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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동팔영 (仙遊洞八詠)(유성룡의 「영모록」에 청주 동편에 파관사와 선유동이 있어 천석이 절승하고 산중에는 거사 이령이 살고 있어
자호를 칠송이라 하였다. 선생과 대곡 성운이 모두 증시하였다.)
1. 송정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나무를 심은 이는 일곱이라 하였지만 달을 벗해 선 세 사람 그림자 서로 기다리네. 천암만학 굽이굽이 옥계임을 깨달으니 한 항아리 술로써 밤새 함께 배회하리.
2. 엄암에서 수계하다 황희지의 산음에서 천고승사 전해 오니 그대 함께 종일토록 풍연을 구경토다. 예를 보나 이제 보나 모두들 묻지 말라, 바람 쏘이고 시 읊음이 자연을 즐겨함이니라.
3. 파관에서 중을 찾다 숲 속 옛길 끼인 매태 한가히 밟았으니 승방의 꽃과 나무 누구 위해 심었던고. 그 사이 스스로가 그윽한 취미 있으니 중 찾아 법 물으려고 여기 왔음 아니로다.
4. 황양에서 봄놀이하다 무릉도원 봄이 드니 햇빛은 다사롭네. 바위 꽃과 시내 풀은 자연 향기 뿜는 도다. 선유동 이제 와선 끼친 자취 아득하니, 나 불러 신선이라 해도 오히려 무방하리.
5. 사평에서 소를 먹이다 돌 꾸짖어 양이 되었나니1) 괴이고도 싱그러운 일, 소 타고 세속 도망함도 또한 사람 놀랐었네. 어이하여 내낀 들에 소치는 아이들은 비낀 양지 피리 한 가락 늦은 봄을 희롱함고.
6. 선동에서 학을 찾다 선유동 신선 새가 드물게 보이더니 그 이마는 붉디붉고 그 옷은 눈일러라. 그 어느 때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이 되어 구름 사이 왕자진을 싣고서 돌아올꼬.
7. 화산에서 약을 캐다 선산에 신령한 비 내려 구슬 싹이 자라나니 이를 캐서 먹는다면 신선 된다 하는도다. 선옹에게 물어서 보력을 얻고자 하니 이 몸이 늙지 않고 효험이 길 것이로다.
8. 기탄에서 고기를 낚다 발길이 호서로 향하여 꽃 밟기를 게을리 하고 맑은 시내 흰 구름에 낚시를 드리웠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곰점(熊卜) 아니라 이를 건가 모래 위 흰 해오라기 멀리할까 두렵노라.
김지숙 기 (圻)의 운을 따라 차운하다[追次金止叔韻二首]
(이때 김공이 도산원장이 되어 퇴계 선생의 문집을 간행함)
삼십여 년 만에 비로소 오늘 있으니 제공(諸公)들의 용공(用功) 깊음을 보리로다. 그대는 도(道)를 찾을 곳 없다고 빙자하지 말라. 천성(千聖)의 서로 전함도 다만 이 마음인걸.
밝고 밝은 지리(至理)는 예나 지금이 같은데 어찌 현우(賢愚)를 쫓음이 얕고 깊음 있으리요. 만일 여기서 부지런히 힘쓴다면 아마 선정(先正)들에 이어서 마음이 열림을 알리라.
『겸암선생문집』
회포를 적어 퇴계 선생께 드림[書懷上退溪先生
총명도 점차 지난해와 다르오니 원공(元公)처럼 희성(希聖) 못함 부끄럼 깊소 까닭 없이 스스로 포기야 차마 하리까? 이제라도 죽기까지 잠심해서 힘쓰리다. - 유운룡, 『겸암선생문집』
퇴계 이황 묘전비 (退溪李晃墓前碑)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었고, 장년 되어선 병이 많았다. 중년엔 어찌 그리 학문 좋아하다가 늙바탕엔 어찌해 벼슬 탐했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져가고, 벼슬은 사양해도 더욱 영진을 했네. 나아가는 벼슬길엔 엎드러짐 있고 물러와 장수함에 곧음이 있다. 나라의 은택에 매우 부끄럽지만, 성인의 말씀이 진실로 두렵다. 산이 있어 높게 솟았고, 물 있어 근원이 멀다. 당초 입던 옷으로 너울거리며 뭇사람의 나무람도 거리낌 없다. 나의 심회 누가 막을 것이며, 나의 패물(佩物:행동) 누가 알아주랴.
