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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의 줄거리:
믿음에 무슨 골방 믿음이다 현장 믿음이다 할 것이 있다는 말일까요? 그러나 분명한 구분이 가능하고 또 반드시 구분을 해야합니다. 두루뭉술한 믿음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로 족합니다. 삶의 현장에서의 믿음이 없으면 결코 골방 믿음은 참 믿음으로 증명 될 수 없습니다. 즉 가짜라는 것이지요. 또한 골방 믿음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 되지 않는 현장 믿음은 단지 편협하고 경직 된 율법주의나 종교적 원칙주의로 빠지고 맙니다. 균형잡힌 믿음의 길을 찾아봅니다.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
(민8:1~26)
14.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앞에서부터 계속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어서 나왔던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오늘 이 민수기 8장 말씀 중심으로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
KBS에서 무려 19년 동안 방영된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장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93년 10월 24일에 조 영남 씨와 이 경실 씨의 공동 사회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내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인이 되신 최 진실 씨나 이 병헌, 배 용준, 김 태희, 송 윤아, 최 지우, 박 신양, 등 이런 분들이 이색적인 삶의 현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일당을 받아와서 방송국에서 정한 좋은 일에 사용을 합니다. 재미가 있어야 사람들이 보는데 이들이 이색적인 삶의 노동현장에 투입되었을 때에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몸동작으로 하루 종일 힘들어하고 실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스타들이 멍청이 바보같이 되어버리는 재미를 느끼는 가운데 일당을 받아서 좋은 일에 쓰기도 하는 프로그램으로 19년 동안 902회를 방송을 했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번 생각을 해봅니다. 유명인사와 연예인들은 그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제시하는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이 다 낯설고 어색하므로 바보 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갑절로 힘이 듭니다. 믿음은 어떻습니까?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 유명 인사나 연예인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 것과 같은 현실이면 되겠습니까? 그나마 어렵고 삐걱거리고 꼭 바보 같더라도 믿음을 삶의 현장에서 표현하려고 하면 다행인데, 아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나타나지 않으면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에 마6:6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골방’이라는 말을 가져와서 오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믿음이 구들목 장군처럼 교회 안에서의 믿음이고 나 혼자 새벽에 일어나 QT할 때의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 나가면 믿음과 믿음의 원리와 힘이 나타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통용되는 모든 사람이 익숙해하는 원리에 나도 익숙해져서 그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골방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골방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는데 기도는 믿음의 존재방식이고 실천적인 믿음의 형식이 곧 기도입니다. 믿음은 한 순간의 결정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매듭을 지어서 그 다음부터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은 내 인격적인 마음 씀을 통하여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 심장을 꺼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물건처럼 한 번 드린다고 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수도꼭지를 열어서 호스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대지 않는 한 꺼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 됩니다. 기도는 믿음의 존재방식이고 믿음이 있다면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골방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골방과 현장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골방’이라는 것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한적한 곳이라든지, 새벽 미명에 들판에서 하셨던 기도처럼 들판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곳을 골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삶의 ‘현장’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골방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몰입하는 그런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골방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가짜 믿음인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종교 심리에 따른 골방 시간인지 아니면 자아수련의 체질이 되어버린 골방 시간인지, 고독을 즐기는 사람의 골방 시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골방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골방에서 찾았던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마음 드리기가 현장에서도 나타나는가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골방 믿음은 현장 믿음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그러면 현장 믿음은 골방 믿음이 없어도 되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골방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몰입되는 인격적 교제가 없으면 현장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여호와의 증인처럼 종교원칙주의자나 율법주의자로 빠지게 됩니다. 현장 믿음은 반드시 골방 믿음을 통하여 내용을 갖춰야 하고 강화되어야 됩니다.
