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맥(7)-백제(百濟)천황의 일본망명과 십제(十濟)王의 백제계승
1.백제의 일본진출
고주몽의 이붓 아들 비류왕자(眞씨)가 곰나루(熊津)에 백제(百濟)를 세우고(B.C18년),
고주몽의 친아들 온조왕자(高씨)가 하남(河南)에 십제(十濟)를 세울 당시(B.C.7년),
일본열도는 오래전 시베리아로 부터 건너온 소수의 아이누족, 즈치구모족, 히기비토족 이라는 몸은 작고 손발이 긴 희귀한 족속들이 읍락을 이뤄 흩어져 살고 있었다.
북쪽에서 중화족과 대륙의 패권 투쟁에 몰입하던 쥬신족,부여족 계열의 왕족들이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게 되니 반도의 좁은 영토에 비해 땅은 넓고 비옥한 신천지와도 같았던
일본열도에 자연스레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때 맨 먼저 김수로왕의 6왕자에 의하여 대마도와 규슈지역에 가라임나(加羅任那)가
세워졌는데 곧바로 백제의 이장락 천황은 월야견(月夜見) 장군을 출정시켜 채
자리도 잡지 못한 가라임나를 쫓아내고 비류천황의 꿈이었던 다물 임나(地勿
任那)를 세워 백제의 일본 진출 전초 기지가 된다.
이후 서기100년 백제 이장락 천황의 아들 소잔오(素棧嗚)는 행실이 포악하여
일본으로 쫓겨 가 최초의 백제 담로국 야뫼도 백제를 세운다.
쫓겨 가기 전 소잔오는 그의 누님 천조(天照)공주를 범하여 천인수이(天忍穗耳)
라는 순수 황족의 아들을 낳게 되고, 일본에서는 현지처 쿠시이다히메를 얻어
대기귀(大己貴)를 낳았다.
소잔오의 아들 대기귀는 자기 아버지를 이어 인근지역들을 모두 정벌하여 새로이
일향출운국(日向出雲國)을 세운다. 그러나 곰나루 본 백제에서는 순수 백제 황손
혈통이 아닌 대기귀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하여 백제 고황산 천황(이장락천황
동생으로 소잔오대신 왕위계승)은 그의 손자 신선저를 일향출운국 왕으로
임명하니 대기귀는 크게 반발 한다. 이에 백제는 경진주(經津主)장군을 보내
대기귀를 항복시키고 신선저를 왕위에 앉히고 담로국과는 달리 일향출운국은 백제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왜지의 천황국가가 된다.
우유부단한 신선저 역시 본국의 영을 어기고 현지처와 결혼하여 순수 혈통을
잇지 못하자 백제천황은 그의 후임으로 소잔오와 천조공주 친남매 사이에 얻은
젊고 씩씩한 천인수이(天忍穗耳)를 임명하니 이분이 일본正史의
시작으로 보는 신무왕(神武王)이다.
일본서기는 신무왕을 '神日本磐余彦天皇'(천지개벽하는단군)으로 표현한다.
신무왕(神武王)은 일본 원주민을 엄청 학살하며 영토를 넓혀 나가 나니와왜
(浪花倭=오사카지역)를 설립 하는 등 전공이 혁혁하였으나 이로 인해 많은 인명
이 살육당하고(현재 일본의 가즈라기(葛城)는 그때 신무왕의 칡넝쿨 그물에
수천명이 갖혀 학살당한데서 생긴 지명임)
악귀와 악질이 창궐하여 민심이 흉흉한지라 신무왕은 이를 본국에 보고하니
백제천황은 귀신을 잘 다스리는 신수두의 단군 숭신왕(崇神王)을 파견하고
신무왕을 나니와 왜의 담로왕으로 임명한다.
숭신왕은 후에 나니와 왜(浪花朝)까지 흡수하여 나라조(奈良朝)를 세우고,
신사(神社)를지어 수두삼신에게 제사 지낸 분이다. (오늘날 일본神社의 시초)
(이때 백제 외에도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 영일만의 신공 세오녀, 고구려
하이족 등에 의하여 일본열도가 분할 지배되었는데 이는 다음기회에.)
한편 외백제(外百濟)의 영토문제로 중국의 송(宋), 진(晉)과 다투던 백제는
십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아들 큰구수(近仇首)태자의 활약으로 이를
평정하니(서기375년), (이때 십제의 병권은 백제가 쥐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사이에 있는 고구려와의 국경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에 십제 큰구수왕은 고구려의 사유열제(斯由烈帝;시호 고국원왕故國原王)를 독화살로
죽이니 원래 같은 부여족으로 사이가 좋던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된다.
