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란(內亂)문제
왕위 쟁탈이 있은 후로는 또 내란이 일어나 소요가 심하였다. 흥덕왕 14년에 웅천도독(熊川都督) 김헌창(金憲昌)이 그 아버지 주원(周元)이 마땅히 왕이 될 터인데 그 동생이 위를 빼앗았다 하여 웅진에 웅거하여 반기를 들고 국호를 장안이라 칭하고 원년을 경운이라 하거늘 왕이 이것을 토벌치 못하다가 흥덕왕 때에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장고보(張皐保)의 병력을 빌어 이를 토벌하였다.
장보고는 친구 정년(鄭年)으로 더불어 전투에 용감하더니 형제의 의를 맺고 두 사람이 함께 지라 땅에 갔다가 당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전공이 있었고 그 후 장고보는 귀국하여 헌덕왕을 보고 말하되 지라 도적이 매양 우리나라 백성을 노략하여 큰 폐해가 있으니이다. 왕이 이것을 막기 위하여 군사를 주어 청해진(淸海鎭=완도莞島)에 유케 하더니 그 후에 또 정년도 돌아오니 헌덕왕이 내란을 막으려고 장보고의 군사를 청하여 난을 진정하니라.
그 후 장보고는 집이 부하고 군사가 강하여 엄연히 남방에 한 왕국이 되었다. 왕가에 무슨 변란이 있을 대마다 장보고의 병력을 빌려 썼으니 희강왕이 그 숙부 군정을 죽일 때에도 장의 힘을 빌었고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일 때도 또 장의 병력을 빌었다. 장보고 또 해상의 운수로 큰 공로가 있으나 내란을 도와 준 죄는 면치 못하리로다.
그 후 진성여주(眞聖女主) 때 폐신위홍(嬖臣魏弘)에게 정사를 맡기고 조정이 탁란하여지고 도적이 각처에 일어나 제어하기 어려웠다. 양길은 북원에서 일어나고 궁예는 청주에서 일어나고 진혼은 부진주에서 일어나 나라의 강토가 점점 줄어지고 나라에서는 수습할 힘이 없었다. 신하들은 사리사욕으로 분주하고 쇠망이 목전에 보인다. 최치원(崔致遠) 같은 선생은 벼슬을 사양하고 나라 망할 것을 슬퍼하며 산수 간에 방랑하며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란 글을 지어 읊으며 스스로 슬퍼하였으니 그 뜻은 신라는 쇠하고 고려(高麗)는 흥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