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고려의 군신상하가 배명열이 상당히 심하여 필경코 명을 치기로 가결되어 동병하게 되니 이성계는 제가지 불가를 제출하였다.
1은 적은 나라로 큰 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요
2는 여름에 발병하면 병이 날 터이니 불가요
3은 나라가 허하면 왜구가 들어 올 터이니 불가요
4는 여름 장마에 두레 활이 다 녹아 쓰지 못하리니 불가라 함이다.
그러나 최영은 왕을 권하여 이성계의 말을 누르고 곧 명을 치라 말한데 우왕이 스스로 평양에 진주하고 최영은 팔도(八道) 도통사(都統使)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는 좌군(左軍) 도통사(都統使)를 삼고 이성계는 우군(右軍) 도통사(都統使)를 삼아 군사 5만을 10만이라 칭하고 그해 5월에 동병하여 나아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새 군사들이 가만히 도망하는 자 많았다. 이성계는 이에 글로써 조민수에게 보내어 출별의 불가를 말하고 곧 회군(回軍)을 약속하였다. 이때에 왕은 환관을 보내어 속히 진군을 재촉하였으나 때에 유언비어가 돌아다니고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진군한다는 말이 있어 군심이 흉흉하던 때이다.
이성계가 모든 장영을 모아 이제 큰 나라의 국경을 범함이 불가한 이유를 설명하고 곧 회군을 준비하며 아무쪼록 임군 곁에 있는 간인들을 더러 버려야겠다하니 군사들도 다 그 말을 옳게 여겨 곧 회군하니 최영과 우왕이 듣고 경성에 돌아와 궁성을 지키며 곧 궁성 화원 안에 들어가 있으니 6월에 이성계 군이 경성에 이르러 도문 밖에 주둔하고 곧 궁문에 들어가 최영을 잡아 고응현에 귀향 보내었다가 조금 후에 죽이니 시체가 곧게 서기를 수시동안 있었다 하더라.
우왕은 강화에 내치고 그대로 왕씨 중 한사람을 세우자 하되 우왕은 가담하는 사람들이 많아 우의 아들 창을 세웠더니 명으로부터 폐가입진(廢假立眞)하라는 부탁을 의하여 창을 또 폐하고 신종(神宗)의 7세손 정창군요(定昌君瑤)를 세우니 곧 공양왕(恭讓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