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小確幸)
2018. 10. 백란주
남편과 영동을 둘러 김천 직지사로 가을 발걸음을 하기로 했던 날과 책갈피 문학기행 날짜가 겹쳤다. 남편 두고 혼자 떠나기가 쉽지 않아 동행 길을 물었더니 의외로 같이 가겠다고 한다. 순간, 동선에 따른 계획이 성립되어야 한다, 적절한 조율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밀착동행으로 ‘공공의 적’이 되지 않으면서, 남편의 감성도 충분할 수 있는 중용을 발휘해야한다…. 등 매뉴얼 정리가 필요했다.
책갈피 회원들과 나들이 걸음은 처음이다. 가을날은 전라도행의 부름에는 그 어디라도 응답하고 싶은 나의 교신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던 터라 함께 하는 시간만으로도 설렘을 동반했다. 나와 함께 시집 온 ‘김초혜 시집’과 한하운의 소설 ‘가도 가도 황톳길’, 그들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각자 부여받았던 여성·남성 호르몬을 대신 할 호르몬과 마주할 나이에 이른 인간화 과정에 이른 우리들의 여행길에서 배려는 역시 그 상황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제일 뒷자리의 불편함을 알고 먼저 자리를 찜하는 책갈피언들의 심성은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엇이 있음을 나는 받을 수 있었다.
태백산맥문학관에 들어서면 바로 반겨주는 글.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비단 문학뿐일까.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기여함이 되는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 조차도 모호한 21세기에 있는 듯해서인지 기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더 뚜렷하게 들어왔다.
나의 감성은 아날로그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멋진 건축물이라도 과거의 첫정에 들어왔던 이미지가 붙들고 있는 것에서는 쉽사리 마음을 주지 못하는 단점을 드러낸다. ‘태백산맥문학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주어진 공간이지만 처음 방문했던 때와 달라진 내부 구조에 나는 새집에 들어선 듯한 낯섦과 옛날 집에 대한 향수를 좇아간다.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과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연작시를 필사했던 나의 스무 살 노트를 마주하며 내 스무 살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물었다. 넌 이 나이에 이 말 맛을 알았니? 이 시어들의 아픔을 느꼈니? 아마도 막연함으로 적었을 것이다. 사랑굿1·9·13·14·30·31이 필사된 노트를 보며 나는 그때 무엇을 더듬었을지 생각해내려는 이 억지스러움에 웃게 된다.
바다는 비를
다시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흙은
물을 마시어도
물이 아니어듯
눈 먼 영혼을 가진 그대여
나의 헌납을
속박 없이 받으시라
- 사랑굿 30 중에서 -
조정래 가족 문학관을 둘러본 후 분청문화박물관에 들어갔다. 왠지 소록도 가기 전에 분청사기를 만난다는 것은 짧은 호흡으로 가다듬을 수 있는 여백 같은 느낌이었다.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 발전하여 백자의 등장으로 분청사기는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소멸된 슬픈 얼굴 분청사기.
소록도 가는 길.
며칠 전부터 나는 ‘소록도’라는 단어에서 가슴이 저렸다. 지난 주말 찾아왔던 콩레이 태풍이 남도로 진입한다는 보도에 특사로 이청준 작가와 한하운 시인을 보냈다. 그들의 감성과 눈물이라면 아무리 요란한 태풍이라도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변수는 그들이 표현해 내어야 할 그 무엇들을 캄보디아어로 할 것인가, 모국어로 할 것인가. 어쩌면 만국의 공통어인 바디랭귀지(몸 언어)로 그들은 콩레이를 잠재울 것이라 믿는 엉뚱함을 나는 진실로 빌었다.
묘한 것은 나의 염원에 대한 답처럼 ‘태풍의 눈’에 내가 있다는 사실, 휘몰아치던 바람도 거칠게 내리던 비도 순간 진공상태 마냥 모든 것이 정지, 일단 멈춤이 되어버린 그 상황을 보며 간절함은 솟대의 간이역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예고편으로 소록도를 향한 내 마음을 혼자 먼저 보냈다.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에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얼핏 설핏 보이는 붉은 황토를 보며 스무 살 언저리, 이유 없는 연민으로 나를 아프게 했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나는 파랑새가 되어 날고 있을 그를 찾았다. 조금 낮은 기온과 약간 암울한 듯 느껴지는 날씨에 계절감도 잊고 보리피리를 불며 분청문화박물관 하늘에서부터 그도 동행하는 듯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과 감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했던 한센병의 그늘을 잊으며 그는 전라도 길을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게 하운을 사랑했던 여자들은 김우진, 윤심덕의 죽음 못지않게 강렬하게 남아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리라꽃 던지고>는 아직도 사랑에 대해 읽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사랑꾼이기도 하다.
