쓰러져 잠이 들기도 한다
눈 내린 겨울날 색소폰을 불다가 그 걸인 사내 앉은 채로 눈사람처럼 쓰러져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빈 플라스틱 바구니만 등산로에 나뒹군다
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북산산은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날마다 그의 색소폰으로 대신 불고 있다
가끔 김수영 시인도 막걸리를 마시고 시비에 기대어 색소폰을 분다
어디선가 가난의 동전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도봉산에 가면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길 바로 옆에 「풀」의 시인 김수영의 묘소가 있습니다. 도봉서원 못 미쳤는가 조금 더 올라가서인가에 있는데 시비에는 「풀」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를 감상할 때는 시의 메시지가 우선 중요하지요. 말하려고 하는 사상이나 주제를 가지고 시를 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시가 사실의 잘못을 저지르는 왜곡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시에서는 사실과 진실이 있다고 합니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하는데 실제 서정주 시인의 아버지는 종이 아니고 ‘마름’이었다고 합니다. 마름은 주인을 대신하여 소작물을 관리하니 시실로 따지면 종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럼 서정주 시인이 거짓말을 했나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시에서 이렇게 하는 거짓말을 두고 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라고 하더군요.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어렵기는 하지만 최명란 시인은 「색소폰 부는 걸인」에서 도봉산을 북한산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북한산ㅡ일반인들에게 북한산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산은 삼각산이고 삼각산과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도봉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종 헷갈려하는 것은 아래의 연혁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 두 산을 ‘북한산 도립공원’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연혁
1983. 04. 02 북한산 국립공원 지정
1987. 07. 01 국립공원관리공단 설립
1987. 08. 05 북한산 동부, 서부관리사무소 개소
1998. 12. 17 북한산관리사무소, 북한산관리사무소 서부지소 명칭 변경
2004. 01. 30 북한산사무소, 북한산서부사무소 명칭 변경
2005. 10. 01 북한산사무소, 북한산북부사무소 명칭 변경
2006. 11. 27 북한산사무소, 북한산도봉사무소 명칭 변경
“어느 달 밝은 밤에는 김수영 시인이 시비 속에서 걸어나와 인수봉을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하고”라는 구절도 최명란 시인이 북한산이 아니고 도봉산이라 알고 있었다면 쓸 수 있었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도봉산의 최고 봉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 선인봉이고, 삼각산의 최고 봉우리는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인데 인수봉(810.5m)은 만경봉(799.5m)보다 높고 백운봉(836.5m) 다음 가는 두 번째 높은 봉우리로서 생김새 또한 여느 봉과 다르게 둥근 원통형(알봉)을 하고 있어 암벽가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올라보는 봉우리인데 특이한 모양 때문에 시인들의 눈에도 이채롭게 보이겠지요.
그러니 두 산은 분명 다른 산이고 북한산은 더더욱 아니지요. 시를 두고 시로서 감상을 하면 그만이지만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을 모르는 사람이 이 시를 읽게 되면 김수영 묘소와 시비가 도봉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있는 것으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시인이 한 편의 시에 무엇을 담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나무 가지에 참나무 이파리가 붙어 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 평론가들이 이런 시에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평론이라는 것이 시의 주제나 사상, 시 이념의 가치가 보다 중요하지만 시의 기능에서 미약하지만 지적 기능을 무시하는 측면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짧은 시 한 수에 촌철살인이 담겨 있다고 시인은 자부심이 대단한데 왜 이런 실수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업상 시를 많이 읽는 시인들은 이런 오류를 수도 없이 볼 텐데 어떤 식으로든지 대처를 하는 것이 평론가들의 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체, 못 본 체한다면 평론가들의 직무유기가 되겠지요.