내가 옛 사람 생각해 보니, 나의 마음을 실상 먼저 알았네. 어찌 알랴, 오는 세상에도 지금의 내 마음 이해해주지 않을 줄 걱정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걱정이 있다. 명이 다해 돌아가나니, 다시 무엇 구할 것인가.
1570년(선조 3) 봄, 퇴계 선생께서 연세가 일흔이었다. 두 번이나 전문을 올려서 치사하기를 청했으나 윤허 받지 못했는데, 그 해 12월 신축일(초파일)에 별세하셨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크게 슬퍼하시며,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의정에 대한 예로 장사하도록 명했다. 원근에 부음을 들은 자는 탄식하며 애석하여 서로 더불어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음해 3월 임오일(21일) 집 동쪽 건지산(蹇芝山) 남쪽 지맥에 장사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황이요,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에 터를 잡아 살면서 그것으로써 자호하였다. 그 후 도산에다 서당을 짓고는 또 도수(陶?)라 하기도 했다.
그의 선대는 진보현 사람이었다. 6대조 이석이 현리로 사마시에 합격했고, 밀직사로 추증되었다. 그 아들 이자수(李子脩)는 벼슬이 판전의시사였다. 홍건적을 토벌한 공이 있어서 송안으로 봉군됐고, 안동 주촌으로 옮겨와 살았다.
고조부 이운후(李云候)는 군기시부정이었고 사복시정으로 추증되었는데 배위는 숙인 안동권씨이다. 증조부 이정(李禎)은 선산도호부사였는데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배위는 정부인 김씨이다. 조부 이계양(李繼陽)은 성균진사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예안 온계리에 옮겨 살았다. 배위는 정부인 김씨이다. 부친 이식(李埴)은 성균진사로 여러 번 추증되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배위는 의성김씨와 춘천박씨인데 아울러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선생께서 나신 지 돌이 못 되어서 부친을 여의고, 소년 적에 숙부 송재공에게 글을 배웠다. 자라나자 뜻을 가다듬어서 글공부에 힘쓰며 더욱 애썼다.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했고, 1534년(중종 29) 문과에 들어 승문원부정자 벼슬을 했다. 박사로 전임했다가 성균관전적·호조좌랑으로 옮겼다. 1573년(중종 32) 겨울에 상을 당했다가 복을 벗자 홍문관수찬으로 제배했다. 그리고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형조정랑, 홍문관부교리 겸 세자시강원 문학, 의정부검상을 거쳐 의정부사인, 사헌부장령,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 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으로 전임한 다음 유가를 청해서 선대 묘소에 전배하였다.
다음해 1544년(중종 39) 봄에 홍문관 교리로 소명을 받고, 서울에 돌아가서는 좌필선으로 제배되었다. 홍문관 응교로 전임했고 전한으로 되었다가 병으로 사면하고 사옹원 정이 되었다. 다시 전환으로 제수되었는데, 이기(李?)가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했다. 잠시 후에 이기가 또 삭탈하지 말기를 청해서 사복시정으로 제수되었다.
1546년(명종 1) 봄, 휴가를 청해서 외구 장사를 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1547년(명종 2)가을에 응교로 제수되어, 소명을 받고 서울에 가서는 병으로 사면했다. 1548년(명종 3) 정월, 단양군수로 나갔다가 풍기군으로 바뀌었다. 기유년 겨울 병으로 사직하고 바로 돌아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가 삭탈되었다. 1552년(명종 7) 여름에 교리로 제배되어 소명을 받고 조정에 돌아가서는 사헌부집의로 제수되었고, 다시 부응교로 변경되었다. 작질이 승진해서 성균관대사성에 제배되었고, 병으로 사면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그 다음 형조참의, 병조참의로 되었으나 아울러 병으로 사면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5년년(명종 10) 봄에 고신을 바치고 해직된 다음, 배를 세내어서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와 홍문관부제학으로 제배되어 연달아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피했다. 1558년(명종 13) 가을, 상소해서 해면(解免)하고, 소명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어비(御批)가 내려 도성에 들어가서 사은하였다. 잇따라 대사성으로 제배되었다가 잠시 후에 공조참판으로 제배되어 여러 번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해 봄 휴가를 청해 시골에 돌아왔고, 세 번이나 소장을 올려 해면되기를 청해서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다.
