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여행기 백강 김종운 9월 초에 3박 4일의 일정으로 아내와 함께 심양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이 아주 특별한 여행이었던 것은 우선은 여행사를 통하지 않은 자유여행이어서, 시간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심양의 구석구석을 모두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심양에 사는 중국인 친구와의 5년만에 재회하는 아주 뜻깊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심양에는 2명의 중국인 친구가 있다. 2019년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인 7, 8월에 한 달 동안 중국을 자전거로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중국인이 2명이 있었다. 손 선생과 유 선생이 그들이다. 그들은 한 달 동안 한여름의 폭염 속을 우리와 함께 동행했다. 힘든 여정을 통해 우리의 우정도 싹트기 시작했다.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날 심양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때, 그들은 나에게 평생의 친구가 되자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인에게 친구란 우리의 친구개념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친구란 그저 알고 지내는 정도면 모두 친구인데, 중국인에게 친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의형제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들은 나를 부를 때 ‘슝띠(兄弟)’ 혹은 ‘진꺼(金哥)’ 진슝(金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의 부탁이라면 그야말로 자기들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해주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할 때 그들에게 심양여행을 한다고 통보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심양에 오면 자기들 집에 묵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나를 위해 손 선생의 누이동생의 집이 비어 있다면서 그곳에 묵을 곳을 마련하겠다고 하며, 심양공항에 도착하면 차를 가지고 마중 나가, 일정 내내 자기들이 함께 그들의 차로 동행하며 안내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 제안은 너무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서 공항에 마중 나오는 것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나를 감명시키기에 충분했다. 5년이라고 하지만 실은 3년 동안은 서로 아무런 교류를 하지 못하고, 내가 2년 전 그들의 메신저인 위챗에 가입하고부터 비로소 문자로 서로 소통할 수 있었으니 우리의 우정의 깊이가 깊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9월 3일 오후 2시 35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3시 30분에 심양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나오니 출국장에 손 선생과 유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5년 만의 재회의 기쁨으로 서로 깊게 포옹했다. 그리고 그들의 차를 타고 그들이 사는 곳인 쑤지아툰(苏家屯)으로 가서, 그들이 나를 위해 예약한 음식점에서 식사했다. 훠꿔를 먹었는데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토끼고기 등 어찌나 많이 푸짐하게 시키는지, 나를 정성껏 대접하려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들과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빼갈 한 병을 혼자 마셨는데, 그들이 나의 과음을 보며 만류할 정도였다. 나는 중국의 속담에 '주봉지기천배소(酒逢知己千杯少) 화부투기반구다(話不投機半句多)(지기와 술을 마시면 천 배의 술도 부족하고, 뜻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반 마디의 말도 많다)'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니 그들 역시 ‘하오! 하오!’하면서 좋아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완쳰공원(万泉公園) 부근에 있는 시아오허옌(小河沿) 조시(早市)로 갔다. 조시란 아침에만 열리는 시장으로 중국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동북 제일의 조시라고 간판에 쓰여 있을 만큼 매우 규모가 큰 조시이다. 엄청난 인파와 그로 인한 소음, 호객하는 소리 등으로 시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수많은 먹거리를 팔고 있는데, 우리가 먹기에는 너무 거북할 것 같아 구경만 하고 왔다.
오전에는 심양고궁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심양고궁이 있다. 심양고궁은 1625년 살이호 전역의 대승으로 명의 백만대군을 격파한 후 누루하치가 도성을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기고 건축한 궁궐이다. 면적은 6만 평방m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건축물은 대정정과 숭정전 등 대략 90채가 있다고 한다. 모든 건축물에는 한자와 만주어가 동시에 표기되어 있다. 이 고궁에서 청태종 홍타이지는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꿨다. 일개 여진인의 오랑캐 나라가 아니라 천하에 황제로 칭하는 하나의 왕조가 탄생했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 (稱帝典禮)를 거행할 때, 청태종은 조선에 이를 축하하는 표문을 올려주기를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또 당시 이곳 심양에 조선 사신 나법헌과 이곽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전례에 참석하여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를 할 것을 요구했지만 2인은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당시 이들이 얼마나 결사적으로 거부했는지 홍타이지가 사람을 시켜 이들을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하고 머리를 조아리도록 여러 차례 위에서 찍어 눌렀지만 이들은 다시 일어나 머리를 숙이지 않아 사신의 옷이 모두 찢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의 조선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보다는, 망해가는 명나라만을 숭상하는 모화사상이 최고의 가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청태종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이 숭상하던 명은 멸망했다.
