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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장 35-51절
부르기 전에 보았노라
세례 요한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했습니다. 비록 시간상으로는 자기 뒤에 오시지만 그분은 자기보다 앞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은 회개와 구원의 표로서 물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표가 아닌 실체로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증거 한 바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주에 살핀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바가 있었기 때문에 증거 한 것이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즉 그가 증거 한 모든 내용은 그 스스로가 터득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바가 되었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거뿐만이 아니라 그 증거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세례 요한이 증거 한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 있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역으로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깨닫게 해 주시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즉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내용 속에서도 이런 시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전체 본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는 자들과 관련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35절 이하 42절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과 그 중 한 명인 안드레가 그의 형제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43절 이하 51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빌립을 부르시고 그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와 관련해서는 세례 요한이 직접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보내고 있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증거 하는 자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증거 하는 자를 보내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고 봐야 합니다. 빌립과 나다나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내용과 관련해 4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가 부름을 받게 된 것은 빌립의 전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서야 비로소 보시는 분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기 전부터 보시는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복음을 통해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도 한꺼번에 보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본다고 해서 예지예정을 말하는 이단과 같은 내용으로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 보시고, 결과까지 미리 아시고서 정하시는 그런 의미에서 부르고 계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서의 의미는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앞선다는 그런 의미에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부터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그런 분이 빌립을 통하여 나다나엘을 부르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나다나엘만이 아니라 빌립에게도, 나아가 베드로와 및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게도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겠는데, 우선 35절과 36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미 전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는 이 두 사람이 있었는지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의도적으로 두 제자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증거 하면서 그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 보시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즉 세례 요한의 말로 인하여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해서 그가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강조하여 증거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른다고 할 때 그의 말 자체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있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5:34).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세워 그를 통해 증언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증언 하게 하셨다고 해서 그 증언을 듣는 자들이 항상 동일하게 반응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는 말을 했을 때 회개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즉 세례 요한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결정에 달린 문제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한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하는 일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인가?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효력을 발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두 제자가 그의 말, 즉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것은 세례 요한의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보내신 하나님, 또한 세례 요한의 말을 사용하셔서 효력 있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말 자체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의 말에 효력이 있다면 그 말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 나아가 그로 하여금 그 말을 하도록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사역의 결과에 따라 교만해서도 안 되며,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로마서 10장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하는 것처럼(롬10:15) 주의 진리를 전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주의 뜻을 따라 충성함만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세례 요한의 자세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본문을 보면 지금 세례 요한은 의도적으로 두 제자에게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면서 그를 따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있었는데, 어떤 부분까지 예비하는 자로 있었는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예수님에게로 보낼 정도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3장 30절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즉 그는 자신의 제자들조차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할 정도로 그분만이 흥하고 자신은 쇠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요, 사명이었던 겁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소명이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목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주목되도록 해야 하고, 내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그분을 따르도록 해야 할 자가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간혹 보면 주님의 제자를 만든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경우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주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고, 성도는 그런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서 사람의 뜻을 따르도록 하는 가르침까지 순종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목회자는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성도는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이해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분별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쨌든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로 있던 두 사람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고 있는데, 마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 두 제자의 경우도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가 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 예비하는 자로 있었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동일하게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에게도 동일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저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을 때 그분을 따라 갔던 겁니다.
이렇게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38절 상반부를 보시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나를 따라오고 있는데,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 따라 오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무슨 목적에서 나를 따라 오고 있느냐? 여기에 대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우선 예수님에 대해 두 제자는 ‘랍비’라고 부릅니다. 본문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선생으로 부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의 교사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로서 랍비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재차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것입니다.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어디에 거주하고 계시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어느 장소에 머물러 계시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으로부터 배우고 싶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스쳐지나 가듯이 배우는 자가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대화를 나누며 배우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거처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너희가 원한다면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나의 가르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들은 예수님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여기서 10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안드레였고, 곧이어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 받기를 원하여 따라갔던 것이고, 그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유효성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두 제자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열심을 가진 것처럼 비춰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 복음을 슬쩍 듣기만 하고 그리스도를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들려질 때 복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분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갈급한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과 상관없는 곳에 우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런 열심의 출처가 어디냐는 겁니다. 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그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부르고 계시는 겁니까? 후자가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답인 것입니다.