1565년(명종 20) 여름에 소장을 올려 간곡하게 아뢰어서 벼슬을 해면하고 있었다. 그 해 겨울에 교지를 내려서 특소하며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제수하였다. 1566년(명종 21) 정월에 병을 참고 길을 떠났고, 소장으로 아뢰어서 걸해하였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공조판서로 제배되고 또 대제학을 겸임케 했다.
드디어 새 임명을 극력 사퇴하면서 집에 돌아와서 대죄했는데, 지중추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567년(명종 22) 봄에 중국에서 조사(詔使)가 오리라는 것으로써 소명이 있었다. 6월에 도성에 들어갔는데,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이 사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제배되어 사퇴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가 병으로 해면되어 곧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소명이 있어 지중추부사로 제수하고 잇따라 교서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소장을 갖추어서 힘껏 사퇴했다.
1568년(선조 1) 정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제배되었는데, 또 소장을 갖춰서 명을 받기 어려운 뜻을 극단으로 아뢰었다. 또 교서를 내려서 길 떠나기를 재촉하므로 서장을 올려서 간곡하게 사퇴했더니, 찬중추부사로 체임되었다. 7월 대궐에 나아가서 사은한 다음 사직하였다.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아뢰고, 또 「성학십도」를 바쳤다.
잇따라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으로 제배했으나 모두 힘껏 사퇴하고 배명하지 않았다. 1596년(선조 2) 3월, 차자(箚子)를 올려서 돌아가기를 청했다가, 다시 네 번이나 연이어 차자를 올렸다. 임금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인견(引見)하여 위로의 말씀을 내린 후 각 역에 행차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이 달에 선생께서 집에 돌아와 소장을 올려서 사은하고 잇따라 치사하기를 청했다.
당초 선생께서 편치 못하시자, 아들 이준에게 이렇게 경계하셨다. “내가 죽으면 조정에서 규례에 따라 예장하기를 청할 것이다. 네가 모름지기 유명임을 일컫고 소장을 올려서 고사하라. 또 신도비로 하지 말고 다만 작은 돌에다가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세계와 행실을 대략 서술해서 『가례』에 이른 바대로 함이 가하다.”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을 만약 남에게 부탁해서 한다면,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실상 없는 일까지 반드시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세상이 비웃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 뜻을 스스로 적고 싶어서 명문을 먼저 지었으나, 이럭저럭하다가 마치지 못했다. 그 명문 초고가 뭉치 속에 섞여 있을 터이니 찾아내어서 그것을 씀이 가하다.”
이준이 이미 경계를 받았으므로 두 번이나 소장을 올려서 예장을 사양했으나, 윤허하는 명을 받지 못하여 드디어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했다. 다만 묘도표석에는 남기신 훈계대로 그 명문을 새겼다. 아아,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학업이 우리 동방에 뛰어났음은 당세 사람이 이미 알고 있거니와, 후세 학자도 선생께서 논저하신 바를 보면 반드시 감발해서 묵계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안에 서술된 바는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보기에 더구나 족할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내가 선생의 권장하심을 받아서 성취했음이 부모와 천지 같은 은혜일뿐이 아닌데, 산이 넘어지듯 보가 무너지듯 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그윽이 유계하신 말씀을 생각하여 비록 어기지는 못하지마는, 그 행적을 없앨 수 없기에 묘소에 비를 세워서 후인에게 알리고자 감히 그 대강을 기록해서 말을 만들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함양(涵養)하여서 중세 이후부터 외모에는 뜻이 없었다.(선생은 소년 적부터 타고난 자질이 저절로 덕을 이루었는데, 어찌 중세 이후부터 외모에 뜻이 없었다는 것인가? 이렇게 문인 중에 불쾌하다는 말이 많이 있어서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이미 청한 글이어서 부득이 이 글을 쓰고 말았다.)
