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차이
2021. 01 백란주
영화 대사를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같은 장면에서 처음 보듯 소리 내어 웃는 것은 남편의 독특함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큰아이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앓이를 하더니 무삭제 대본집, DVD를 신청한다. 보고 또 보기를 원하면서 아깝지 않는 투자라고 한다. 작은아이는 요리프로를 보고나면 그 과정을 따라한다. 내게 스포츠는 언제나 짜릿하다.
취향의 다른 점을 인정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로가 내 쪽으로 따라와 주길 바라는 마음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해받기보다 다름을 서로 존중해가는 중이다. 가끔 각자의 취향을 고집하기도 하고 상대의 취향에 추임새를 얹어주기도 하면서.
허영만, 고행석, 박봉성, 이현세 등의 만화를 좋아했다. 특히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내게 신선했다. 만화방에 가도 여자아이들이 머무는 곳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뻔한 스토리처럼 전해지는 순정만화는 나와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멀었는지 모른다. 일명 ‘똥손’이라 불리는 나는 그림을 지독하게 못 그린다. 내가 그린 그림은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피카소의 그림보다 더 난해한 그림임을 점차 알아갔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내겐 공포처럼 나를 위축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섬세한 머릿결, 화려한 옷 등은 난이도 높은 터치감으로 여겨졌다. 야구만화에서 직선으로 뻗어내는 강속구의 터치감은 단순 명쾌하고 짜릿한 쾌감이 전해졌다. 스포츠광이었던 나의 본성인지 모른다.
구기 종목은 무조건 팬이 되었다. 둘째 아이를 업고서 배구구장에서 응원하는 내 모습을 본 후 더 이상 스포츠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멋진 3점 슛이 터지는 농구구장에서는 반사적으로 내 몸이 의자에서 튀어 오른다. 파도타기 응원을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야구구장에서 파도타기 응원에 나를 오롯이 맡기지 못한다. 응원하는 사이 안타나 수비 실책이 있을까봐 얼른 손을 들었다 내려버린다. 핸드볼이, 축구가, 테니스가 …….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새벽에 하는 골프공에도 가끔 나는 손에 땀이 나도록 집중할 때가 있다.
‘뭉쳐야 찬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레전드들이 모였다.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각 종목의 사람들이다. 예능으로 비췄지만 내겐 예능 이상의 호기심이었다. 설마? 했다. 자신의 종목이 아니라고 저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 offside반칙 드로잉 등 축구 기본적인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이 예능을 위해 살신성인한다고 생각했다. 웃음을 주기 위해 스스로 무지한 우상으로 전락하는 설정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무지함은, 어쩌면 그래서 최고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종목에만 초집중하며 곁눈질 하지 않았던 성실함으로 전해졌다.
떼를 지어 나오는 예능을 싫어하는 남편은 그 조차도 그냥 그런 예능으로만 봤다. 일거양득의 내 짜릿함과 설렘을 모른다. 한 때 좋아했던 영웅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 누구나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실수의 연속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많은 선수들이 출연했다. 박태환 김요한 선수는 부상으로 주전에서 물러나야 했다. 뜀박질 잘하던 이봉주 선수의 초기 모습도 그립다. 태권보이 이대훈은 이미 축구선수였다.
시간에 따라 선수들은 성장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종목에서 세계최고를 맛보았던 선수들이 첫걸음을 떼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제대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역시였다. 걷기에서 뛰기의 과정처럼 선수들은 제대로 팀이 되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 겪었던 근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축구를 생각하게 했다.
지난 일요일 나는 그들을 보기 위해 시간 맞춰 앉았다. 적토마 고정운 선수의 해설은 경기에 감칠맛을 더했다. 4강 진출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전후반20분씩 경기를 한다. 후반 17분까지 경기는 ‘어쩌다 FC’가 지고 있었다. 얄밉게 남편이 “졌네!”라고 한마디 건넨다. 시계를 보는 순간 “아뇨, 이 경기는 드라마일거예요. 방송시간을 보니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대로 지지는 않을 듯요.” 하는 순간 골이 들어갔다. 18분 배드민턴 이용대 선수가 골을 넣었다. 남은 2분의 불씨가 더 궁금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긴장감으로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말없이 함께 앉았다.
상대의 어이없는 핸들링반칙으로 패널티킥을 얻었다. 모태범 선수가 키커였다. 빙상 출발선에 서듯 공을 앞에 두고 섰을 때, 꼭 골을 넣어야 4강 진출에 대한 희망이 있으므로 중압감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힘차게 찬 골은 멋지게 골키퍼를 지나 그물을 흔들었다.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이 오버랩 되었다. 감동이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스포츠가 주는 감동일 것이다.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구르는 공의 방향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변수가 게임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 순간에 그러한 실수가 나올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한때 최고의 정점을 찍어봤던 이들에게 고요함을 찾는 것은 숱하게 해 온 연습이었을지 모른다. 넣어야 하는 자와 막아야 하는 자. 골을 넣는 속도 0.4초와 골을 막기 위한 0.6초. 키커가 유리하겠지만 ‘아차!’ 하는 순간은 팀에 찬물을 얹게 된다.
뭉쳐야 찬다를 보면서 안정환선수에 대해 다시 느끼게 되었다. 당근과 채찍의 절묘함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선수들이 지치고 힘들어할 때 “괜찮아”로 다독였다. 잘하고 있다며 안정감을 주었다. 실수를 한 선수에게는 더 따뜻하게 괜찮다고 상대가 잘한 것이라며 마음을 도닥여 주었다. 오히려 이기고 있을 때 채찍을 했다. 자만하거나 지나침으로 하지 않아야 할 실수로 게임을 망치게 될 것에 대한 경험을 기꺼이 녹여내었다. 실력차이로 지는 경기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승부차기, 키커들에게 골키퍼의 눈을 보지 말고 자신이 생각한대로 그대로 공을 차라고 한다. 중간에 바꾸지 말고 자신을 믿고 차라고 한다. 공 하나로 팀의 운명이 좌우될지 모르는데 그 속에서 자신을 믿고 찬다는 것이 그리 쉬운가. 하지만 멋지게 해냈다. 4강 진출이다.
‘어쩌다 FC’의 성장기를 보면서 나는 행복했다. 그런데 곧 끝난다고 한다. 잠시 쉬었다 봄에 다시 시즌2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요일 저녁마다 나를 불러 앉혔던 뭉쳐야 찬다의 선수들 메시지를 당분간 볼 수 없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보고 난 후 아이는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아이와 나는 한동안 그 질문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 때와 잘하는 일을 할 때가 내겐 달랐던 것 같다. 주변상황이 나를 만족할 만한 상황이라면 좋아하는 일을 해도 되지만, 당장 밥벌이가 중요하다면 잘하는 일을 찾아서 안정을 가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결국 뻔한 답을 아이에게 건넸다.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행운이라는 이름의 운도 작용한다. 어쩌다 FC에게 찾아온 핸들링반칙처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운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행운의 기운이 내게로 오는 것일지도. 좋아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겉모습에서, 내면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상화對象化는 나의 기준보다 남들의 기준이 더 중요해진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걸음인 것 같다.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과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나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