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2)
최 호 림
하염없이
앉아서
누굴 기다리나
하늘과 바다가 함께 쓴
한 줄의 긴 문장
다 읽은 사람이 없네.
저 경계를 걷어내면
태초의 문이 보일까
서로 손 잡을 줄 몰라
끝과 끝이 만날 수 없는
직선의 사랑
다가갈 수 없는가
멀기만 하네
나이의 무게
지난날을 자주 돌아볼 때,
꽃들이 새삼 아름다울 때,
옷이 화려해지고
나사 풀린 말이 두서없고
귀와 눈이 자꾸 엇길로 가도
주름살을 걷어내는 마음을 달래고
나이 값을 해야 할 때,
수평선(1)
바람이 펼치고
갈매기가 읽는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 쓴
한 줄의 긴 문장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인가
그리운 그대
아직은
내게 너무 멀다
그는
장검으로 하늘을 베었다는 그는
상처가 깊게 나 있다고
그 흔적을 읽지 못하면
양심에 털 난 눈이라 못 박는다
놀랍게도 그 벤 자국을 보았다는
추종자가 있어 기고만장이다
천 년을 살고
만 년을 누릴 듯이
거짓말도 당당하게
수시로 색깔 바꾸는 카멜레온
잡아 떼는 연기가 일품이다.
술 취해 비틀거리다가
자기가 놓은 올가미에 걸리면
남 탓으로 돌리고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희망
당신의 말에 향기가 넘칩니다.
당신의 미소에 노래가 흐릅니다.
당신의 침묵엔 지구가 멈춥니다.
겹겹 껴입은 옷이 추위를 부르고
날개걸음으로 새날에 닿습니다.
한 획만 잘 그어도 문장이 되고
점 하나에 독수리가 살아나듯이
기다림이 있어
다시 일어서는 세상
당신이 바로 희망입니다.
비원
간절함 속에는 절박함이 들어 있다 더는 기다릴 수 없고 늦출 수 없이 바로 지금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를 꼭 잡아야하는 이 처절한 허기엔 이후가 없다
죽어가는 자식의 생명 줄에 매달린 어미의 애달픈 마음 또한 쫓기다가 막다른 절벽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외마디 비명들이 아무리 사무치게 벽을 찢어도 신은 끝내 침묵하셨는데
하루아침에 바닥을 친 막막함에 마주 선 절망감은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그 아픈 눈빛들 다 읽을 수 있을까,
서귀포 사랑
그대의 생애가 오늘은 내게 서글피 다가옵니다. 그림을 그냥 나눠 주어도 문구멍이나 때웠을 시절에 돈이 되지못한 그림에 매달려 열정 하나로 세상과 맞서다니요 아내와 두 아들과 헤어져 늘 그리움에 목이 메었고 수평선의 갈매기가 부러웠을 그대 어디에 그려도 그림은 행복해 은박지 속에서도 튼튼하게 황소와 아이와 물고기와 게가 살고 바닥을 친 처절함이 녹아들어 마침내 걸작이 태어난 건가요? 고흐도 그랬고 그대 또한 훗날 누군가 부를 안겨주었지만 나이 마흔에 굶어 죽어가면서 마지막 순간 그대 그림으로 완성되었나요? |
아프리카 그림자
아프리카 어느 마을 구호단체에서 준비한 옥수수를 배급 받기 위해 퉁방울눈을 반짝이며 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 맨 나중에 온 아이는 옥수수가 동날까 까치발로 초조하다 더 많이 받기 위해 큰 그릇을 갖고 온 아이도 있다 배급 주는 어른은 그릇은 보지 않고 무심히 한 바가지씩 담아준다 더 주었으면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서는 저 여윈 그림자
성장기
달이 뜨지 않는 밤엔 옛이야기가 달을 끌고 갑니다. 토끼가 없어도 계수나무 아래 절구질하는 아이들이 신이 납니다. 전설 따라 굽이굽이 가다 보면 먼 불빛 도깨비도 만나고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묘지에서 구미호가 둔갑한 여인도 만납니다. 들판의 히히거리는 허수아비 허파에 바람 든 귀신이 지나갑니다. 동구의 두 장승도 귀신 편에 서고 변소엔 몽당 빗자루 귀신이 삽니다. 호젓한 길에서 만난 생사람 귀신이 머리칼 곧추서도록 가장 무섭고 버려진 방앗간에 귀신의 신음소리 자주 들립니다. 상여막은 잡귀들로 멀리 피해 다닙니다. 헛간의 쟁기도 귀신 흉내를 곧잘 내고 장지문도 삐걱 귀신이 매달립니다. 서걱거리는 귀신을 불러내는 대숲이 봉창 두드리는 긴 손으로 쓰윽 이불을 들칩니다. 그 사이 산 숲에서 먹이 찾아 내려온 호랑이가 곶감 소리에 줄행랑을 치면 비로소 놀란 가슴을 달래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던 어린 날. 새벽 닭 울음이 귀신의 천적입니다.