오후에는 한국 거리가 있는 서탑으로 향했다. 서탑으로 가는 내내 서탑에 있는 한 한국식당에서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흥분되었다. 심양에 온 지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한국음식이 그리워졌다. 그 한식당은 경회루라는 식당인데 5년 전 그곳에 갔을 때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중국음식에 진저리를 낼 즈음 서탑의 경회루에 가서 정말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겉절이, 나물, 된장국, 동태찌개 등 너무나도 맛있게 먹고, 밥과 반찬을 숙소까지 싸가지고 와서 그 다음 날 아침에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5년 만에 다시 찾은 서탑거리는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경회루를 찾아갔으나 옛날의 경회루는 없어지고 그런 음식을 파는 식당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서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마땅한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현풍할매곰탕집으로 가서 겨우 점심을 해결했다. 아마도 코로나 감염을 통해 많은 한국식당들이 문을 닫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저녁에는 호텔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곳에 있는 후이꿍(惠工) 야시(夜市)를 보고 왔다.
9월 5일 아침, 호텔을 나와 부근의 지하철역으로 갔다. 원래는 심양에서 교통수단으로 택시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전철을 타는 게 저렴하고 빠를 것 같아 전철을 타기로 했다. 그러나 어떻게 전철을 이용하는지 몰라 역무원에게 물으니 지하철 카드를 구입해야 한다고 한다. 보증금은 20원에 필요한 금액을 충전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보증금 20원에 20원을 충전한 지하철 카드를 2장 구입했다. 보증금은 나중에 돌려받는다고 한다. 그 카드를 가지고 지하철을 타고 북릉공원으로 갔다. 북릉공원은 청태종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바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삼전도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를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북릉공원은 꽤 넓어서 중앙에 호수도 있고 비교적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청태종은 무덤은 수리 중으로 볼 수가 없었다. 북릉공원을 둘러보면서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게는 한이 맺힌 인물이지만 과연 청태종만을 탓할 수 있을까. 청태종은 그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뒤에 있는 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그저 모화사상에 갖혀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를 탓해야 할 것인지, 누가 현명한지는 자명해진다. 북릉공원에서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동릉공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여 리밍광장역(黎明广场站)까지 간 다음 다시 택시를 타고 갔다. 동릉공원은 청 태조 누루하치의 묘가 있는 곳이다. 심양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서 북릉공원에 비해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교통도 불편했다. 그리고 규모도 북릉에 비해 훨씬 작았다. 누루하치의 묘는 동릉공원의 마지막 뒤쪽에 있는데 커다란 봉분은 잡초와 잡목으로 뒤덥혀 있었다. 명나라의 백만대군을 살이호 전투에서 전멸시키고 청나라의 태조가 된 일세의 영웅의 묘로서는 조금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5년전 자전거 여행을 할 당시, 살이호 전투의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살이호는 심양 동쪽의 무순시 부근에 있는 곳인데 지금은 현장이 모두 저수지로 수몰되었다. 명나라는 4로로 나누어 분진합격으로 누루하치의 건주를 포위 공격했는데 누루하치는 내선에서 이를 각개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남로군에는 강홍립의 조선군이 참전했는데 이들은 지금의 화래진 부근에서 전멸했고, 강홍립을 비롯한 일부는 항복했다. 5년전 그 현장에 가서 조선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제를 지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루하치는 그래도 조선에 대한 어떤 혈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했다. 당시의 국호인 후금(後金)은 송나라 시기의 금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뜻이었고, 금나라는 신라의 김씨가 세운 나라라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누루하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을 구하기 위해 출병하겠다는 뜻을 조선에 통보했으나, 조선은 오랑캐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참으로 조선의 모화사상은 끈질기다. 저녁에는 시간이 있어 다음날 가려고 하는 호텔 부근의 심양 박물관 가는 길을 산책 겸 사전 답사하기로 했다. 핸드폰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니 온통 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로 가득했다. 이곳이 회민 마을이다. 