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에서 내려오며 점심식사를 할까 하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 숙소로 와 차를 끌고 신안으로 향했다
그동안 섬이었던 신안은 이제 목포에서 그리고 무안에서 연륙교로 이어져 어엿한 육지가 되어 버렸다
신안군청 주변에 가면 그래도 먹거리가 있겠지 했는데 왠걸 새로 지은 화려한 건축물만 썰렁한 대지에 덜렁 세워져 있을 뿐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반대편 압해읍쪽으로 향했다
섬이라 전혀 식당 같은 것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무안으로 가야 하나 할때 길가에 백반부페 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정가네 백반집, 다산 정약용의 압해(나주)정씨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끌렸다
가격도 저렴한 인당 8000원.
음식맛도 좋았고 과메기, 석굴찜 등 해물도 있어 만족도가 높았다
굶주림을 면하기만 해도 다행인데 성찬으로 점심을 해결하니 나름 여행길이 행복하다
압해읍이 그나마 사람사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운 거리 신안 금산사가 있어 한번 들렀다
신안군은 우리나라 섬의 1/4에 달하는 827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수많은 섬의 첫 관문은 목포앞 바다에 떠있는 압해도(押海島).
압해 금산사 창건은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세워졌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이 모두 소실되고 옛 가람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와 <삼국유사><삼국사기>에 근거한 천년고찰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금산사는 1904년에 배화주 거사가 산수 좋고 경치 수려한 이곳에 왔다가 불심을 펴겠다는 발원과 함께 건립했다.
현 주지스님인 선지 스님은 “연륙교가 개통되면 금산사가 서해안 고속도로 끝자락이 될 것이다”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포교와 가람을 구상하고 있다.
야생화와 허브를 재배해 국내 유일의 ‘향기나는 도량’을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이 없고 너무 조용해 먼 발치로 살피고 이내 나와 무안으로 향했다
앞으로 이 연륙교 이외 여러 연륙교가 완성되면 신안은 바다 위 섬들의 집합체가 아닌 육지의 행정구역이 될 것이다
무안으로 들어서자 가까운 곳에 해돋이 명승지인 영해공원이 있어 들렀다
고속도로로 나오는 길 무안은 넓은 평원으로 한적하고 작은 마을만이 얕은 구릉 사이로 보였다
참 평화롭고 땅이 넓어 과거 농업사회에선 살기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가량 달려 고창 효감천을 찾았다
역시 동복 오씨 유적지인데 한번도 가 보지 못해 천안으로 오르는 도중 들른 것이다
역시 고창에서 정읍으로 가는 방장산이 보이는 길목 조용하고 넓은 공간 한 가운데 인적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도 전라북도 시도 기념물이라서 그런지 주차시설도 있고 관리 안된 화장실도 있었다
효감천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된 샘인데,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뇌성(雷聲)으로써 샘물을 솟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오준(吳浚)은 이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고 한다. 부모가 병중일 때는 극진히 간호하였고, 부모가 죽은 뒤에는 시묘살이로 마지막 효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1473년(성종 4)에는 제사에 사용할 물을 길러 가는 것이 먼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집 가까이에 뇌성으로 샘물이 솟도록 했으며, 매월 보름이면 범이 사슴을 잡아와 제수로 바쳤다고 한다.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왕은 오준에게 정5품의 통선랑(通善郞)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의 벼슬을 내렸으며, 1494년에는 그가 죽자 현감은 이 샘을 ‘효감천’이라고 이름지었고, 조정에서는 공의 효행을 널리 알려 온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1748년(영조 24)에는 창효사(彰孝祠)를 건립하여 후손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샘물은 아직도 깨끗하였고 밑에서 방울방울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우물인데도 직접 퍼 마실만 하여 한바가지 마셨다 그런대로 시원했다
우리는 원래 감천공의 후손인데 나의 5대조 할아버지 때 충청도 묵재공 오백령조의 증손자인 유수공 오시대조의 후손으로 입적해 내가 공주에서 태어나게 된 원인이 된다
그 생가 조상을 처음으로 찾은 것이다 감개가 무량하다
주변에 묘소가 있어 성묘겸 둘러보았다
시설은 어느 정도 관리되어 있으나 주변에 인적은 하나도 없다
효감천 샘 바로 위 도롯가에 있는 묘소이다 감천공의 부이다 바로 이 묘막을 지키며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50여 미터 이동하면 감천공의 묘역이 나타난다
도로를 따라 동복오씨 비석군이 도열해 있다
근 30분이 지나는 동안 차 한대 지나가는 걸 보지 못한 한가한 지역이다
맨 꼭대기 묘소가 감천공 묘소이다
석물들이 아주 최근 것들이다
찬자가 의령 남유용이면 조선 영조 때 인물인데 비석은 그렇지 않고 최근 것 같다
왼편에 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고흥 류영선 찬으로 되어 있다 이 분은 조선 말기이므로 비석의 마모 상태와 일치하는 것 같다
둘레석인 12지신상 석각도 최근 것처럼 보인다
감천공 바로 왼쪽으로 감천공의 큰아들 둔은공 묘소이다 연산조 때 은둔하고 사셔서 호를 이렇게 지으신 것 같다
왼쪽부터 둔은공 오희백의 아들, 손자, 증손의 단이다
그리고 그 아래 항렬의 묘이다
중간엔 후손이지만 누군지 모르는 묘를 이장했다고 설명한 묘비가 있다
가까운 곳에 도동사가 있어 들렀다
이 마을은 고색창연 마을로 농촌전통테마로 지정되어 있다
방장산이 마을 남쪽방향으로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덕화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고, 특히 오래된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어 매년 촌제라고 부르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당산나무 제사 흔적이 그대로이다
그러나 초등학교까지 있는 마을인데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하는 동안 사람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요즈음 지방의 시골마을이 이 지경으로 예전의 온화함은 없고 쓸쓸함만 감도니 참으로 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