물수제비 강가에서 놀다가 시들해져 놀이가 고프면 물수제비뜬다. 잠시잠깐 채우는 허기 누가 잘 띄우나 내기를 한다. 강폭이 좁으면 저쪽 강둑에 깨금발로 건널 수도 있다 물위로 걸은 사람은 오직 예수뿐 물수제비가 흉내를 낸다. 물수제비 잘 띄우려면 옹이 같은 둥근 돌로는 안 된다. 손에 착 달라붙는 호떡 같이 작은 돌을 중지 위에 올려 엄지와 검지가 쥐고 한쪽 귀가 바닥에 닿도록 가장 낮은 자세로 눈길이 먼저 주름잡아 달려가고 허릴 구부리고 손에 힘을 모아 냅다 던지면 물에 닿는 순간 날개 단 듯 동동걸음 치며 보폭이 갈수록 짧고 빨라진다. 걸음 사이사이 햇살의 그림자가 스며든다. 순간 강물이 팔딱 팔딱 뛰어오르며 길을 내 주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의자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공원이나 길가의 의자 앉으면 의자가 몸을 맞추고 몸이 의자에 적응하여 키 큰 사람도 뚱뚱한 사람도 마르고 작은 사람도 어린아이도 친구처럼 다정하고 편하다 걷다가 쉬고 싶을 때 저만치서 손짓하며 반갑게 맞아주는 잠시간 주인이 된다 빈부귀천이 없는 의자 의자는 앉은 사람의 등과 엉덩이 온몸의 무게를 재는 전문가다.
새
무엇이 나를 가둘 수 있는가
벽도 나를 가두지 못한다 창을 통해 새를 날리면 새는 날아 하늘을 누비고 우주를 물고 와 품에 안겨준다
나는 안에 있고 밖에도 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갔다 오는가 발걸음이 여유롭고 바쁠 이유가 전혀 없다
넉넉하다는 것은 가진 것 보다 가질 것이 많다는 것이다
나의 새는 안팎을 연결하는 소통의 방식
군중 속에서 외롭다는 것은 사방에 낯선 벽 때문이다
언제나 새는 멀리 갔다가도 나의 그림자까지 챙겨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
둘이면서 하나인 사이다.
하늘 농사 만 평쯤 내 것으로 울타리 치니 보고만 있어도 불끈 힘이 솟아납니다. 이 보다 더 넓으면 감당할 수 없어 무성히 자라는 잡초 밭이 될 것 같아 이만하면 내겐 적당한 수고로움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심고 거름과 물을 줍니다. 기다리는 즐거움은 덤입니다. 꿈이 가득 자라는 소리 날마다 배부르고 든든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세상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이 넉넉하니 부러울 것 없습니다. 비로소 주위를 살피는 여유도 생깁니다. 적당한 곳에 농막 하나 지어 사방으로 구름창을 내고 자주 머물러 휴식을 취하며 농기구를 손질해서 꺼내 씁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삶이 최선인가, 고민하면서 농부가 되어갑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내게 하늘 농사가 자랑입니다.
|
나를 꺼내다
차곡차곡 서랍에 쌓아 둔 나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잠자다가 부스스 깨어난 나는
몹시 불만스러운지 투덜거린다.
미안하지만 다시 다른 나를 꺼낼 순 없다.
다 비슷한 형편과 처지 아닌가,
꺼내어 놓고 보면
무척 생소한 느낌이 드는 때가 더러 있다.
지난 밤 잘못 꾼 꿈 때문인지 모른다.
도대체 누굴 닮으려다 멈춘 얼굴인가,
고치고 싶어도 고쳐지지 않고 고칠 이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불편하지 않다면
그냥 만족하고 되도록 묵인하는 편이다.
그 많은 나 가운데 어디가 좋아서 너는
내 곁을 서성이는 바람으로 스치는가.
너에게 소중한 그림자가 될 수 있다면,
선택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인데
한 번도 남들에게 아름답게 선택된 적이 없다.
