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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회(監理敎會. 영 Methodist church)
영국 성공회 출신의 사제(司祭)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1791년 3월 2일)가 복음주의운동을 기치로 1795년에 영국의 국교(國敎)인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여 감리교단을 세웠으며, 영국의 국교(성공회)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을 받았다.
↳ 한국의 감리교는 가장 오래된 개신교회(프로테스탄드)의 하나이며,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한국기독교 2교파(장로교 · 감리교)의 하나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한 교파로써 영국 국교(성공회)의 신부였던 존 웨슬리는 죽을 때까지 성공회(聖公會)와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창설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복음을 설교하는데 전념하였지만 그의 설교에 대한 성공회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순회전도(巡廻傳導)를 시작하였다.
존 웨슬리는 순회전도를 하면서 기도서 없이 필요에 따라 기도하였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작곡한 찬미가로 신앙을 고조시켰다. 또한 그의 동료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년 12월 27일~1770년 9월 30일)의 설교는 메도디스트회(~會, Methodist society, 영국의 애란에서 신도가 된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에 의하여 미국의 뉴욕과 매릴런드에 처음으로 창설된 감리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미국감리회를 위해 신앙 25개조(25 Article of religion)를 채택한 1744년의 제1연회(第一年會. Annual conference) 이후 ‘존 웨슬리’와 ‘조지 화이트필드’는 칼빈(장로교 창설자)의 예정설(豫定說)을 둘러싼 문제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분리되었다.
웨슬리파(~派)는 감리교로 또한 화이드필드파(~派)는 칼빈감리교(~監理敎)로 각각 발전하였으며,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聖公會)와의 분리는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795년에 이뤄졌다. 이때 감리회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목사의 안수(按手)를 연회(延會)에서 결정함으로써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다.
미국에 전파(傳播)된 감리교는 이보다 앞선 1784년에 독립교파(獨立敎派)를 형성하였으며, 그 후 영국의 감리교는 웨슬리감리회(~監理會. Wesley methodist) · 원시감리회(原始監理會. Primitive methodist) · 웨슬리개혁회(~改革會. Wesleyan reform society) · 개혁감리회(改革監理會. Protestant methodist) · 웨슬리회(~會. Wesley association) · 연합감리회(聯合監理會. United methodist free church)로 분리되었다.
미국의 감리교(監理敎)도 남북전쟁(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던 북부와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부 사이에 일어났던 내전)의 영향으로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8월 15일) 후부터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웨슬리의 말에 따라 점차 일치를 이루었다.
↳ 이러한 일치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성화(聖化)를 목적으로한 신앙·개인적인 회개·경건(敬虔)을 표방하며 영국 서부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펼친 복음주의운동의 결과였다.
1881년에 창설된 세계감리교협의회(世界監理敎協議會)에는 전 세계에 5천만 명이 넘는 신자를 확보하고 있는데, 한국감리교의 선교 개시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시작이다.
↳ 즉 1884년 6월에 미국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Dr. R. S. Maclay)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開化黨, 1884년 고종 21년에 개화정책을 추구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정치세력)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년)을 통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년~1919년 1월 21일. 재위:1863~1907년. 조선 제26대 왕으로써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초대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미국감리교회 선교개시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이 요청을 윤허하였는데 이 날이 1884년 7월 3일이다. 이 윤허는 처음에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되었다.
☞ 장로교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것과는 다르게 감리교(監理敎)는 단일교단(單一敎團)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존 웨슬리(John Wesley)’의 가르침을 따르는 구세군(救世軍)과 성결교(聖潔敎)는 감리교에서 분리된 교파이다.