정신을 오로지해서 학문을 강구하며 미묘한 이치를 환하게 밝혔다. 덕이 가득 쌓이고 기상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능히 측량하지 못했다. 겸손하고 낮추어서 깨친 바가 없는 듯이 했으나, 대개 날마다 새롭게 상달해서 능히 그만두지 못함이 있었다. 그리고 출처와 거취에 있어서는 그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서 마음에 편한 바를 힘껏 구했으며, 마침내 마음을 굽힌 바는 또한 없었다. 그 논저한 바는 이리저리 되풀이해서 밝고 거룩한 것이 한결같이 바름에서 나왔으니, 공·맹·정·주의 언론에 비기더라도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른바 천지에 세워도 어기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따져도 의심할 것 없으니, 어허 지극하도다.
선생은 재취하셨는데 전취 김해허씨는 진사 허찬의 딸로 두 아들을 낳았고, 후취 안동권씨는 봉사(奉仕) 권질의 딸이다. 아울러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이준은 봉화현감이고, 이채(李寀)는 일찍 죽었다. 손자가 세 사람인데 이안도(李安道)는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했고, 다음 이순도(李純道)와 이영도(李詠道)이다. 딸이 둘인데 맏이가 사인 박려(朴麗)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한 아들이 있는데, 이적(李寂)이다.
퇴계선생 제문 (祭退溪先生文 又)
연월일 문인 유운룡, 유성룡(柳成龍) 등은 삼가 멀리서 선사(先師) 퇴계 선생 영정에 고합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선생이 가신 지도 두 해가 되었습니다. 의지할 곳 없어 좌절감을 금할 길 없습니다. 유운룡 등은 관직에 매인 몸이라 일곡(一哭)을 더 못 드리오니, 천지는 끝이 있어도 이 한은 끝이 없습니다. 슬픈 애사를 보내니 눈물이 다하여 피가 됩니다. 영혼이 계시거든 부디 살피소서. - 유운룡(柳雲龍), 『겸암선생문집』
퇴계 선생 제문 (祭退溪先生文)
모년 모월 모일에 문인(門人) 유운룡은 삼가 맑은 술과 채과(菜果)로 선사이신 퇴도 선생의 영전에 고합니다.
선생께서는 세상에 뛰어난 모범이시고 높은 학식을 가지셨습니다. 일찍 벼슬길에 나가시어 잠시 동안 학문을 멈추었으나 부귀영화에 초연하여 탐내지 않으셨습니다. 상기의 세대와는 비록 아득히 멀다 하나 그 원하심은 더불어 같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정성껏 나랏일을 돌보셨으나 그 간절한 참뜻은 학문에 있었습니다. 겸손하길 힘썼으나 품은 뜻은 원대하길 기했고, 몸은 낮추었으나 의젓하게 마땅한 길로 나가셨습니다. 동화(東華)에서 학문에 전념하시기 그 몇 해였던가? 뜻하지 않게 도유(都愈)에 오르셨지만 노후에는 번연히 벼슬을 버리고 호연히 돌아오시니 적막한 고을 기슭이었습니다.
도산의 언덕은 높고도 높고 퇴계의 물은 힘차게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오래 내버려진 밭을 파 일구니 길이 들어가 살 만하고 삼간의 좁은 초옥도 비바람을 견뎌내니 곡굉단표(曲肱簞瓢)로도 낙(樂)은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 성인의 도가 단절된 지 천 년인데 이를 전할 곳 없고 이어받을 사람 또한 없으니 누가 회복하리요? 선생은 그 벼리(網)를 떨쳐 일으키고 그 오리(緒)를 잇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의연히 자처(自處)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수의 방법이며 성인 되는 순서라, 우리 주자(朱子)의 거듭한 가르침이 있었으니 구한다면 이 길이지, 이 길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리요? 믿음을 이루는 가르침이 얽히고 얽혀 왼쪽은 그림이요 오른쪽에는 글이로다.
