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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의 줄거리:
'웃으면 복이 와요'는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입니다. 1969년에 시작하여 중간 휴지기를 거쳐 1994년까지 방송 되었습니다. 구봉서 서영춘 남보원 배삼룡 박명수 등의 코미디언들이 출연하였지요. 그런데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 혹시 엄청 웃은 뒤에 복 대신에 허탈감이 온 적은 없던가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하지만 솔로몬은 말합니다. 웃지 말라고. 웃음은 우매합이랍니다. 얼굴에는 근심을 띠는 것이 마음에는 더 유익이랍니다. 대체 왜지요?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
(전도서 7:1~29)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69년에 시작하여 중간 휴지기를 거쳐 1994년까지 방송이 되었고, 코미디계의 간판스타들인 구봉서 서영춘 남보원 배삼룡 이영자 김보화 등이 출연을 했습니다. 보면서 참 많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생활 속에서의 경험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웃으면 정말 복이 오던가요? 혹시 엄청 웃은 뒤에 복 대신에 허탈감이 찾아와서 마음에 공허함을 느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고 하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오늘 말씀에서 과감하고 거친 말로 웃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매함의 특징이 웃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슬퍼하면서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다면 반대로 기뻐하면서 웃는 것은 마음에 유익하지 않다는 말일 것입니다. 웃으면 웃을수록 마음은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은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지만 주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같은 성경에서 모순되는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6절에서도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광야의 가시덩굴들은 바짝 말라있습니다. 이것들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피면 탁탁 터지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타오르고 곧바로 하얀 재로 변합니다. 하얀 재는 허무함을 의미합니다. 우매한 자들은 웃고서도 금세 허무함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웃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웃을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면서 얼굴에 근심을 띄는 것이 마음에 유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근거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요?
1절을 보면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데 솔로몬은 슬퍼하라고 합니다. 반대로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솔로몬은 기뻐하라고 합니다.
2~4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간추려보면 지혜자는 슬퍼하면서 얼굴에 근심을 띄고 삽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잔칫집에 가서는 웃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이고 마음의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파티를 열면 열수록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초상집을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이름’은 명성입니다. ‘좋은 기름’은 값비싼 향유입니다.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입니다. 누구나 향유보다는 온 세상에 떨쳐질 이름을 선택할 것입니다. 지혜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세속적입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가치관은 저급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각이 드는데 하반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의 참 의미도 깨달아집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죽는 날’은 곧 몸이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는 날입니다. 반대로 ‘출생하는 날’은 몸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름을 얻게 되는 날입니다. 몸과 연관된 출생과 죽음에 유의하며 전반부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좋은 기름 즉 값비싼 향유는 좋은 냄새를 위해서도 몸에 바르고 치료를 위해서도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결국 몸이 없으면 값비싼 향유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름 즉 명성은 몸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몸은 죽어도 명성은 계속해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연관해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2~4절에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왜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왜 지혜자는 혼인집보다 초상집에 마음을 두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이 해 아래의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서 마음은 몸을 통해서 이 세상과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육체를 의존하면서 사는 동안에 마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결코 웃거나 기뻐할 만한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것을 깨닫고 차라리 슬퍼하면서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매한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육체를 통해 접하는 세상에서 기뻐할 일이 있다고 믿고 웃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죽으면 영혼의 차원으로 들어가는데 결국 그 마음은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큰 절망감과 좌절감과 분노와 배반감 등이 안겨질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웃을 일이 하나도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슬퍼하면서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는 것이고,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초상집이 상징하는 죽음은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고, 잔칫집이 상징하는 출생은 세상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즉 출생은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속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것이야 말로 마음을 위해서는 가치 있는 행동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은 너무나 염세적이고 비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도서의 말씀은 삶에 대한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낙원추방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에덴은 ‘큰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삶이 진행되는 현장이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는 삶에는 기쁨이 없고 에덴 밖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선언입니다.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어제 말씀에서 천년의 갑절을 장수하며 백 명의 자녀를 둔 사람보다 낙태아가 낫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애초에 기쁨이 없는 에덴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장수나 자손의 번영이 기쁨과 만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베리아를 동토의 땅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시베리아와 같습니다. 