이후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40절 이하 42절은 베드로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여기 보면 베드로를 부르시는 내용 속에서 그의 형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자로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즉 39절에서 예수님의 거처로 가서 배울 때 그가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 겁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듣고 그를 따랐는데, 그분이 구약에서부터 예언해 오던 메시야임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겁니다. 그 메시야를 형제인 베드로에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너희 이름이 시몬이지만 창자 게바, 즉 베드로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상기시키는데, 베드로를 대표로한 사도들의 신앙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유일한 반석(터)은 그리스도이지만(고전3:11 참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엡2:20) 베드로를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른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안드레와 베드로를 그의 제자, 특별히 사도로 부르시는 일과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이후에 그들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 했기 때문에 그가 베드로의 부르심에 있어서 어떤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드레를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베드로에게 증거 하게 한 것은 맞지만, 그가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열쇠를 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기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전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런 측면에서 전도하자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지만, 자칫 전도를 통해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많이 한 것이 마치 공로가 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 전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죄악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전도를 하자고 말하는 것 자체를 시비 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를 빼놓고 자기들의 실력, 자기들의 지식으로 전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분명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분명히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더욱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43절 이하 51절입니다. 우선 43절과 44절을 보시면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여기서는 주님께서 직접 빌립을 부르십니다. 부르시되 부름에 대한 응답은 빌립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의 부르심이 아니라, 주의 부르심이 반드시 효력을 발휘한다는 측면에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를 통해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도로 세우고자 하는데, 너희가 결정하라는 의미에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외형은 그런 식으로 부르시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부르실 때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부름에 응답할 것인지, 아니면 거절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 사실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서 함께 하고자 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시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쉽게 말해 구약 성경을 표현할 때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하는데,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를 만났다는 겁니다. 앞서 안드레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냐? 요셉의 아들인 나사렛 출신의 예수더란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이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그로 하여금 메시야에 대한 확신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경우도 구약 성경을 통해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 성경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아는 바가 나타났을 때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빌립에게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요셉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라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동네 사람인 나다나엘에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나다나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46절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 역시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었는데, 구약에서 나사렛과 관련해서는 어떤 예언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나타날 것으로 알았습니다(미5:2, 요7:41-42 참조).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실제로 당시 바리새인들 역시 그런 인식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7장 5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지금 나다나엘의 경우 바리새인들로부터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예수가 메시야임을 거절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와서 볼 것은 권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의 반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내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 자체를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전했을 때 거절할 수 있지만, 그래도 또 전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질 수 있도록 전하고 말씀 듣는 자리에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전하는 자에게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듣는 자 쪽에 열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달린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사역자를 세워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또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시고 전도하여 데려오게 하시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습니다. 듣는 자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48절입니다. 48절에 앞서 47절을 보시면 빌립이 와서 보라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로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오는 그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여기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이어 나오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말입니다. 그리고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혈통으로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지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은 아니었습니다(롬9:6).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왔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물론 나다나엘도 이런 유대인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그가 주님을 따르게 될 자임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48절을 통해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가 자신에 대하여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48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가 간사하지 않습니까? 거짓이 없고 두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로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곧 바로 나오겠지만 그가 어떤 자로 있는지 미리 보셨기 때문이요,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반문은 마치 자신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도 그런 자로 있는 것처럼 묻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나다나엘이 착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은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시기 전에 보았습니다. 보았다는 것은 아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단순히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자인지 알고 계셨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어느 정도 나타내 보이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는 것만 하나님께 속한 일이냐?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아시는 바에 대하여 자기 뜻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시는 것과 실행하시는 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아시는 것을 실행할 수 있으며, 실행하고자 하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지예정이라는 의미에서 아시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예정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개혁자들이 말한 내용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우선 예지가 조건과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혁자들은 작정 없이는 예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은 예지보다 작정이 앞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작정은 하나님의 의지, 혹은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에는 우선순위가 없기 때문에 예지를 작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지가 나오면 그 예지에 대하여 미리 아신다는 이해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작정하신 바를 미리 아신다는 측면에서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을 볼 때 예지를 조건과 원인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보았다,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내가 너를 부르기로 정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빌립이 불러서 왔지만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는 내가 너를 보았다. 내가 너를 알았다. 내가 너를 나의 택한 백성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결과가 49절의 고백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38절에서도 나왔지만 랍비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나다나엘은 성경 기록으로 볼 때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존중 받아 마땅한 선생님으로 여기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단지 선생님이라고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도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고 한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이 분명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칭찬은 사람의 공로에 대한 칭찬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인데, 어떻게 사람을 칭찬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에 대하여 마치 사람에게서 출발한 것인 양 그렇게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마치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것처럼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고 자신은 감추듯 그렇게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다고 해서 사람이 칭찬 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칭찬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분명히 인식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여기서 나다나엘이 믿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칭찬함과 동시에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일이 뭐냐? 5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절에서는 나다나엘 개인이 아니라 ‘너희에게’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십니다. 문맥으로 볼 때 나다나엘과 더불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온 빌립에게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두 사람에게만 말씀하시는 내용인가? 우리는 확대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들, 그리고 그분이 참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꿈과 관련하여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교통할 수 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본래는 어떠합니까?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단절로 인하여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특히 그분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믿음의 내용에 있어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죄로 말미암아 닫혔던 하늘이 열린다는 데 있습니다. 단절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본래는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그 그리스도를 수종 들기 위해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에 있어 가장 큰 일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여러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 핵심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으로 있습니다(행2:11).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큰 일이란 한 마디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행2:21).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매우 큰 일이 아니라 수 없습니다.
그런 큰 일에 인간이 조금이라도 개입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증거가 나오고, 예수를 따르면서 배우고자 하는 열심도 나오고, 안드레나 빌립처럼 형제에게 친한 동료에게 소위 전도하는 일도 나오지만,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더욱 열심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고전15:10 참조).
이것이 분명하게 세워졌다면 그 신앙의 내용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형제에게, 빌립처럼 동료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드레를 사용하시고 빌립을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용하여 주의 백성을 불러내시길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