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 5회》
6. 남로당 군내(軍內) 책임자 오일균 소령 체포
오일균 소령은 1926년 충청도 청원군 출신으로 청주중학교(5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육사 61기로 교육중 해방이 되어 귀국하였으며, 45년 12월 서대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46년 3월 군번 72번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부산 5연대와 춘천 8연대 등에서 근무하다 47년 부터는 경비사관학교 생도대장에 보직되었으며 이 때 경비사관 3기생들을의 훈육을 맡았는데 이들을 좌익 빨갱이로 의식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전체 생도 281명 중 80%를 빨갱이로 만들었다.
이 때 김창룡이도 생도로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그때 이미 오일균 소령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간파했다고 한다.
오일균은 48년 초에 생도대장을 그만 두고 부산 5연대 2대대장 보직을 받아 근무하던중, 제주 4.3사건이 발생하자 제주 주둔 9연대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9연대에 배속되었다.
9연대에는 1대대 2중대장으로 문상길 중위가 있었다. 이 문상길 중위는 경비사관 3기생으로 오일균 소령에 의해 양성된 골수 좌익이었다.
같은 연대에서 스승과 제자가 만났으니, 짝짜꿍이 잘 맞았다.
문상길 중위는 오일균 소령이 오기 전부터 한라산 유격대장 김달삼과 내통하면서 제9연대의 비밀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무기와 탄약도 반출해 주고 있었다.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일본 중앙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근무하다 복지산 예비사관학교에서 육군소위로 임관하였기 때문에 기초적인 군사지식은 가지고 있었음.
오일균 소령은 공비토벌 보다도 문상길과 짜고 병력과 무기를 반출하여 한라산 유격대장 김달삼에게 넘겨주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실제로 41명의 병력을 탈영시켜 한라산 유격대에 팔아넘긴 일도 있었다.)
그리고 군경 합동토벌작전계획도 김달삼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니 9연대의 토벌작전은 매번 실패하였다.
그러다보니, 9연대가 공비토벌에 소극적이라는 동향보고가 미 군정청 군사부장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화가 난 군사부장(미군대령)은 경무부장 조병옥 박사를 대동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김익열 연대장을 보직해임 시키고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새로 취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전임자 김익열 중령 보다 토벌작전을 강도높게 실시 하여 김달삼과 그 유격대 공비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불안을느낀 유격대장 김달삼이 오일균과 문상길에게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부하 손선호 하사에게 연대장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손선호 하사는 48년 6월 17일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와 연대장 집무실에서 자고 있는 연대장에게 소총을 발사하여 살해 하였다.
*지금도 충북동지회와 창원간첩단이 북한의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있었다고 하니,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故박진경 중령 후임으로 보직된 최경록 중령은 박진경 중령을 암살한 범인들을 체포하여 군사법원에 넘기고 오일균 소령은 대대장직에서 해임하였다.
최경록 중령은 해임된 오일균에게 포로수용소장직을 맡기고 2개월 만에 송요찬 중령에게 인계하고 다른 보직을 받아 육지로 돌아갔다.
*군사법원에 회부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수색의 사형장에서 총살되었으며 대한민국 사형 집행 제1호로 기록 되었다.
최경록 중령의 후임으로 부임한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요찬 중령은 오일균 소령의 동향을 파악해보니, 엉망이었다.계속 김달삼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공비를 풀어주고 대신 무고한 양민을 가두는 등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다.
송요찬 연대장은 오일균 소령을 포로 수용소장에서 해임시키고 군법에 회부하려고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도중에 오일균이 육지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당시 제주도에는 좌익이 믾았기 때문에 오일균을 육지로 빼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9연대에서 오일균이 탈영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창룡 정보팀은 오일균 체포작전에 착수하였다.
김창룡은 48년 8월 15일 대위로 진급했는데, 그 무렵에 오일균 소령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오일균이 우선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결혼을 해서 가족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더욱 찾을 길이 막막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의 비서 김영식이 생각났다.
김창룡은 김영식을 추궁하였다. 과연 김영식은 오일균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김영식은 남로당 군사부책임자 이재복과 오일균 사이에 연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창룡 정보팀은 김영식의 제보를 받고 48년 12월 어느날 이른 아침에 서울시 내자동 주택가에서 잠복을 하다 오일균 소령을 검거하였다.
오일균 소령은 9월에 제주도를 이탈하여 서울로 올라와 지하에 숨어서 남로당의 지령으로 남한을 전복하는데 필요한 빨치산 전술교범을 집필하던 중이었다.
김창룡 정보팀은 오일균을 조사하여 군법에 회부하였는데, 사형언도를 받고 49년 1월 흰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경기도 고양군 수색의 산기슭에서 세발의 총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