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서 입에 오르내리는 대표적인 단어가 치유라는 의미의 힐링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보다도 힐링을 갈망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상처 때문이 아니고 마음의 상처 때문에 죽어갑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루에 50여명이 자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은 별 문제의식 없이 그냥 흘러갑니다.
지금 세상은 이기주의의 막장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혈육관계, 부부관계, 사제관계, 친구관계, 이웃관계 등 신뢰관계도 유지하지 못하고 독립을 선언하고 나만의 아성을 구축합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적이요 거침돌입니다. 모든 이들을 경계해야 하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됩니다. 사무적이고 독백성의 대화는 증가하나 진실 된 대화는 단절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자기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애심(자기연민)이 극단적으로 커져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것에도 상처를 받고,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도 방치하게 됩니다. 결국 상처는 더 악화되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우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상처는 상처일 뿐입니다. 치료만 잘하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가볍게 여겨서 방치하고 그 때문에 상처가 깊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중병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 자체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치료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어떤 상처든지 치료하기만 하면 더 강해지고 삶에 활력도 생기는 법입니다. 부러진 뼈가 힐링되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처의 존재를 잊고 그 고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일과 맛집과 스포츠와 도박과 술과 마약과 섹스와 쇼핑과 관광에 몰입하여 임시 조처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처방은 갈증 날 때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상처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더 큰 허탈감과 고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은 뻔한 결과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사흘간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만나 허겁지겁 마십니다. 하지만 그 물은 마시면 안 되는 쓴물이었습니다.
마신 사람들은 심신에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구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며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원어로 ‘여호와 라파’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때만이 진정한 힐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힐링은 표면적이고 일시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식의 힐링을 추구하고 있지만 인간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힐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은 동일한 상처를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상처도 치료 못하는 이가 어찌 남의 상처를 치료하겠습니까?
힐링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상처의 근원은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색 무미 무취의 존재이지만 암과 같이 치명적인 지옥의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이 결국 상처를 곪고 썩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자만이 우리의 진정한 힐링멘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성경에서는 유일무이한 한 존재자를 증거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상처를 바로 보게 만들고, 예수님의 보혈은 그 상처를 소독하며, 예수님의 사랑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상처가 어떠한 종류이던 간에 반드시 힐링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1.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 : 8 - 16
풍요와 성공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런고로 풍요와 성공의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단 한사람도 굶지 않았고 옷이 헤지 않았고 신발이 닳지 않았다고 증거 합니다.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렇게 했다면 이것이 진정한 풍요와 복이 아니겠습니까! 세계최고의 경제 대국인 미국도 이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풍요와 성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마도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재물과 능력이 많은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전 세계의 1% 이내의 사람들만이 풍요를 상속 받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상속받은 풍요를 유지하며 제대로 누리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입니다. 사치가 아니라 일상에 꼭 필요한 풍요라는 것입니다. 복지와 풍요는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남아도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풍요한 애굽에서 쾌락하는 이들이 아니고 척박한 광야를 여행하는 순례자이기에 일상에서 기적이 일어나야만 살아갈 수 있는 전적 의존적 존재들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다 일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기적은 인간의 탐욕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역사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뿔 짐승이 행하는 기적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신명기 13장에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나 예언자는 죽이라고 명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적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임신 못하던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이 그런 경우이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대환난이 그렇습니다. 대 환난은 우연히 닥치는 재앙이 아니라 수천 년간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만들어진 신령한 기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재앙이 아니라 선물이란 뜻입니다.
성경적인 기적은 우리에게 행복과 평안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욕적인 쾌락만을 주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악한 마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1) 기적은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몇 년간의 지독한 가뭄으로 굶어 죽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선지자에게 숙식을 제공할 기적의 주인공으로 시돈에 사는 가난한 사르밧 과부를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하며 무력한 자만을 들어 기적의 도구로 쓰십니다. 삼손은 중무장한 블레셋 군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하찮은 나귀 턱뼈를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에 사람을 태워 본 경험이 없는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법궤를 싣고 벳세메스로 가야만 하는 사명자로 선택된 것이 황당하게도 전혀 수레를 끌어 본 경험도 없고 갓 새끼를 낳아 젖 나는 두 암소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명예가 있고 재력과 권력이 있는 대단한 사람을 사용치 않으실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했다고 착각하여 교만할까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영광받기 위해서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낮은 데 있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결코 높은데 있는 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경영철칙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면 낮은 곳에 거해야 합니다. 나를 낮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최적의 방편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당신이 피하고 싶은 일상의 고난들입니다.
고난이야말로 은혜 중에 은혜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나를 낮추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찾아오면 낙심하지 말고 기뻐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의 응답으로 고난의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 어떤 힘든 문제가 생기면 기적의 관점과 긍정의 관점에서 생각하십시오. 고난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으니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부흥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노예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을 세계적인 재상으로 쓰시려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속의 도구로 쓰시려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고난의 십자가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기적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고난의 골고다 언덕 너머에 존재합니다.
2)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과 필요를 위한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지만 나의 편견이 그것을 안 볼 뿐입니다.
성문 곁에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습니다. 엘리야는 당돌하게 “물 한 그릇 가져오라” 명하더니 “떡도 한 조각 구워오라”고 요구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엘리야는 악한 사람이고 사르밧 과부는 최고로 가련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택하여 기적을 일으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종을 통하여 최상의 축복을 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얼마든지 마술사처럼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으나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줌과 기름 몇 방울을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나의 천하고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면 나의 헌신을 마중물 삼아 기적의 샘물을 끌어 올리시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이가 바친 소박한 도시락을 도구로 오병이어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나혼인 잔치를 빛낸 최고급 포도주도 하인들이 헌신한 더러운 물이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최고의 걸작 품인 인간을 만든 재료는 지천에 널린 흙이었습니다.
기적의 재료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아주 평범한 것들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재활용하여 특별한 기적을 만든다는 원리가 바로 성경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나의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릴 때 기적은 현실이 됩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가뭄 내내 그녀 집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줄어들지 않는 기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무엇이든 내가 가지고 있으면 평범할 뿐이나 하나님께 드려지면 아주 특별한 기적이 만들어진다는 단순한 성경의 축복 원리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드림의 법칙(여호와 닛시)입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인생의 수많은 문제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드림의 헌신이 없이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수십 배의 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기적은 거저 찾아오는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으로 만들어지는 필연의 산물입니다. (쿰란 출판사 신간, 힐링 책 저자는 제 동생인 박공서 목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