저는 시인이 작품의 오류를 인식했다면 시집을 낼 때나 재판을 찍을 때 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한 것은 시적 상상력의 결과이므로 오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호순>
* 자, 여기까지가 편지의 내용이구요,
지나치게 과학적인 관점에서 사실 관계를 따질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위로 예로 든 것들(나팔꽃, 뻐꾸기, 산벚나무, 북한산과 도봉산)은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문학평론가들이라고 해서 이런 오류를 다 발견할 수는 없지요. 발견을 했더라도 그것을 일일이 다 글로 쓸 수는 없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에 대해 연세대 최유찬 교수가 강연을 했는데 모 시인이 강연을 다 듣고 나서 『토지』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참판’이면 종2품 벼슬로 권문세가인데 평사리에 달랑 한 집만 있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평사리에 누대로 살아왔으면서도 최씨 집성촌의 한 집이 아니라 근린에 이 집만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을 전혀 모른 채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집성촌을 이룬 가장 큰 이유는 논에 댈 물꼬 때문에 가문과 가문끼리 갈등이 심해져서 힘을 갖고자 하여 모여 살았다고 했습니다. 또 집단농장의 개념으로 논농사가 이루어져 경제적 필요에 의해 모여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윤씨부인이 겁탈을 당해 낳은 아들 김환이 자기를 버린 윤씨부인에 대한 복수심에서 구천으로 변성명하여 모친의 집 최참판 댁으로 들어와서 윤씨부친의 며느리인 별당아씨를 꼬여내 도망을 치고, 최치수가 총을 구해 이들을 추적하는 제1부의 기둥줄거리는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법도를 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토지』는 민속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따져보면 오류투성이의 작품이라는 것이 그 시인의 주장이었습니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에서도 명백한 오류라면 바로잡아주려는 노력을 평론가가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평론가의 직무유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시인 자신도 독자도, 또 문학평론가도 오류를 바로잡아주려는 노력을 할 때, 우리 문학은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동식 시인이 『현대시학』에 우리 시의 잘못된 표현을 꼬집는 칼럼 ‘시적 상상력과 오’를 연재한 바 있는데, 이것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 어느 카페에 올려둔 위의 글을 읽고 ‘바보천사’를 닉네임으로 쓰는 분이 이런 내용을 올려주셨습니다.
시에서의 오류라니 생각나는 게 있네요. 2005년 ‘시인들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에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선정됐었는데 그 시를 읽고 조금 황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환자의 이미지를 참 적절히 표현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지만 본문을 보면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가자미의 눈은 원래 떨어져 있다가 한쪽으로 몰린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렇게 썼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년의 이미지로 차용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본인처럼 해양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가자미 옆에 가자미가 누우면 서로 마주볼 수 없지요.
또 있습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는 표현. 가자미는 헤엄칠 때 위아래로 흔듭니다. 수족관에 가시면 자세히 보십시오. 뭐 제가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이 잘 아는 풍경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면 좋은 시는 그만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인데 제가 이걸 지적했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들이더군요.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가 되면 기술하기로 합니다만 이 사건은 아마 시적 표현의 대표적인 오류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 이상 두 사람의 글을 보셨지요? ‘시적 표현도 논리적으로 맞아야 한다’와 ‘시를 감상할 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안 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는 셈인데.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출처 : 빈터 홈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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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경하 샘의
수요디카시광장<변명/김경화>의 시작노트를 보면서
오래 전에 시적 오류에 대해 쓰고 본 글이 생각나서 참고삼아 보시라고
가져와 보았습니다.
시나 디카시나 사실과 진실, 오류는 다른 것이겠지요.
사진의 꽃등애를 꼴벌로 인식을 하고 있는데
물론 꿀벌과 꽃등애는 다릅니다다만
꽃가루받이는 꽃등애도 하고 있네요...
어떤 종류의 글이든 사실에 기초하여 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터이고
시적 오류는 꼭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심코 쓴 글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 옳겠지요.
전문 작가들은 자료 수집에도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들었습니다
시적 허용을 떠나서
진실과 사실 차이는 몰라도 오류는 바로 잡는 게 좋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