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시'의 정립을 위하여
이상으로 바둑 정신이 반영된 일련의 시들을 조명해 보았다. 바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적 가치들은 일기일회, 느림과 비움, 대결과 합일, 두두물물과 같이 다양했다. 이런 가치들은 시에서 인생 성찰, 현실 반영, 생존의 다양성 등으로 상황에 맞게 구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시들을 유형화하여 '바둑시'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바둑'이란 말만 들어가면 바둑시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시에서는 이런 범주를 적용해 바둑시란 명칭을 이미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시의 제재로써 하나의 장르를 설정한다면 시의 갈래는 무제한 늘어날 것이다. 꽃시, 나무시, 구름시, 강물시...... 이럴 경우에 장르는 그 의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단순한 소재 차원에서 바둑을 다룬 시를 바둑시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정지용의 [바다5]는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바둑돌은 /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 퍽은 좋은가 보아. // 그러나 나는 / 푸른 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 바둑돌은 / 바다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 퍽은 신기한가 보아. // 당신도 인제는 /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 귀를 들어 팽개를 치십시오." 이 경우에 "바둑돌"은 "당신"에게 버려지는 "나"를 비유한 매개물에 불과하다. 이런 류의 시까지도 바둑시라 하기엔 무리다.
따라서 범위를 좁혀, 바둑 정신에서 발견한 가치를 시로 특화한 경우에만 바둑시라 해야 할 것이다. 장르학자 김준오 교수는 이를 "특화한 제재는 작은 갈래의 한 목록이 될 수 있다. 작은 갈래마다 어울리는 제재가 있고, 이 제재의 '어울림(decorum)'은 작은 갈래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특징적 제재는 두드러진 형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70년대 산업사회의 충격 속에서 농민의 소외된 삶을 묘사한 {[농무]}(신경림) 계열의 시를 우리는 '농민시'로 규정했다. 또 80년대에 박노해가 노동 현장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시들을 발표하면서 '노동시'라는 영역을 확보했고, 최근에는 나태주가 '풀꽃시'를 하나의 유형으로 특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에서 조명한 시들도 '바둑시'로 갈래짓기에충분하다고 본다. 더구나 그동안 바둑 제재의 시들을 집중적으로 발표해온 최석균의 경우는 이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바둑시가 시인과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우리 문학판에 '신의 한 수'로 각광받는 때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끝)
-[신생](90호, 2022 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