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과 구려(句麗)의 서북전(西北戰)
고구려(高句麗)는 남하(南下)하기를 그치고 다시 서북(西北)으로 군사(軍事)를 옮겨 지나(支那) 수(隋)를 칠 새 그때 지나(支那)를 통일(統一)한 새 임금 양광(楊廣)이 노(怒)하여 수륙군(水陸軍) 113만을 거느리고 구려(句麗)에 침입(侵入)하거늘
려왕(麗王) 영양(嬰陽)이 용장(勇將)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 하여금 수군(隋軍)을 막을 새 문덕(文德)이 시(詩)로써 수장(隋將)의 마음을 교만케 하여 이끌어 융수(蕯水)를 건너게 하였다가
문덕(文德)이 문득 복병(伏兵)을 발(發)하여 전후(前後)로 합력(合力)하여 치니 적군(敵軍)이 처음 물을 건너온 자 백여만(百餘萬)이러니 이때에 살아간 자(者) 겨우 2700인 이러라.
그 후 보장왕(寶藏王) 때 위인(偉人) 연개소문( 淵 蓋蘇文)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되어 당(唐)의 사자(使者)로 가두었더니
당주(唐主) 이세민(李世民)이 노(怒)하여 보장왕(寶藏王) 4년에 수륙군(水陸軍) 30여만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침입(侵入)하거늘
개소문(蓋蘇文)이 대군(大軍)을 보내어 요동평야(遼東平野)에서 참담(慘澹)한 혈전(血戰)을 거듭하더니 이때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 楊 萬春)이 이세민(李世民)을 쏘아 맞추니 세민(世民)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느니라.
그 뒤에 세민(世民)이 또 분(忿)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번 입구(入寇)하였으나 다 패퇴(敗退)하였느니라.
<한글>
제17과 구려의 서북전
고구려는 남쪽 정벌을 그치고 서북쪽으로 군사를 돌려 수나라를 치려 했습니다.
그때 수나라를 통일한 양광이 노해 수륙군 113만을 이끌고 침입했습니다. 고구려왕 영양이 용장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수군을 막게 했습니다.
문덕이 시로 수장의 마음을 교만케 해 융수를 건너게 한 뒤 복병을 내어 전후로 협공했습니다. 처음 물을 건넜던 적군 백여만 명 중 살아간 자는 2,700명뿐이었습니다.
보장왕 때에는 연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가두었더니, 당주 이세민이 노해 수륙군 30여만을 이끌고 요동에 침입했습니다.
개소문이 대군을 보내 요동평야에서 혈전을 벌였고, 안시성주 양만춘이 이세민을 쏘아 맞혔습니다. 이세민이 군사를 거두고 돌아갔지만, 그 후에도 여러 번 침입했으나 모두 패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