누군가 나를 불러 주면 좋겠다.
처음 만나 쏙 들어오는 매력은 없을지라도
점차 스며드는 물처럼 익숙해지면
나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불가사리
전설의 불가사리는
자석처럼 쇠만 찾아 다녔는데
오늘날의 이 괴물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집어 삼킨다
수 백, 수 천 채 전세금을 꿀컥한
사기꾼의 그림자도 보이고
권력을 휘두르는 막무가내도 보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그저 안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면 수많은 가시를 품고
덩어리가 된 미세 먼지
도시 전체를 통째 삼키는
거대한 아가리 앞에는 속수무책
거리마다 핏발 선 눈 부라리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엉금엉금 기는 거북이의 행렬이 길다
한때 대륙에서 날아 온 자연의 새가
누렇게 뜬 발자국을 남기더니
더 자라고 몸을 키워서
이제는 한 나라를 소화시킬 만큼
천직
난전에다
들깨, 옥수수, 찹쌀, 검은 콩과 팥,
대추, 밤,고사리와 산채
봉지마다 담아놓고
기다리는 할머니
“놀면 삭신이 쑤셔,
손주 용돈도 벌고,
자식들 못하게 말리지만
사람 구경하고 좋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화살처럼 날아가 박힙니다.
부르르 떠는 꼬리가 없어도
한동안 머물러 떠나지 못하는 마음
덤으로 살아도
건강하면 행복입니다.
아프다
톱니바퀴가
궤도를 이탈하여 삐걱거리듯
잘 가다가
헛디뎌 삔 발목이 붓는다
뜻이 달라
불편해 지는
너와 나의 관계처럼
제 자리를 벗어나면
멍들고 금가고 부셔지고 끊어진다.
애써 원인을 찾아
처방을 하고 몸을 추스른다
익숙한 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단상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향기를 잃지 마라.
수다는 잡초요, 침묵은 나무 같다.
나무를 붙박였다 하는가, 인간도 찾아가 기대어 쉰다.
고향아, 나 떠나 살면 안면을 바꾸는가.
누가 이슬의 무게를 다는가, 우주를 품은
손에 잡히지 않는 별보다 성냥 한 개비의 불빛이 정겹다.
거친 태풍을 피하려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인내 뿐이다.
처음 한번이 어려워 많은 기회를 놓친다.
오른 손을 잡아 준다고 왼손을 내밀지 마라.
인간은 희로애락을 벗어날 수 없어 신이 못 된다.
신의 곳간엔 사랑 뿐인데 인간이 복을 달라 떼를 쓴다.
신은 인간에게 이미 다 주었다. 자연 그리고 이웃
촛불
깊어가는 밤
전등은 다 끈 실내
클래식이 은은하게 흐르고
촛불을 켠 탁자엔
와인과 잔이 두 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아내와 나는
서로 기념일을 축하 한다
지금까지 함께
건강하게 살아 고맙다고
살며시 손을 잡는다.
바람 앞의 촛불이 아니다
촛불은 켤 때 살아나고
끄면 탄 심지에 줄어든 키
살아온 흔적을 남기고
다시 켤 때까지
불씨를 품고 휴식에 든다.
인간도 불 밝히며 살다가
멈추고 싶을 때는 꺼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쓰는
촛불처럼 살 수는 없는가.
시(詩)
절벽 앞에서
절망하다가
절망하다가
절망이 사무처
절정에 섰더니
절경이 보이네.
절명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절경에서 한걸음 더
화룡점정
절창이
나올 때까지
쓴다
돌을 읽다
가까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떨어져 있어도 짝은 있네
여기저기서 옮겨와 쌓은
긴 돌 담을 보라
서로 그리운 짝을 만나
잡아주고 받쳐주고 감싸주면서
수백 년을 살지 않느냐
이렇게 든든하게 손잡고 가기도 하지만
길바닥에 뒹굴면 노숙자 같고
떠도는 나그네 같기도 하네
독신으로 사는 외로움도 보이고
이웃으로 만나 어울려
돌 탑을 이루고 돌 무더기에
간절한 소원을 일일이 새겨두네
거친 밭에 숨어살던 돌들은
하나 둘 끌려나와 밭 둑을 만들고
함께하면 모난 돌도 정 맞지 않네
돌들도 사는 곳에 따라 각양각색
마른 강바닥에 널린 돌들은 군중 같고
크고 작은 돌들은 어른아이 같아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가,
사막에서 만난 돌은 모두 보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