우러러 생각하고 글을 읽으심에 책장 넘기는 칼날이 빈 곳을 휘두르며 헤엄치니, 더욱 견해가 확실하고 평이하고 진실하게 되어 차례를 따라 나아가며 터럭 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으셨도다.
함양(涵養)의 공은 잠깐 사이에 이루어졌고 숙연하게 흐려짐 없이 향불 앞에 꿇어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니, 스스로 깨달음이 날로 새롭고 새로워졌도다. 동정을 비추어 살핌에 표리가 같아 지행을 병진(並進)하시니 마치 새가 날기를 배우듯 하셨도다.
숨은 것을 궁구하여 얻고 드러난 것을 탐구하여 가깝게는 자기 몸부터 멀리는 여러 사물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이치를 밝히시니, 틀림없고 명확함이 점치는 거북 등딱지를 보는 듯 밝게 알아 시비를 흑백과 같이 가리셨다.
뜻에 미진하면 밤새도록 연구하여 그 진리를 알아내어, 옳다고 생각되면 바로 실행하고, 실행하면 독실하시어 결연하였으니 마치 강하(江河)가 흘러감과 같았더라. 낮음으로 사물에 응하시고 절약함으로써 처신하시어 내 몸을 비움으로써 의(義)에 복종하시고 굳셈으로써 욕심을 제어하시니, 악함을 보시면 냄새나는 것을 대한 듯하고 선함을 들으시면 반기는 빛을 지우셨도다.
인륜의 아름다운 것이나 일용의 범상한 것이나 작은 것도 없고 큰 것도 없이 모두 이치에 맞게 하되 그렇게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부지런히 힘쓰고 조심하기를 저울의 눈금이 기울듯 조심하듯 하였다.
오랫동안 힘쓰고 힘쓴 공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그 수양의 깊음이 크게 이루어져 온 몸에 펼쳐지고 용모와 성음에 드러나니, 겸손하고 공경스러우며 돈독하고 중후하며 담박하고 간결하며 온화하고 단정하며 까다롭지 않고 쉬우며 자상스럽고 자세하며 측은해하고 같이 애태우셨다. 하여 맑기는 가을빛 같고 따뜻하기는 봄볕처럼 곱게 쪼이셨도다.
언사는 뽑은 실같이 정연하여 금과 옥이 부닥쳐 우는 것 같고, 의용은 장벽 같아 하수와 바다가 가득 찬 것 같았으며, 팔짱을 끼고 천천히 서면 학이 춤추고 난(鸞)새가 나는 듯하고, 한가로이 쉬실 때는 산등성이 매화 향기 같았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서면 온화하고 떨어져 바라보면 장엄하시어 있어도 없는 듯하시니, 어리석은 사람들이 본받았다.
또 고귀하시면서도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시니 보는 사람들이 그 작위를 잊었도다. 현(賢)과 우(愚)의 사이를 두지 않고, 물어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대답하시되 양끝을 다하여 정연하게 알아듣도록 말해 주셨다. 그러니 거친 사내나 간교한 선비나 창피함을 모르다가도 한번 그 문장을 보면 스스로 겸손해지고 억제하여 그 나쁜 마음을 얼음 녹듯 버렸도다.
성내지 않아서도 위엄이 있으시니 악한 사람들도 조심하였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으시니 착함을 행하려는 사람이 본받았도다. 아이들도 그 이름을 외우고 주졸들도 공경할 줄 알았도다.
나라의 원기요, 사문의 고봉이었도다. 도를 높이고 덕을 널리 펴서 인의(仁義)에 정숙하였으니, 위로는 수사(洙泗)에 접했고, 아래로는 염락(濓洛)에 이었도다. 자기의 임무가 무거운 것을 알고 침식에 급하지 않았도다. 몇 해 동안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그 조예가 더욱 극치에 이르렀을 것을, 하늘은 어찌 남겨두시지 않고 그리 혹독한 화를 내리셨는가!
