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耽羅(今 済州)
耽羅(今 済州)
北史에 말하되 百済 南海에 耽羅国이 있으니 그 土地에 獐鹿이 많으며 百済의 附庸이 되었다 하고 唐書에 말하되 竜湖初에 儋羅라 하는 나라가 있어 其王 儒理都羅가 使를 보내어 朝하였으니
其国이 新羅 武州 南島上에 居하여 俗이 朴陋하고 大阪皮를 입고 夏에는 革을 쓰고 冬에는 窟室에 居하며 처음 百済에 기대다가 後에는 新羅에 附属하였다 하고 耽羅国記에 말하되 처음 三神人이 있어 地로 좇아 湧出하니 가로되 良乙那와 高乙那와 夫乙那이다.
三乙那가 荒僻에 遊獵하여 皮를 입고 肉을 먹더니 一日에 紅帯와 紫衣입은 사람이 函으로 青衣 処女 三人과 狗犢과 五穀을 심고 海에 浮하여 이르러 말하되 我는 日本国의 使라 吾王이 此 三女를 生하였는데 말하되 西海中 神子 三人이 降하여 장차 国을 開할 때 짝이 없었다.
故로 此 三女를 보내었다 하거늘 三乙郡가 歲次로서 나누어 娶하고 五穀을 播하여 狗犢을치니 날로 繁庶하였다.
良乙那의 居한 바는 曰 第一都이고, 高乙那의 居한 바는 曰 第二都, 夫乙那의 居한 바는 曰 第三都이다.
高乙那의 十二代孫 高厚와 高清 等 兄弟 三人이 배를 지어 海를 渡하여 耽津에 泊하고 新羅에 오니 于時에 客量이 新羅 南方에 見하였는데 太史가 아뢰되 異国이 와서 朝하는 象이라 하더니 차차 高厚 等이 도착하였다.
王이 아름답게 여겨 高厚를 局厚를 称하기를 星主라 하니 星象을 動함이며 高清으로 하여금 袴下에 出하였다 하여 已子와 같이 사랑하고 王子라 称하며 또 그의 季를 号하여 曰 都内라 하고 国号를 耽羅라 하니 耽津에 와서 泊하여 新羅에 朝함이었다.
各々 宝盖와 衣帯를 주어 보내니 自此로 新羅를 섬겨 高는 星主가 되고 良은 王子가 되고 夫는 都上이 되었더니 後에 良은 고쳐 梁이라 하다. 輿地勝覧에 済州는 근본 耽羅国이니 或 毛羅라고도 하고 或布羅라고도 하였다.
三乙那城瘴霧開
耽津江口峭帆廻
厥初還有毛興穴
何必他人袴下来
三乙那城에 瘴霧가 열렸으니
耽津 江口에 峭 帆이 廻하였더라.
蹶初에 오히려 毛興穴이 있으니
어찌 他人의 袴下에 来하였으리오.
耽津은 이제 康津이니 新羅 때에는 耽津이라 하여 毛興穴은 済州 鎮山北麓에 穴이 有하니 가로되 毛興穴이다. 곧 三乙那의 湧出한 곳이라 하였다.
- 한글
탐라(지금의 제주도)
북사에 의하면 백제 남쪽 바다에 탐라국이 있었는데, 그 땅에 노루가 많아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다고 한다. 당서에는 용호 초기에 탐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나라가 신라의 무주 남쪽 섬에 있었고, 풍속이 거칠어 큰 삿갓을 쓰고 여름에는 가죽옷을 입고 겨울에는 움굴에서 지냈으며, 처음에는 백제에 의지하다가 후에는 신라에 부속되었다고 한다. 탐라국기에 따르면 처음에 삼신인이 있어 땅에서 솟아나와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 불렸다.
삼을나가 황야에서 수렵하며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더니, 어느 날 붉은 띠와 자주 옷을 입은 사람이 궤짝에 새 처녀 셋과 강아지, 오곡을 싣고 바다를 떠다니다 와서 "나는 일본국 사신이다. 우리 왕이 이 세 처녀를 낳았는데 서해 중에 신자 삼인이 내려와 나라를 열 때 짝이 없었기에 이 세 처녀를 보냈다"고 했다.
삼을나가 차례로 세 처녀를 맞이해 가정을 이루고 오곡을 심고 개를 기르니 날로 번성했다. 양을나가 산 곳을 제1도, 고을나가 산 곳을 제2도, 부을나가 산 곳을 제3도라 불렀다.
고을나의 12대손 고후와 고청 등 삼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정박하고 신라로 가니 그때 외국 사신이 신라 남방에 도착한 것을 신라 태사가 알렸다. 점차 고후 등이 도착하자 왕이 고후를 아름답게 여겨 국후라 부르며 성주라 하고, 고청을 왕자라 칭하며 그의 여동생을 도내라 불렀다. 국호를 탐라라 했는데, 탐진에 와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갓과 의대를 하사하니 이후로 신라를 섬겼으며, 고씨는 성주가 되고 양씨는 왕자, 부씨는 도상이 되었다가 양씨는 후에 렬이라 고쳤다. 여지승람에 제주는 본래 탐라국이며, 혹자는 모라라고도 하고 포라라고도 했다.
삼을나 성에 안개 끼었었고
탐진 강구에 험한 돛배 돌았었네.
모흥혈 있는 초기에도
어찌 남의 바지아래로 왔겠는가?
탐진은 지금의 강진이며 신라 때는 탐진이라 불렀다. 모흥혈은 제주 진산 북록에 있는 구멍으로, 삼을나가 솟아난 곳이라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