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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의사와 효창공원
▲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내 삼의사 묘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1931년 늦가을 어느날 김구가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 있는데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 청년이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하고 목청을 높였다. 누군가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하자 그 청년은 분개해 소리쳤다.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陵行)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나는 그때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소.』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李奉昌)이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 철공소 공원 등을 전전하며 19세 때 3·1 만세운동을 겪은 이봉창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그날 밤 민단 옆 여관방에서 이봉창은 김구에게 말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치겠습니다.』 1931년 12월 이봉창은 무장항일단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김구로부터 히로히토(裕仁) 일왕 폭살임무를 받았다. 그는『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한 뒤 폭탄(수류탄)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회연(懷然)한 표정의 김구에게 이봉창은 오히려 『나는 영원한 쾌락을 향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띠고 사진을 찍읍시다』고 권하며 미소를 지었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는 꼭두각시 만주국 황제 푸이(傅儀)를 데려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했다. 경시청 앞에서 관중 속에 섞여있던 이봉창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음과 함께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봉창은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봉창은 그해 10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는 오늘 오전 11시 서울 효창원에서 의거 7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이 의사의 거사는 분열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국내외 독립운동의 열기와 역량을 재결집하는 계기가 된 쾌거였음에도 그의 유지(遺志)는 변변한 기념관 하나도 없이 퇴색하고 있다. 폭살의 대상이 일왕이어서 그런가. 교과서 파동, 야스쿠니 신사 참배, 종군위안부, 어업협정 문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후손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文昌)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白貞善)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26일. 2차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1932년 10월 10일.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독립지사의 묘소 효창공원
백범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낮 1시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된 후 7월 5일 온 국민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국립묘지가 생기기 훨씬 전 효창공원에 안장된 것이다. 김구선생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신 이유는 효창동이 원래 김구 선생이 살고 계셨던 곳이라서 그 곳 가까이 묘를 정하였다고 한다. 후에 국립묘지로의 이장이 거론되기는 했으나 많은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는 안장할 수 없다는 가족 및 독립지사들의 반대와 숙적인 고 이승만 전대통령의 입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승만은 정치적 목적으로 넓은 효창공원을 축소하기 위해 공원 일부를 효창운동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사적 제330호인 효창공원은 본래 효창원으로 조선 22대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 및 영온공주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세자묘를 서삼릉에 강제 이장하면서 효창공원이 되었습니다. 광복후 이 곳에 김구, 이동령, 이봉창, 윤봉길, 백 정기 등 임시정부요인과 삼의사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13일을 택해 선열 일곱분의 합동 추모 제전을 봉행한 이후에 연례적으로 제전을 봉행하고 있다.
지금의 효창공원1989년 6월 8일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2만 3,307㎡이고,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이라고 불렸다.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와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 "죄송합니다, 김구 선생님~~!"
8월 15일 올해도 예외 없이 광복절은 돌아왔다. 올해는 광복 64주년이자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의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복절을 맞아 밀려드는 것은 광복의 기쁨이 아니라 한없는 미안함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기 때문이다.
2009년도 대한민국 일부 교과서에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일제 강점기가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식민사관에 바탕을 둔 내용이 실려 있다.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우익 교과서에나 실릴만한 내용들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자였던 야세르 아라파트를 두고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아라파트를 테러리스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라파트는 독립운동가요 해방혁명가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마오쩌뚱을, 베트남이 호치민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세계 어떤 나라도 식민지배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투쟁 과정에서 암살과 같은 수단을 동원했다고 해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거나 테러활동을 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사마 빈 라덴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김구 선생
역사 왜곡은 일본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짜 역사 왜곡의 주역들은 남한의 보수우익세력들이다. 김구 선생은 요즘 오사마 빈 라덴과 동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5년이면 끝나는 정권이, 길게는 단군 이래 5천년의 역사를 짧게는 광복 이후 64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복절'을 이름도 이상한 '건국절'로 바꾸려하는 시도가 바로 그렇다. 국가의 정통성과 민족의 뿌리를 부정하면서, 식민지 시대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이 뭐길래?
