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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천우협도 4명은 그곳에서 “동도의 대장 김봉균(金俸均)”을 회견하고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이 김봉균이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전봉준(全琫準)이다.
“순창군을 향할 때 일본시찰원인 다케다 등 15명이 금시표(金時表)(금시계1개)와 유리 1알을 보내어 신(信)을 표하며 면회를 청했다. 전봉준이 거리낌없이 회견하여 시국을 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왜 전봉준은 천우협과의 회견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농민군 입장에서도 일본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고 또 천우협이 갖고 있던 폭탄 등의 무기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전봉준이 천우협을 만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봉준과 회견한 요시쿠라, 다나카, 다케다는 민씨 정권과 청국을 규탄하는 내용(12항목)의 격문을 전봉준에게 건넸다. 7월 9일 일행 14명은 관아로 여장을 옮긴 후 폭탄을 시험해 보이고 농민군과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 천우협의 재기요청에 대해 농민군은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7월 1일 (양력 8월 1일)을 기하여 운봉을 거점으로 재기하여 경성에 진격한다는 것과 천우협도 이에 가담한다고 하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7월 10일 농민군은 천우협에게 동학당의 당부(黨符) 14개, 동학의 식문(式文)과 약간의 돈, 의류와 짚신 등을 주고 나서 옥과(玉果)로 떠났다. 천우협은 이틀 간 전봉준을 포함하여 농민군과 접촉하여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천우협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평가나 인식은 어떠했을까. 먼저 전봉준에 대해서는 “일세의 영웅”, “반도의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영웅”이라고 절찬해마지 않았다. 또 농민군에 대해서는 무뢰잡배나 오합지졸이 아닌 질서정연하고 규율엄정한 혁명군이며 게다가 동학농민군의 투쟁이 사대주의에 의한 척왜양 운동이 아니라 민씨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반정부투쟁이라고 평가했다.』
#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3걸로 일컫는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남도의 각 군현을 호령하였으며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대접주 김인배로 하여금 영남의 서남부 일대를 관할토록 하였습니다.
7월 9일경에 남원으로 내려온 전봉준은 김개남과 여러 접주들을 만나 의논하여 7월 15일에 남원 대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전라도 전역에 사람을 보내니 모여든 인원은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오하기문』에는 “이 달 망간(望間)에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남원에 수만 인을 모아 대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봉준은 각 읍에 … 집강을 세워 수령의 일을 수행하게 하니 호남의 군사권과 재정권은 모두 적(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7월 16일에 전라감사 김학진은 급히 군관 송사마(宋司馬)를 남원에 보내어 전봉준을 전주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로 와서 함께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정부가 친일파 소굴로 변하자 김학진은 반일항쟁을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남원에 있는 김개남에게 편지를 보내 전주로 올라오라고 전하고 7월 17일에 전주로 올라갔습니다. 남원의 김개남은 전봉준의 편지를 받았지만 계속 남원에 머물고 맙니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어 동학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하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한 오토리 공사였지요.
오토리 공사는 조선정부로부터 동학농민군 진압을 빌미로 공식 의뢰를 얻어 장기간 주둔을 합법화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그것을 요구할 근거는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는 청일 양국 병력을 조선 땅에서 공동으로 물러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고 판단한 청의 원세개는 일본의 오토리 공사와 공동 철병 교섭을 단행하였으나 일본의 입장은 달랐지요. 이번을 기화로 해서 조선 침략까지도 생각하여 병력을 보낸 일본은 청과 무력 충돌까지도 생각을 하였답니다.
일본은 전쟁의 구실을 만들고자 동학농민군을 부추기는 한편 조선 내정의 공동개혁을 하자고 청에 제안합니다. 물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던 청나라가 이 제안을 거부할 것이라 예상했으며, 그 예상대로 청이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자 6월 21일 일본은 청국과 개전할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당일 주일 청국공사에게 절교서를 전달하였습니다.
이어 7월 20일에는 북경주재 일본 대리공사 고무라가 청 정부에 대해서 정식으로 2차 절교서를 전달함으로서 국교는 끊어지고 23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연금하면서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https://www.weeklyseoul.net/news/articleView.html?idxno=2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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