{한국감리교(韓國監理敎)의 성장역사 100년을 다음 4단계로 나눈다}
㉮ 1단계) 섬기면서 선교(宣敎. 라 Missiones, 영 Missions)하던 시대 (1884~1905년)
㉯ 2단계) 애국하며 선교하던 시대 (1905~1920년)
㉰ 3단계) 고난의 시대 (1920~1960년)
㉱ 4단계) 하나 되어 선교하는 시대 (1960~1984년)
1. 섬기면서 선교하던 시대 (1884~1905년)
초기의 한국감리교회 선교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선교하던 시대였는데, 매클레이 박사가 고종(高宗, 1852년~1919년 1월 21일.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1863~1907년)으로부터 정식으로 선교윤허(宣敎允許)를 받은 이후부터 미국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계획과 준비는 급진전되었다.
한국감리교의 선교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27세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장로교(長老敎. 영 Presbyterianism)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와 함께 인천의 제물포(祭物浦) 땅을 밟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1885년 5월 미국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W. B. Scranton, 1833년~1909년 10월 8일. 구한말 최초의 여성 선교사이며,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 설립자)이 서울에 들어와서 지금의 정동(배재중 · 고교 근처)에 자리에 ‘정동감리교병원’을 설립하여 9월 10일부터 이 병원에서 주로 가난한 계층의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정부 산하의 국립병원 격이었던 제중원(濟衆院, 지금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에는 주로 정부고관과 그 가족과 친척들이 치료를 받았으며, 반면 감리교병원에는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으므로 이러한 의료선교로써 서민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구한말 최초의 여성 선교사이며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W. B. Scranton)의 선교신조(宣敎信條)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고침을! 고통 받는 자에게 평안을!”이었다.
↳ 스크랜튼은 1886년 7월 1일부터 만1년 동안 혼자서 무려 2,00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으므로 당시의 한국인들은 서양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의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감리교병원보다 한 달 앞서서 감리교 교육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가 1885년 8월 3일 배제학당(培材學堂, 지금의 ‘정동’ 위치)을 설립하여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였다.
↳ 그 전까지의 교육은 주로 서당(書堂)을 중심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 유교의 경전. 사서는 논어 · 맹자 · 중용 · 대학이고, 오경은 시경 · 서경 · 주역 · 예기 · 춘추이다)의 강독(講讀)과 암기 에 불과했으므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문과학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구한말의 정부도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배재학당보다 1년 늦게 세웠으나, 결국 8년 만에 문을 닫고 그 학생 200명을 배재학당에 맡겨 위탁교육을 시킬 정도로 배재학당은 구한말(舊韓末)의 근대교육을 이끌어나갔다.
↳ 특히, 배재학당 내 ‘협성회(協成會)’라는 최초의 학생단체는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전위대가 될 정도로 이 배재학당은 정치사회적 개혁과 개화(開化)에 앞장섰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모친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6년 5월 31일에 한 명의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 한국최초의 의사도 이화여대 출신이며 1900년에 미국 볼티모어 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여의사(女醫師) 박 에스터(원래 이름은 ‘김정동’이었으나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의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인 박 에스더로 불려졌다)였다.
북감리교에 비해 10년 늦은 1895년에 윤치호(尹致昊)의 노력으로 시작된 남감리교의 선교는 서울 · 개성 · 강원도지역에서 교육 및 의료선교를 펼쳤는데, 서울의 배화여고 · 개성의 한영서원(‘송도고보’의 전신)과 호수돈여고 등이 남감리교가 세운 교육기관이다.
↳ 이 두 남북감리교회는 1930년에 기구적으로 한국에서 통합하여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朝鮮監理敎會)’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1년에 한국 사람으로는 한국개신교 종파를 통틀어서 최초의 목사가 탄생하였다.
↳ 1889년에 선교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 임명을 받고 12년 동안 목사후보 훈련을 받은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은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인 목사시대를 열었다.
한국감리교회는 그 교세(敎勢)가 급증하여 1901년부터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리하여 관장하였고, 1904년에는 조선선교연회(朝鮮宣敎延會)가 조직되었다.