골방 믿음은 현장 믿음을 통해 증명될 수 있고, 현장 믿음은 골방 믿음을 통해 내용을 갖추고 강화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믿음은 가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쉽게 말해서 골방 믿음은 골방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께 마음 드리기이고, 현장 믿음은 현장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믿음은 없습니다. 현장 믿음만 존재할 수 없고 골방 믿음만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과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사울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군대는 모두 여호와의 선민으로 할례 받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을 골방으로 치면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다 여호와의 선민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방민족인 블레셋과 그 대장인 골리앗을 앞에 두었을 때에 이 삶의 현장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전체 할례 받은 선민들은 하나님께 마음 드리기를 완전히 망각하고 맙니다. 골리앗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말한 대로라면 은술과 금술에 취한 것처럼 골리앗의 기운에 취하고 먹혀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이방인들과 마주대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현장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현장의 믿음이 표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목동으로 지내면서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내용으로 채울 수 있었던 골방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이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학교도 현장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교회도 현장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모여 행사를 할 때에 보면 거의 믿음이 없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원리만 존재하고 있지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전도회 회장 투표 할 때에, 장로 선거할 때 보면 믿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단 봉헌식이 12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기 직전입니다. 2월 19일에 제단 봉헌식이 끝나고 2월 20일에 가나안을 향해 행군을 시작하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틈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앞에서 다 나왔던 말씀들입니다. 성소안의 등잔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시고,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또 레위인을 여호와께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이유가 나오는데, 출애굽 때에 애굽의 초 태생은 다 죽이시고 이스라엘의 초 태생을 살려두신 것은 죽여야 마땅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모든 장자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각 지파의 장자들을 다 하나님께 모아두는 대신에 레위지파를 선택하셔서 레위인들을 성막에 모아놓고 장자를 대신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또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보입니까? 또 하고 또 하고. 하여간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 진 책인데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무릎 꿇고 납작 엎드려서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다보면 왜 같은 말을 쓰셨는지 알 수 있는데 같은 말로 다른 의미를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 다른 의미로 제단 봉헌 때에 특이한 현상을 봤습니다. 번제물을 드리고 속죄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고 소제와 향을 갖추어 드리는데, 이 희생 제물들과 은 그릇 금 그릇을 같이 드리는 이상한 헌물의 형태를 보게 됩니다. 은 그릇에 소제를 담고 금 그릇에 향을 채워서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 순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은과 금이 귀중한 것이라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가루로 내어 보았을 때에 어느 한 순간도 은을 향하여 마음이 가지 않았던 적이 없고, 금을 추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한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과 금에 취해서 살았던 내 언행은 다 술주정이기 때문에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어기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어긋나고 탈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드리고 은과 금을 추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배 부르려는 뜻에서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하는 삶의 모습인데 도대체 이 모습을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지켜나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등잔대와 레위인으로 해주시고 계십니다. 다 알고 있는 등잔대와 레위인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은과 금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좋게 여겨서 내게도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취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등잔대와 레위인 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장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현장 믿음이 가능합니까? 등잔대가 말하듯이 삶의 현장에서 밝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을 찾고 몰입했다고 해서 삶의 현장에 나가서 믿음이 기계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밝음이 상징하는 것처럼 내가 나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대체 나의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삶의 현장에 있는 나를 스스로 밝게 봐야하는데 관전 포인트는 성막 성소 안의 등잔대의 불이 무엇을 비추고 밝게 하는 것입니까? 그 불빛이 닿아서 보일 수 있는 분향단과 떡 상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분향단을 봐야 한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지금 내가 열심히 뛰고 있는데,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봐야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봐야합니다. 열심히 거래처를 찾아다니다가 신호등에 걸려서 멈출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무엇을 향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거래처와 거래를 성사시켜서 돈을 벌려고 하고 있다면 금과 은에 취한 것으로 지금 하는 운전이 술주정이고 주사입니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떡 상입니다. 배부름과 만족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금 불만스러운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불만에 빠져서 술 취한 것처럼 주사를 부리지 말고 내가 나를 봐야합니다. 관전 포인트는 왜 불만하냐는 것입니다. 왜 남편과 아내에게 불만을 품습니까? 남편이 돈을 안 벌어다 주기 때문입니까? 아내의 반찬이 맛없기 때문입니까? 내가 아내로 만족하려고 하고, 남편으로 만족하려고 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과 아내의 봉사로 만족하려고 하는 이것들이 다 취해있고 잘못된 것인데 이 밝음이 없으면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삼상17:26절에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고 말할 때 관전 포인트가 분명합니다. 지금 내가 골리앗 앞에서 주장해야 할 것은 나의 승리입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안정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왜 저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느냐가 관전 포인트로 다윗의 생각은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챙긴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무엇을 챙겨야 합니까? 돈, 승진, 월급, 성과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믿음을 보여야 하는 선민이 챙겨야 할 것은 지금 이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챙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혼자 있을 때의 믿음도 가짜라는 게 증명됩니다. 아무리 혼자 QT와 기도를 많이 하고 여름 휴가철이면 기도원 가서 기도를 해도, 현장에서 내가 나를 보는 분향단의 기도를 해서 무엇 때문에 불만이고 무엇 때문에 만족하고, 무엇 때문에 걱정이고 슬픈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밝음을 유지하고 그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나의 관전 포인트를 명확하게 보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벌기 위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을 바로 레위인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레위인의 규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현장에 필요한 요소를 가르쳐주시고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길을 보여주시는데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뭐냐는 것입니다.