조금 더 들어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회민 소학교 하교시간으로 자녀를 데리러 온 부모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기에는 교육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회민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이슬람교를 믿는 중동, 아랍지역 계통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중국에 거주하게 시기는 당나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1500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민족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9월 6일, 오늘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어제 답사한 길을 따라 회민 마을을 거쳐 심양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은 주로 심양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만주사변과 같은 근대사건 위주의 자료가 대부분이었고, 생각보다는 볼 것이 많지 않았다.(부근에 918역사박물관이 별도로 있어서 오히려 불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918사변은 만주사변을 말한다.) 전시물 중 이곳 심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역사를 설명하는 곳이 있는데 고조선의 역사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아 의아했다. 이것도 동북공정의 일환인가? 원래의 계획은 우리가 다시 쑤지아툰으로 가서 중국인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공항에서 헤어지기로 했었으나, 호텔 부근에서 지하철로 바로 공항으로 갈 수 있기에 그냥 공항으로 가겠으니 공항에서 만나자고 했다. 공항역에 내려 전철카드의 보증금 20위안을 되돌려 받으려고 역무원에게 갔으나 어찌나 말을 빠르게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환불이 안되고 이삼일이 걸린다는 것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짧은 중국어로 항의를 하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중국인 친구가 공항으로 왔다. 공항주차를 오래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갖가지 선물을 주며 언제 다시 심양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도 그들에게 내가 직접 붓글씨로 쓴 부채를 선물했다. 부채의 글은 상지무원근(相知無遠近) 만리상위린(萬里尙爲隣)으로 당 시인인 장구령의 시귀 일부로, 친한 친구 사이에는 지리적인 원근이 없다. 서로 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이웃에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중국에는 여러 번 왔지만 이번에 심양에서 느낀 것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중국은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번에 심양 여행은 색다른 경험을 많이 했다. 먼저 중국의 웨이신(微信) 결제를 처음으로 해보았다. 웨이신은 영어로 WeChat이라는, 우리의 카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인데 중국에서는 이 웨이신으로 모든 상거래의 결제를 한다. 중국에서 웨이신이 차단당하면 거의 중국 생활이 곤란하다고 할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다. 현금 사용이 오히려 불편한 경우가 많다. 카드도 있긴 하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현금-신용카드-모바일 결제의 과정을 밟는 것이 일반적인데 중국은 현금에서 신용카드 단계를 건너뛰고 모바일 결제로 넘어왔다. 모든 곳에는 웨이신 결제를 위한 QR코드가 있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자신의 QR코드로 구걸을 한다. 이번 여행에서 실제 그런 거지를 본 적이 있다. 이번에 나도 웨이신으로 결제를 해보았고, 그러다 보니 현금이 거의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 인민폐 1000위안을 환전해 갔으나 사용한 것은 300위안밖에 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중국의 불결함과 무질서, 소음이다. 이건 이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조시나 야시에서 음식을 사먹지 못하는 것도 그 불결함 때문이다. 음식을 만들면서 입에 담배를 피는 모습을 보면서 담뱃재가 음식에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던 생각이 난다. 거리의 교통질서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라고 할 수 있다. 신호등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 무시되기 일쑤이다. 거리의 인도도 때로는 주변 식당의 영업장소로 둔갑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다녀야 할 인도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영업을 한다. 보행자는 인도를 피해 차도로 다녀야할 판이다. 소음도 심각하다. 차도에서는 수시로 울리는 차량들의 경적소리, 상점마다 스피커로 선전하는 소리, 아무 곳에서나 큰 소리로 떠드는 중국인들, 참으로 소음 천국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 한국이 얼마나 발전되고 아름다운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1 중국인 친구와 식사
그림2 시아오옌허 조시
그림3 심양고궁
그림4 북릉공원
그림5 동릉공원의 누루하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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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날 ᆢ 자전거로 중국여행하신 견문록 책을 잘 보았습니다 ᆢ역시 밀착형 중국통이십니다.ᆢ 일자별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ᆢ 좋은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ᆢ 미송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