전하지 못한 도통이 이어졌다가 다시 끊어졌으니, 또다시 어느 사람이 도통을 이어갈꼬? 참으로 하늘이 우리 도(道)를 궁하게 함이로다. 땅을 치며 통곡하여도 돌이킬 수 없으니 오장이 타는 것 같이 뜨겁도다.
아! 슬프도다. 지난 날 선왕(宣王)께서 만년에 부르시어 밤낮으로 머무르시게 하시려고 윤음(綸音)이 연이어 내렸다. 이에 선생은 궁전에 잠깐 들렸다가 바로 사직하고 돌아서니, 왕궁이 텅 빈 것 같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은명(恩命)은 더욱 융성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라는 왕명이 있었다. 거의 갈 듯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도 그려 보고 소문(疏文)도 올리며 정성을 다하였으나, 질병이 계속 이어져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 하셨다. 그렇게 벼슬자리만 높아 갈 테니 도리어 송구할 뿐이라 하시고, 사흘 밤 머무르시고는 표연히 옛집으로 돌아오셨다. 이 또한 하늘 뜻이니, 세상에 다시 무엇을 바라리오.
아! 슬프다. 하잘것없는 소자가 외람되게 선생의 문하에 올라 사랑을 받자와 좌우로 뫼시며 학문의 서론을 얻어 듣고 부끄러움을 머금으며 허물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끌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저에게 험난한 길을 피하게 하고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지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저의 학문은 지지부진하니 두터운 은혜만 헛되이 입은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겨울 잠깐 나아가서 문후하였을 때 완곡하게 주신 가르치심 마음 깊이 새겨들은 것이 어제 같고, 끝으로 주신 시(詩)에서 경계하신 말씀은 거울같이 밝게 비쳐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생의 가르치심 받들어 반성하고 조심하여 죽을 때까지 다른 일 없이 공부할 때와 같이 하겠습니다.
다시 올 봄에 가서 뵈려 하였는데 며칠 안 되어 두 상주로부터 기별을 받고 황망히 �아 갔으나 이미 돌아가셨으니,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한들 무엇하리요? 슬픈 눈물만 헛되이 흐릅니다. 지금부터 누구를 의지하고 살 것인가? 오직 선생님의 가르침을 믿기를 맹세합니다. 이 같은 슬픈 말씀을 드리고 조그마한 정성을 올리오니 신명이 계시거든 들어주소서. - 유운룡(柳雲龍), 『겸암선생문집
고종기 (考終記):退溪先生
1570년 퇴계 선생 70세 12월 3일, 병세가 위중하여 설사를 하였다. 방안에 매분(梅盆)이 있었는데 “매형(梅兄)에게 불결하여 내 마음이 미안하다.”하고 옮기라 하였다. 자제들에게 빌려온 책을 기록하게 하고 잊지 말고 돌려주라고 하였다. 4일에는 조카에게 유계(遺戒)를 받아쓰게 하였다.
1. 국가에서 예장(禮葬)을 하려 하거든 고사하여 예장을 하지 말라. 2. 상사(喪事)에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과 출처(出處) 등을 간략히 써라. 4. 장례 절차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서 시속에도 맞고 고례에도 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날 제자들에게 “내가 평소에 잘못된 소견으로 제군들과 더불어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 또한 범연한 일이 아니다.”하였다.
7일, 제자 간재 이덕홍이 점을 치니 지산겸괘(謙卦)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점사(占辭)가 나오자 김부륜 등이 곧 얼굴빛이 변하였다.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였고, 이날 날씨는 맑았다. 오후 5시쯤 갑자기 지붕 위로 구름이 몰리고 눈이 한 치 쯤 내렸다. 잠시 뒤 몸을 일으키자 앉아서 좌서(坐逝)하였으며,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개었다.
17일, 조정에서 부음을 듣고 명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멈추고 철시(撤市)와 죄수의 처형, 도살, 음악을 금하고 우부승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이듬해 1571년 3월 현재 묘소에 장사 지냈다.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가하지 않고 석인, 석상, 혼유석이 너무 크고 사치스러워 조카 이영이 눈물을 뿌리며, “이럴 줄 알았으면 유계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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