장자는 첫 번째 관심사를 대표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관심사를 대표하는 장자가 레위인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막에 있습니다. 마음을 주고 있는 대상이 성막의 레위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마음도 성막으로 가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이 어디든지 간에 우리 마음은 첫 번째 관심사로 부각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 관심사를 레위인으로 바꿔치기해서 레위인을 따라 마음을 성막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밝음을 유지할 수 있는데, 만약에 현장에서 일어난 첫 번째 관심사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리면 그냥 어두움 속에 묻힌 상태에서 취중몽사의 술주정과 주사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깜깜한 밤에 비행기를 몰고 가는 파일럿이 창문 밖을 봐도 깜깜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깜깜한 하늘이라는 현장을 지나는 동안에 바라보는 것은 현장이 아니고 비행기 안에 있는 계기판을 보고 조정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지만 마음의 시선으로는 현장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내 마음이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는 항상 정해두십니다. 지구 전체 중에서 구약시대에는 성막만이 유일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현장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향해 마음의 물줄기를 대는 것입니다. 현장에는 그 현장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올바른 길이 없습니다. 현장과 떨어져있는 성막에 있고 현장과 떨어져있는 십자가에 내가 현장에서 행해야 될 답이 있습니다. 현장을 피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현장 속에 들어가서 현장을 안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억짜리 수출 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00억이라는 숫자에 취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둠속에서 술주정이 나오고 주사가 나오고 계약이 성사돼도 내가 망하고 실패해도 나는 망합니다. 이 100억이 관심사가 되었을 때에 이것을 레위인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바꿉니다. 레위인은 성막에 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마음을 십자가로 보내는 것이고 이게 믿음입니다. 현장에서 100억 계약을 체결하는 장소에서 계약에 온통 마음이 빠져있고, 시장에서 장사할 때에는 물건 파는데 마음이 다 빠져있고, 자식에 다 빠져있고 그러다 주일 되면 교회 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말하면 일 년에 3번 예루살렘 성전과 성막을 찾아오게 되는 절기를 지키면 이게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현장에서 현장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마음을 보내드리는 것이 바로 현장의 믿음인데, 구약의 믿음을 레위인으로 표현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흩어져서 어디에 살든지, 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관심사가 생길 때마다 레위인으로 바뀌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레위인은 성전에 있기 때문에 마음은 성전으로 가게 됩니다. 그 마음의 물줄기가 레위인이 있는 성전으로 올 때에 그 마음의 물줄기를 따라 하나님의 뜻이 그 현장으로 가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현장으로 갑니다.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장 믿음입니다.
100억 수출 계약의 현장에서 내가 따야 될 것은 계약 체결과 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내야 합니다. 자식을 기르는 현장에서 내가 성취해야 할 것은 훌륭한 자식으로 양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얻어집니까? 내 마음의 물줄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에 닿을 때에 얻어집니다. 그것이 성막이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마음이 닿을 때에 이 삶의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수가 있고, 마음이 닿아야 내가 나를 보면서 절대로 탈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몸이 어두운데 있어요. 어두운데 있는데 눈을 뺐어요. 눈을 뺐는데 시신경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10km 떨어진 어느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방에 빛이 환하고 우리 몸이 있는 곳은 어두운데 내 몸이 처해있는 장소가 지도에 보입니다. 지금 현재 몸이 있는 장소라고 점을 딱 찍어놨어요. 몸이 10km 떨어진 곳에 시신경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그 밝은 곳의 지도를 보면서 움직입니다. 밝은 곳에서 몸이 가야 될 길을 찾아서 움직이므로 정확하게 가는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10km 직진, 좌회전 5km, 우회전 5km, 이런 식으로 나오므로 그대로 합니다. 현장에는 눈이 없고 10km 떨어진 곳에 눈이 있는데 그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을 현장에 박아 놓으면 암중모색입니다. 흑암 속에서 헤매는 것이고 술주정하는 것이고 주사를 부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은 레위인이 구약의 믿음을 내용적으로 가리켜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첫 번째 관심사를 레위인으로 바꾸고 레위인을 따라 마음이 성막에 머물면 그 현장에 하나님의 뜻이 흘러갈 것이고, 그 레위인이 주님으로 바뀐 뒤에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첫 번째 관심사가 떠오를 때마다 그 관심사를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바꾸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선을 주님께 보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다.’는 이 말이 내게 적용되지 않으면 첫 번째 관심사가 떠오르는 대로 나를 잡아먹고 나를 취하게 만들어 버리면 그때부터 인생은 주사요, 술주정이 돼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십자가를 놓친 채 삶의 현장에 나타난 첫 번째 관심사에 마음이 먹혀버리면 평생 술주정꾼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현장의 믿음은 오직 마음을 현장에서 떠나있는 십자가와 성막을 볼 때에 가능해지고 그럴 수 있을 때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무엇으로 배 부르려 하고 무엇으로 불만하고 있는가가 밝히 보이면서 탈선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의 균형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의 물줄기를 현장의 그 어느 것에도 두지 않게 하시며 오직 현장 바깥에 계신 주님의 십자가에 둠으로써 주님의 동선을 따라 마음이 아버지께로 가게 하시며 그러므로 모든 현장에 하나님의 뜻을 벌어들이는 참 골방 믿음의 주인공, 참 현장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