1908년에는 조선연회(朝鮮延會)가 조직되어 중국연회(中國延會)와 완전히 분리·독립되었다.
2. 애국하며 선교하던 시대 (1905~1920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감리교회는 교세가 커지고 기구 및 활동분야가 확대되어 교회조직과 선교기관도 전국으로 확대됨으로써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갔는데, 특히 서재필(徐載弼, 1864년 11월 20일~1951년 1월 5일. 개화기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1898년에 해산되면서 독립협회의 간부들과 그 주요회원들이 대거 감리교에 들어옴에 따라 이때부터는 주요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감리교회가 그 대표적인 교회다.
고종 42년이던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과 여러 대신들을 협박하여 체결한 조약. 조선은 그날부터 외교권이 박탈당했다)이 체결되면서 상동감리교회(尙洞監理敎會)의 담임목사 전덕기(全德基, 1875~1914년)를 중심으로 일명 상동파(尙洞派)가 조직되었다.
↳ ‘상동파’의 일원인 백범 김구(金九, 1876년 7월 11일~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 이준(李儁, 1859~1907년. 애국열사.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조선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회의 참석조차 못하자 통분하여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 최재학 등이 상동감리교회에서 구국기도회 및 을사조약 무효화투쟁을 전개하여 ‘하느님 사랑’과 ‘민족사랑’을 역설하였다.
상동감리교회에는 김구(金九) · 이준(李俊) · 이회영(李會榮, 1867년 3월 17일~1932년 11월 17일) · 이동녕(李東寧, 1869~1940년 3월 13일) · 이갑(李甲, 1877년 5월 12일~1917년 4월 24일) ·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 · 이승훈(李昇薰, 1864~1930년) · 최광옥(崔光玉, 1879~1911년) · 양기탁(梁起鐸, 1871년 4월 2일~1938년 4월 19일) · 이필주(李弼柱, 1869년 12월 9일~1942년) · 최성모(崔聖模, 1873~1936년) · 이동휘(李東輝, 1873~1935년) · 김진호(金鎭浩, 1873~1960년 9월) 등의 민족독립 운동가들이 모여들어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1907년에는 유명한 ‘신민회(新民會)’가 상동감리교회에서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준(李儁) · 이상설(李相卨, 1870년 12월 7일~1917년 3월 2일) · 전덕기(全德基) 등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상동감리교회 지하실에서 계획하고 집행하였다.
↳ 이렇듯 상동감리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는데, 특히 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에서의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1914년 7월 27일) ·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1957년 10월 10일. 시인 · 수필가 · 사학자이며 친일파였다) · 장도빈(張道斌, 1888년 10월 22일~1963년 9월 12일) 등의 한글운동 및 국학운동(國學運動)은 매우 유명하다.
한국감리교회의 민족운동 전통은 1919년에 이르러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 33인의 민족대표 중 16명의 그리스도교(천주교 · 장로교 등 전체) 측 대표가운데 9명[이필주 · 오화영(吳華英) · 김창준(金昌俊) · 박희도(朴熙道) · 최성모 · 신석구(申錫九) · 박동완(朴東完) · 신홍식(申洪植) · 정춘수(鄭春洙)]의 참여는 감리교 민족운동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다.
3.1운동으로 일제의 한국감리교에 대한 핍박(逼迫)은 더욱 가혹하였는데, 수원지방 ‘제암리 감리교회의 대학살사건’(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4월 15일 14시경 일본군이 제암리 전 주민들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고 문을 폐쇄한 후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몰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8명이 사망하고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서 제암리의 모든 집 31채가 불에 타고 이웃마을 15부락 317채가 잿더미로 변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감리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잃어버린 민족의 주권회복에 힘씀으로서 일반민중의 지지를 크게 받았고, 또한 많은 인재들이 감리교에 들어옴으로써 감리교가 크게 부흥되어 갔음은 바로 그러한 민족독립운동이 자연스럽게 선교로 이어졌다.
