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배재(培材) 70주년 기념식
김진호(金鎭浩) 목사 1955. 6. 8
배재교장(培材校長) 신영묵씨의 청첩이 왔다. 나는 1916년 봄 3월에 배재교목으로 피임(被任)되었다가 1919년 3.1운동에 관계가 있어 오랫동안 서대문감옥에 구류되였다. 집행유예 3년을 받고 나오니 왜인들이 김모는 배일자라 지목, 배재에 있기를 금하는 고로 1920년 3월 인천지방 내리교회에 파송되어 준 2년 동안 그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 때 인천지방 감리사는 오기선 씨이다.
전도에 재미를 많이 보다가 아펜셀라 헤누리 목사가 배재교장이 됨으로 나를 다시 청하여 배재교목이 되였으니 때는 1922년 봄이다. 1920년에 웰취감독의 안수로 집사목사가 되고 배재에 다시 온 후1924년 가을 9월 21일에 빽커감독의 안수로 장로목사가 되였다. 그리고 1935년 3월 26일에 배재를 사임하고 나왔다. 그러면 전 4년 후 15년 합 19년 5개월간 배재의 봉급을 받았다. 자식 형제 택영(澤永), 희영(喜永)이 다 배재를 졸업 하고 나온 고로 나는 배재를 잊을 수 없고 지금도 가손(家孫) 상면(相冕)은 졸업하고 나왔고 지금은 상신(相伸), 상문(相問), 상범(相範)이 다 재학 중이다.
나는 이번 기념식에 배재송(培材頌)이라 하고 시 한 수를 기록하여 달라고 교장의 부탁이 있는 고로 아래와 같이 기록하여 보냈다.
根深之木風無搖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이 못 흔들고
先烈勤培汗血勞 선열의 힘쓴 배양은 피땀의 노력이라.
皇帝命名臣拜頌 황제 이름 짓고 신하 받들어 노래하니
爲梁爲棟拂雲高 마룻대 기둥 되어 구름 위로 떨치네.
(學藝展覽 無室에 培材頌은 簇子를 만들어 걸었다.)
학예 전람실이 없어서 배재송(培材頌)은 족자를 만들어 걸었다.
그리고 기념식이 시작 되여 국민의례를 마치고 내빈축사에 있어서 특히 이승만 박사는 초대졸업생인데 이날에 특히 참석하셔서 공부하던 역사를 말씀하셨는데 일반에게 감명을 깊이 주었다. 그 때는 학생들은 갓 쓰고 중추막을 입고 모자를 쓰려면 상투를 뒤로 제치고 모자를 쓰고 벗으면 도로 갓을 쓴다. 특히 운동회 같은 날이면 그렇게 복장을 바꾸어 모양을 변하였다. 학교에 무슨 노래하는 소리가 덕수궁에 들려서 고종황제께서 교장을 불러 물어보시고 특히 학교이름을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사액(賜額)하시고 배재졸업생은 외교관으로 쓰기로 허락하시고 친용금(親用金)중 금(金) 이백원씩을 매월 하사하시였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 활자를 구입하여 성서를 인쇄하였고 서재필박사의 주간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연단에서 연설하기를 시작하고 설교도 차차 배우게 되여 모든 문명이 이 학교로 시작되었다. 독립신문의 주금(株金)은 대개 교인들이 내였다. 벽돌 건물로 배재학당과 종현(鍾峴) 천주교당(天主敎堂)이 처음이요 그 때 신문이 발행되어 백성으로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가 처음이라.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 지목하다가 차차 시일이 지나매 대대적으로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서재필박사 그 때 외교부 고문으로 있으며 조관(朝官)들의 지식을 얻기 위하여 정동 손택양구에서 조관구락부(朝官俱樂部)를 설립하고 조관들이 모여 차도 마시고 끽연도 하고 다화(茶話)를 시작하다가 이승만 씨가 구락부에 와서 우리 젊은이들도 들어 올 수 있느냐 함에 이 박사를 따라 여러 청년들이 도처에서 왔다. 이에 장소를 옮겨 나라에서 새로 지은 독립관(獨立館)을 얻어 매주 목요일 하오 7시에 대중이 모여 기탄없이 시정득실(市政得失)을 논의하였다. 그 때에 비로서 독립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직접간접으로 배재의 공이 많았다.
우리 지금 부르는 애국가(愛國歌)는 작사자를 몰라 사면으로 탐지 중에 있다. 나는 한번 배재 졸업생회가 되여 초대 졸업생인 오긍선박사도 오고 유전씨도 오고 유병민 씨도 왔는데 유병민 씨가 그 때 부르던 노래가 곧 지금 부르는 노래이다. 작사자가 누구이냐 물으니 모른다 하여 자기가 입학 전부터 학교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한다. 또 한번 동소문(東小門) 밖 화계사에서 제 4회 졸업생들이 모여 노사(老師)들을 청하여 나도 참석하였다. 그 때 최재학 씨도 참석하여 자기 소감을 말할 때 지금 부르는 애국가는 자기 아버지 최병헌 선생이 지였다 한다. 하여튼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인지 분명치 못하나 그 노래는 배재학교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다.
학교교실 앞에 창연한 고색을 갖은 노송(老松)이 있는 데 이것을 일컬어 왜송(倭松)이라 하여 일인(日人)들은 저들이 임란(壬亂) 때 심은 것이라 한다. 한국역사를 온통 저의 역사를 만들여 하는 야심이 있는 고로 그 솔나무까지 저들의 소식이라 하지만 그 솔나무의 년회를 따져보면 임란시절에 심은 것 같지 않다. 하여튼 이 노송은 수백 년 역사를 갖은 노선생(老先生)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고목이다. 배재가 조선의 최고 연령을 갖은 만큼 문화의 요람이요 이승만대통령을 낳은 높은 역사를 갖은 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