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열단
우리 독립운동에 각 단체가 많은 공로가 있었고 그 중에 의열단의 공로가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희생도 모험도 아낌이 없이 충실하였다.
그 단에서 김원봉으로 수령을 삼아 상당히 군사훈련을 받았고 길림으로부터 각지에 연락하여 일적들과 싸워 우리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특히 군대를 양성하여 국경침입을 기도하던 중 훈춘사건과 상해사건은 우리 운동사상에 가장 득필 할 만한 일이다.
훈춘 사건으로 말하면 다 의열단의 일이라 할 수 없으나 협력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기미(己未) 경신(庚申)사이에 노령 방면으로부터 무기를 구하기 용이하였고
또 독립단의 운동이 그대로 왕성하여 경신 5월 4일에 우리 동포들은 힘 있는 부대를 만들어 간도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다수한 일인을 살해하였고 상부지 안에서 백주에 일본경찰을 쏘아 죽이는 등 사건이 연발하여 일인들의 공포가 심하더니 9월에 와서 우리 독립단의 대부대가 훈춘을 엄습하여 거류 일본인의 대부대를 죽이고 10월 2일에 또 노국과 격파와 중국의 마적과 합하여 다 조선 독립단이 되어 가지고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관 사립건물과 병민 거의 전부를 도륙하는 큰 거조가 있었고
그 다음은 상해사건인데 1932년 1월 8일 의사 이봉창이 의열단 특파원으로 일본관병식 귀로에 일황 승여를 저격한 일로 상해 남경복주 증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일본이 이 사건을 인하여 무력항쟁으로 된 것이 소위 상해사변이다.
중일교전 중에 중국 제19로 군이 가장 용감하다는 세계 칭찬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우리 조선 군인이 태반이다. 이때 일본육군대장 백천의일이 총사경관이 되어 그해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일황 탄일 축하식을 거행하는데 짐짓 교만을 부려가며 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의열 단원 윤봉길이 식단정면에 폭탄을 던져 사령관 백천의일은 즉사하고 해군 중장 야촌과 육군준장 식전과 공사중광 이하 문무내관 다수가 중상을 입고 그 교만이 다 어디가고 식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일본인이 다 놀랄 뿐 아니라 일반 중국 사람들은 모두 쾌거라 하여 가로되 중국 4억 인이 하지 못한 것을 한 조선청년이 하였다 하여 이목이 용등 하였다.
3. 공산당(共産黨)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다해 보려 하였다. 윌슨 민족자결주의와 거의 한때에 노서아에 혁명이 일어나 노서아 제국이 넘어지고 민중사회당이 정권을 잡게 되어 소벳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때 동경 우리 유학생들이 일본 신석현(新潟顯) 수력 전기 공사장에 있는 우리 조선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搾取)해 먹는 것이 부당한 학대라고 동경 우리 유학생들이 일어나 반항하여 이것이 정치 문제로 화하고 또 민족운동으로 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학생들의 사상이 민족운동으로 변하고 다시 사회운동으로 화하여 이 사상이 조선까지 들어와 학생들이 귀국하여 다시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것이 또 변하여 사상연구회라는 것이 생겼고 이때부터 청년들의 사상이 점점 좌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정치 압박을 받던 우리 동포는 공산주의 내용도 잘 알지 못하고 이것이라야 나를 찾고 독립할 수 있다는 선전을 듣고 권기하는 이가 많았다. 이때 시베리아와 상해로 거쳐 들어오는 조류도 자연 격렬하여 조선사회에 침투되었고 또 노서아 국제 공산당 소식이 세계에 들어지고 직접 조선에도 우리 민중의 청각을 가장 예민케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에도 화요회(火曜會)니 북풍회(北風會)니 하다가 다시 조선공산당이니 고려공산 청년회니 하여 통일의 기관이 없다가 일적들의 탄압이 심하여 모두 지하운동으로 들어갔으나 그 운동은 쉬지 않고 열렬하였다. 그 후에 칫다에서 세계국제 공산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서도 대표가 참석하였고 그 후에 그 운동이 계속되어 광주학생 사건과 단천 농조사건과 간도 용정 사건이 다 그들의 지도로 되었는데 우리 조선 사람들은 무서운 일적들의 자본주의 밑에서 무리한 착취를 당한 고로 사회운동이 무엇인지 민족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 같이 살수 있다는 말에 의하여 많이 감염되었고 중국에 있는 조선 사람이 중국공산당 연안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는데 연안 팔로군이 거의 조선 사람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