그들이 광복절인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항일독립투쟁과 김구 선생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나 미군정에 기생했던 친일파와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진 독재정권에서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후원자는 미국이고, 건국의 아버지는 이승만이고, 부흥의 아버지는 박정희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애석한 일이겠지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라고 나라의 정체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도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선언에서 따온 것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국가정체성과 법질서 확립을 말하지만,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그들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다른 나라의 보수 세력과는 달리, 외세와 사대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은 한국적 보수의 기원적 속성이다. 그들은 정통 민족주의 보수주의자인 김구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변종우익'인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는 이순신 대신 김구 동상이 들어서야
역사가 이 모양이니, 무언들 하나 제대로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최근 서울 광화문 광장이 새로 단장됐다고 해서 구경을 간 적이 있다. 오래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왜 우리나라의 상징인 광화문 광장에 독립운동가 김구와 무명의 독립운동가 동상은 없는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보면 시내 중심지에 수흐바토르 광장이 있고, 수흐바토르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칭기즈칸 광장이나 칭기즈칸 동상이 아니다. 수흐바토르는 1921년 중국과의 무장투쟁을 통해 몽골을 해방시킨 독립투사이며 오늘날 몽골인민공화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세계를 호령했던 칭기즈칸이 몽골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최고의 영웅일지 모르지만, 공화정 체제로 거듭난 몽골인민공화국의 영웅은 수흐바토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 광화문에는 '독립'과 '공화정'의 상징인 김구 선생이나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동상이 아니라,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 4월 세워진 것이다. 광화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서지 못하고,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한 박정희 정권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로서는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외국과 같이 독립투사의 동상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군인 이미지에 맞는 이순신 동상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그해 8월 남산에 백범광장공원을 지정하고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뜬금없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남산 자락에 김구 동상은 세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 이후 뒤틀린 우리 역사가 자행한 비극적 현실이다.
서울의 광복로와 독립로는 어디에 있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모든 나라의 수도의 중심거리는 예외 없이 그 이름이 광복로나 독립로다. 그리고 그 광복로의 거리에는 독립운동가와 해방투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 나라의 해방은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국민(인민)이 주인이 '공화정'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해방은 그들과 다른 것인가?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에서 광복로와 해방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서대문의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중국 상하이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만주벌판에서 찾아야 하나.
서울 한 복판의 세종로와 태평로 거리는 이름부터 광복거리나 독립거리로 바꿔야 한다. 새롭게 조성된 광화문 광장의 중간에는 새로 들어설 세종대왕 동상 건립 터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광화문 광장에 새로 동상을 세운다면, 당연히 김구 동상을 세워야 한다. 세종대왕은 현재의 덕수궁에 그대로 놓거나 다른 거리를 세종로로 바꿔 그곳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도 충무로로 이전해 추앙하면 된다. 역사의 영웅들도 제자리에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법이다.
지폐에 독립투사가 한 명도 없는 유일한 나라
어디 김구 선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이 뿐이랴. 올해 발행키로 했던 백범 김구를 모델로 하는 10만 원권 고액지폐 발행이 연기됐다. 정부의 해명은 뒷면에 넣기로 한 대동여지도의 목판본에 독도가 없어 논란이 일어 연기한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10만 원권과 5만 원권에 이승만과 박정희를 넣으라는 일부 우익세력들의 집요한 압력 때문이라는 의혹이 또 한편에 있다. 이 또한 해프닝이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정부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 중에서 자신의 나라 지폐에 독립투사가 한 명도 없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광복거리의 독립투사처럼 세계 어디를 가도 그 나라의 지폐에는 앞면에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뒷면에 그 나라의 문화유산이나 고유한 동물이나 식물이 실려 있다. 내가 몇 년 전 배낭여행했던 아프리카 국가들도 모두 그렇다. 지폐는 단순한 상품의 거래수단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지폐속의 세종대왕이나 율곡 이이, 퇴계 이황과 동전 속의 충무공 이순신 등은 훌륭한 우리의 조상이다. 그러나 화폐는 나라의 얼굴이자 현재 살고 있는 우리 체제의 역사적 정체성, 즉 민주공화정 체제를 우선적으로 반영한다.
아프리카 뿐 아니라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독립투사를 지폐의 얼굴로 쓰는 것은 그들이야 말로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 건설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발행된 5만 원권의 경우에도 초상화가 새겨진 신사임당은 훌륭한 여성이지만, 지폐가 갖는 역사적 정체성을 생각했다면 당연히 유관순 누나가 먼저 들어갔어야 했다.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광복절
외국에는 독립영웅이나 국가적 영웅들의 이름을 딴 도시나 국제공항도 많다. 베트남의 호치민시도 있고, 미국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이나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도 있지 않은가. 우리라고 인천 국제공항을 김구 국제공항으로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김구 기념관조차도 무려 서거 53년만인 지난 2002년에야 서울 효창공원에 세워졌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과 뿌리는 어디론가 한참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세계에서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맞서 투쟁을 한 독립투사들이 해방 이후 가장 홀대 받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광복절을 맞아, 이제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일부 보수우익세력들이 벌이는 역사왜곡은 아예 역사말살에 가깝다. 옛날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도 하지 않았던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 이리도 뒤틀리고 거꾸로 가고 있는지.
김구 선생이 꿈꾸던 문화강국은커녕, 우리는 지금 정권이 바뀌었다고 아예 국사 교과서까지 뜯어고쳐 나라의 기틀마저 흔드는 누더기 역사를 보고 있다. 추운 겨울 압록강을 건너며 언젠가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리라는 꿈을 만주벌판에 묻어야 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 앞에, 광복절 오늘 우리는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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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사의 숭고한 뜻 가슴에 새겨갑니다.
이러한 분들이 존재함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