기쁨이 아주 두꺼운 얼음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풀 한 포기나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와도 같은 곳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마음의 만족과 기쁨이 다 말라죽은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게 되었기에 출생보다도 죽음이 낫다는 것이고, 슬픔이 기쁨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땅에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귀에게 속아서 기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마귀는 자꾸만 기뻐할 수 있다고 속이고, 우매자들은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다.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합니다. 죽음의 땅인 사막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 낙타들이 그렇게 운다고 합니다. 문학인들은 이것을 두고 앞으로 시작되는 길고 긴 여정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낙타가 사막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길고 긴 여정을 지나서 사막을 빠져나갈 때가 되면 낙타는 기뻐할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사막을 빠져나가는 낙타의 모습입니다. 지혜자는 오히려 출생이야 말로 사막에 발을 디디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매자들은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마음을 적실 기쁨의 대상을 찾기 위하여 웃고 잔치합니다. 그런데 속는 것에 불과하기에 마음에는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사기를 당하거나 애인에게 배반을 당하거나 모든 인생의 상실은 속아 넘어감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예를 살펴보고 나면 4절의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에덴 밖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근심이 적절합니다. 마음은 참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속아서 웃지 말고 속지 않기 위해 슬퍼하면서 근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라면 웃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손해가 오고 웃으면 화가 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울고 근심할 때에 복에 가까워진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울면 복이 오고 근심하면 복이 온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이 땅은 에덴 밖이기 때문입니다. 시베리아의 동토나 사막과도 같기 때문에 빠져나갈 때에야 기쁨이 생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잔칫집보다 초상집이 낫고, 출생보다 죽음이 낫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세상을 사막이나 동토로 여겨서 마음이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세상으로 나왔기에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나가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에는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출생보다 죽음이 낫다고 했으니 더 나은 것을 택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으면 됩니다. 자녀를 붙들고 씨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에게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형통은 마음의 기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대해서는 사막이고 시베리아 동토입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기쁠 일이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결코 돈으로 인해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일 수가 없습니다. 애국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인 한 나라도 마음의 기쁨에 대해서는 무관합니다.
우선적 과제는 에덴에서 쫓겨난 상태로부터의 회복입니다. 돈 벌 생각하지 말고, 명성 날릴 생각하지 말고, 성공 취직 혼인 할 생각하지 말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기쁨과 만족의 오아시스가 있는 땅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승천까지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말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이 땅에 머물러 있을 바에는 오히려 항상 슬퍼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슬퍼해야 할 곳에서 웃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세상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사막이 끝나는 자리이고, 시베리아의 동토가 끝나는 자리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곧 기쁨이 없는 땅에 대한 죽음이자 이제 기쁨이 있는 땅으로 들어가겠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막에서 물을 찾듯이 기쁨이 없는 세상에서 기쁨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매자의 삶입니다. 우선해야 할 일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곳에서 잔치를 벌이고 웃는 것은 바보의 행동입니다. 지혜자는 세상이 마땅히 슬퍼해야 할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자보다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시베라아의 동토이자 사막과도 같은 세상을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대해서는 배우자 자녀 돈 명예 권력 나라 등 모든 관계가 사막이고 시베리아의 동토입니다. 어차피 에덴 밖이고 기쁨이 없는 곳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주님의 공간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연합하여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셔서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오직 하늘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기쁨 즉 에덴을 회복한 상태가 되면 세상에서의 삶은 변합니다. 기쁨을 발굴하려는 현장이 아니라 기쁨을 표현하는 현장이 됩니다.
하늘의 기쁨이 주어질 때에 세상은 하나의 화폭이 됩니다.
이 화폭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붓과 물감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의 모습을 그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도 돈을 벌기 위해서 나가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기쁨을 그려내기 위한 장소가 됩니다. 돈을 쓰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우매자들이 돈에서 기쁨을 발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기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웃으려 할수록 더 큰 허무함이 밀려올 뿐입니다. 먼저 세상이 사막이고 시베리아 동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전도자의 말씀과 같습니다. 태어난 것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죽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옥으로 가는 죽음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고 행복이 찾아질 수 없는 곳에서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성과입니까? 제자리에 앉아서 큰 성과를 얻어내기 때문입니다.
낙타는 애를 쓰며 사막을 빠져나가지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자리에서 믿음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오셔서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 기쁨을 물감 삼아 세상의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삶이 아니라면 차라리 근심이 유익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서 십자가와 하늘 사이에 만드신 공간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과 대상들에게 하늘 기쁨을 그려내는 화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