<리라꽃 던지고>에 대한 답가로 나는 이선희의 ‘라일락이 질 때’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리라꽃, 일명 라일락이 질 때를 그의 삶에 반추해서 듣는 이 가을 그가 서럽고 서러워 나는 또 하늘을 보게 된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 내게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지 /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변해가는 너의 마음이 / 내게 날카로운 흔적을 남겨도
보고픈 건 미련이 남아서 일거야 / 이제 내 품에서 벗어나고 있네
돌아보지 마 / 내가 안타까워서 / 혹시라도 눈길 주지 마
생각하지도 마 / 또 다른 내 삶에서 나와 함께 했던 그 기억들을
다시는 만질 수 없겠지 / 따스한 너의 체온을
- 이선희 ‘라일락이 질 때’ 노래 중에서 -
가족여행으로 소록도를 찾았을 때는 이청준을 앞세웠다. 당신들의 천국이 어디며, 누구를 위한 천국인지를 항변하는 기분으로 소록도에서 녹동항을 향했을 그들의 눈물로 함께 시렸던 기억이다.
오마도 간척사업을 소재로 쓴 이청준의 소설은 우리에게 소록도에 대한 관심과 한센병에 대한 진실을 알게 했다. 문학은 개연성이라는 힘을 얻어 우리에게 사회문제를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약자 편에서 대변하듯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딸아이들에게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상상 그 이상으로 다가갔다. 인권유린 현장을 고스란히 보게 된 눈빛은 슬프기 보다는 아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족이 아닌 책갈피언들과 나서는 길에서는 나의 스무 살 언저리를 넘어갔다 와도 좋을 듯했다. 그래서 한하운, 그를 나는 초대했다. 그에게 <보리피리>는 모든 정서와 꿈과 이상, 첫사랑의 아픔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서정과 어우러지는 면이 있다고 했다. 보리피리의 소리처럼 한이 은은하게 배어난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극한적인 고통을 주면서도 최후의 어떤 실마리를 열어준다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겨내었던 한하운.
불교에서는 인생살이를 각자 자기의 업(業)에 대한 반영과 그 결과라고 가르친다. 자아(自我)라는 존재, 상기 상멸(想起相滅)이 생사(生死)라고 본다. 원래의 생명은 생사가 없다고 한다. 생명의 움직임, 그 시작인 생각은 윤회라는 과정으로써 회전하는 수레바퀴, 영겁의 반복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에 대해서 순환의 원리를 가르친다.
그래서 죽음 후에도 존재하고 계속 존재하려는 욕망, 의지, 의도는 중단되지 않는다고 본다. 곧 죽음 후에도 그러한 힘의 작용이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윤회를 낳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만약 영원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면 사후에 태어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후의 삶 이전에 현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속된다는 것인가?
영원불변의 실체는 없기 때문에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변화하며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 가도 가도 황톳길 중에서 -
한하운 그의 삶은 끝없는 윤회의 연속이었다. 한센병환자의 삶이 그러했으리라. 한센병 진단 받고 한번 죽고, 죽음을 통해 또 한번 죽고, 땅에 묻히지 못하고 화장(火葬)으로 또 다시 죽게 되는 그들의 삶은 죽음과 이어지는 끝없는 윤회의 모습이라 여겨졌다.
문득 분청사기를 닮은 그를 떠올렸다. 화려한 도자기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검증받지 못하고 사라진 분청사기. 자신이 쓴 작품조차도 ‘문둥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작품을 인정받지 못했던 그 현실은 검증받지 못하고 소멸하는 분청사기와 닮았다.
다수의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일이 되기도 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한센병을 앓았던 그에게는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사랑도, 문학도, 밥 먹고 잠자는 일상도 아주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일들이 그가 꿈꾸었던 행복이라 여겨지니 내 눈앞에 있는 소소함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의 막연함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이 행복, ‘소확행’을 일깨워 준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소확행의 시간, 기꺼이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한 문학기행 이었음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