3. 고난시대 (1920~1960년)
이 시기는 일제말기의 교회탄압과 8.15광복 및 6.25동란이라는 일대시련과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특히 일제말기의 음흉한 교회탄압과 신앙변질에 교회지도자들이 놀아나서 일본의 어용단체(御用團體)가 되는 수모도 당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으로 민족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감리교회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말기에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과 일제하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재야인사들의 대결은 재건파(再建派)와 복흥파(復興派)의 분열로 이어졌으나 이 분열도 평신도들의 화해노력으로 4년 만에 해결됨으로써 6.25동란 1년 전에 극적인 통합을 이루었다.
1950년의 6.25전쟁으로 인해 감리교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유순(金裕淳, 1882~1950년. 황해도 신천출신의 목사) 감독과 전(前) 감독 양주삼(梁柱三, 1879년 1월 25일~1950년 8월 23일. 평남 용강출신의 목사) 박사가 납북되었는데, 그 외의 많은 목사와 유능한 평신도들을 잃게 됨으로써 다시 공백기에 있다가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임시총회가 소집되어 새 감독(유형기 목사)이 선출되면서 감리교회의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1953년에 휴전이 성립되어 서울에 정부와 감리교의 교단본부(敎團本部)가 다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교회 복구사업을 진행시키는 기간이었던 1955~1958년(3년간)에 호헌파(護憲派)의 분열이 있었지만 곧 수습되었다.
4. 하나 되어 선교하던 시대 (1960~1984년)
4·19 혁명(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인해 발생한 1960년 4월 19일의 민주주의 혁명)의 영향은 감리교회에도 불어 닥쳤다. 그동안 교회재건에 열중하던 교회 지도부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영향력과 그 저력을 사회구원에 돌리도록 요구하였는데, 질적인 향상보다는 양적인 성장이 현실화됨을 개탄하는 자성의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1978년 10월의 제13회 총회에서는 실질적인 다원감독제(多元監督制)를 채택하고 교권의 중앙집권을 연회(延會)로 분산시켜 연회중심의 선교체제를 갖추었다.
↳ 1980년 총회에서는 연회의 조직을 현재의 국가행정구역에 따라서 개편하였다.
{현재의 한국감리교회 조직과 직책은 다음과 같다}
총회(감독회장) ⇒ 연회(감독) ⇒ 지방회(감리사) ⇒ 구역회(당회장) ⇒ 당회(당회장)
㉮‘총회(總會)’는 4년에 한번(현재는 법을 개정하여 2년에 한번) 모여서 교회법의 개정과 입법 및 선교정책(宣敎政策)을 입안(立案)하고 통과시키는 최고의 의결기관이다.
↳ 총회에서 감독(監督)을 선출하여 교회행정을 담당하게 한다.
㉯ 총회 밑에 5개의 ‘연회(延會)’(서울 · 중부 · 동부 · 남부 · 삼남)가 있는데, 각 연회는 년1회 연회 산하의 구체적인 선교정책을 결정하고 목사 안수권(按手權)을 감독에게 부여하므로 연회가 실질적인 감리교회의 핵심 의회임은 물론 강력한 추진력을 보유하고 있다.
㉰ 다섯 개의 연회 밑에 100여개의 ‘지방회(地方會)’가 있다.
㉱ 하나의 지방회에 30여개의 ‘당회(堂會)’가 소속되어 있다.
↳ 당회는 개체교회(자립할 수 있는 교회) 또는 미 자립교회 몇 개를 합하여 조직된다.
감리교의 기본의회가 되는 당회는 개체교회의 세례교인으로 조직된 의회이며, 당회에서 구역회 대표를 · 구역회에서 지방회 대표를 · 지방회에서 연회 대표를 · 연회에서 총회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의회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 한국감리교는 1885년 4월 미국의 ‘아펜젤러’에 의해 한국에 전파되어 배제학당(培材學堂)과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