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과 홍경래(洪景來)의 난(亂)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때에는 다 탕평론(蕩平論)을 써 당폐(黨弊)가 조금 지식(止息)이 되어 정치상(政治上) 부흥(復興)의 기분(氣分)이 있더니 및 순조(純祖) 때에 와서 귀족(貴族)의 횡포(橫暴)과 이서(吏胥)의 농간(弄奸)이 특심(特甚)하며 계급적(階級的) 전제(專制) 사상(思想)이 정치(政治)의 중심(中心)이 되고 평민(平民) 중에는 아무리 재지(材智)와 학식(學識)이 있어도 채용(採用)치 않으며 또 평민(平民)의 생명(生命) 재산(財産)은 보호(保護)를 받지 못하고 다 특권계급(特權階級)의 희생물(犧牲物)이 되고 만지라. 그 후 순조(純祖) 11년 신미(辛未) 12월에 용강(龍岡)사람 홍경래(洪景來)가 이희저(李禧著) 우군측(禹君則) 김사용(金士用) 등으로 더불어 꾀하여 가산(嘉山) 다복봉(多福洞)을 근거(根據)로 하고 스스로 평서(平西) 대원사(大元師)라 일컬으며 관서일대(關西一帶)에 격(檄)을 날려 말하되 관서(關西)는 단기(檀箕)의 구성(舊城)으로 문물(文物)이 병랑(炳朗)하며 왜호양란(倭胡兩亂)에 충효(忠孝)가 크거늘 조정(朝廷)(調整)이 서토(西土)를 경시(輕視)함을 하고(何故)오. 이때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 등이 나라를 요란케 하니 우리는 일어나 이를 바로 잡자 하고 가산(嘉山) 군수(郡守)를 죽이고 선천(宣川)을 빼앗고 그 이듬해 정월(正月)에 정주(定州)에 웅거하니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이 다 응(應)한지라. 조정(朝廷)이 듣고 놀래어 이에 이요헌(李堯憲)으로 순무중군(巡撫中軍)을 삼아 홍경래(洪景來)를 칠 새 정주(定州)의 성벽(城壁)이 굳어 빼기 어려운지라. 이요헌(李堯憲)이 드디어 유효원(柳孝源)으로 하여금 땅을 파고 화약(火藥)으로써 성벽(城壁)을 깨치니 홍경래(洪景來) 이에 죽고 난(亂)이 평정(平定)되었느니라.
-한글
영조와 정조 때에는 탕평책으로 당폐가 약간 그치어 정치적 부흥의 기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조 때에 이르러 귀족의 횡포와 관리들의 농간이 더욱 심해졌고, 계급적 전제사상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 평민들은 재능과 학식이 있어도 등용되지 못했으며 생명과 재산마저 보호받지 못하고 특권계급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순조 11년 신미년 12월, 용강 사람 홍경래가 이희저, 우군측, 김사용 등과 함께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고 스스로 "평서 대원사"라 일컫며 관서 일대에 격문을 보냈습니다. 그는 관서가 문물이 빛나는 고성이며 왜호 양란 때 충효가 크건만 조정이 서토를 경시한다고 하며, 김조순, 박종경 등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하면서 봉기하였습니다.
홍경래는 가산 군수를 죽이고 선천을 빼앗은 뒤 다음 해 정월에 정주에 거점을 잡아 청천강 이북이 모두 응답하였습니다. 조정은 이를 듣고 놀라 이요헌을 중군으로 보내 홍경래를 토벌하였는데, 정주의 성벽이 견고하여 쉽게 깰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효원이 땅을 파고 화약으로 성벽을 깨뜨리자 홍경래가 전사하고 난이 평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