백제에서는 응신(應神)태자가 왕위에 오르고(백제6대,서기390년)
(우리역사에서는 십제의 아신왕으로 대체하고 있음)
고구려에서는 이듬해 호태왕담덕(好太王談德;시호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때 백제의 조공국으로 있던 신라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김씨왕조의 시작)을 백제 응신천황 즉위식에 참석치 않은 죄로 징벌할려 하니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불감청고소원이라 광개토대왕은 선대왕 사유열제(고국원왕)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과 함께 백제를 침공한다.
강대국이던 백제는 있는 힘을 다해 몇 차례의 혈전을 벌였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드디어 서기397년 백제 응신천황(應神)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곰나루 침공에
못 이겨 일본으로 쫓겨 가게 된다. 네 차례의 수복전쟁을 감행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니 아예 일본에 눌러앉기로 결심하고 담로왕들의 도움으로 응신천황은
나라(奈良) 망명정부로 출발하여 무정부 전란시대의 일본을 평정
나라백제(奈良百濟)를 세워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2.십제(十濟)의 백제계승
백제의 응신천황을 놓친 광개토대왕은 뒤이어 십제를 공격하여 십제의
아신왕(阿莘王)으로부터 번국이 될것을 맹약 받고 퇴각하였다.
아신왕이 죽자(서가405년) 큰개루왕(近蓋婁王)이 그 뒤를 이었으나 고구려와의
맹약을 어기고 계속 일본 나라백제에 충성을 다하므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거련열제(巨連烈帝)는 조국을 배신한 백제의 옛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을 시켜 서울 아차성(지금의 아차산)에서 큰개루왕을 주살시킨다.
이로서 십제(十濟)는 역년482년 만에 20대왕조로서 막을 내렸다.
백제(百濟)의 비류왕통도 일본에 있고, 큰개루왕의 죽음으로 십제(十濟) 온조왕통을 이어갈 후손도 국내에는 없다보니 십제의 상좌평 문주(文周)는 신라군 1만을 빌려와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백제의 왕위를 계승 할려 한다.
이를 일본의 나라백제 천황에게 보고하자 나라백제 천황은 이를 거절하고
일본에 있던 큰개루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백제왕으로 임명 곰나루로
귀국시키니 일대 내전이 일어났다.
문주와 곤지의 두달 여에 걸친 싸움에서 곤지가 패해 일본으로 다시 도망친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곤지가 죽었다고 했으나 일본서기는 오래 산것으로 기록)
문주는 남부여계와의 화해 책으로 자기 아들 임걸(壬乞;三斤王)을 내세웠으나
백제 잔존세력에 의하여 임걸 삼근왕(三斤王)은 살해당하고 만다.
이에 일본 나라백제에서는 곤지의 큰아들 14세의 젊은 모다(牟大)를 백제왕으로 보내니
이분이 동성왕(東城王)이시다. 이분이 십제의 왕손으로 백제를 계승한
첫 임금으로 처음에는 곤지의 섭정을 받다가 17세부터 친정한다.
동성왕은 중국에 건너가 위(魏)군을 대파 산동 반도의 외백제를 크게 부흥시켜
래주(萊州)를 식민통치를 위한 수도로 정하고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 아름다운 여자들에 취하여 세월을 잊고 지냈다.
(중국측의 백제전, 주서와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남송(南宋)과 양(梁)나라의
양자강 양안및 금주,의주,애춘땅이 모두 백제의 강역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산동반도의 외백제는 근초고,큰구수,동성왕등 온조십제의
왕손들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다. 최초 외백제는 소서노가 고주몽을 떠나 비류, 온조를 데리고 서해로 남하 하기전 산동지역에 확보해둔 영토임.)
이러다보니 곰나루백제는 두번째로 군주 없는 국가가 되어 모든 정무를 중국의
동성왕과 일본의 나라백제 천황에게 결재를 받는 이상한 형국이 되었다.
이에 곰나루 백제는 가림 성주 위사좌평 백가(栢加)를 대표로 중국래주의 동성왕에게
귀국권유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 귀국설득을 거부한 동성왕은 오히려
백가(栢加)를 곰나루왕위를 넘보는 역모혐의로 죽일려 하니 백가일행은
잠자는 동성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이리하여 중국에 대식민지를 건설했던 백제의 영웅 동성왕은 명예롭지 못한
최후를 37세의 나이로 마감했다.(재위23년, 서기501년) 무덤은 산동 반도에 있다.
동성왕을 죽인 백가는 나라(奈良)천황께 고하고 자신을 왕위 세습토록 요청한다.
일본에 있는 나라백제의 웅략(雄略)천황은 이를 거절하고 곤지(昆支)의 둘째아들
사마(斯麻=島君)를 곰나루 백제왕으로 임명하니 이분이 무령왕(武寧王)이시고
일본백제천황의 임명을 받은 마지막 왕이 된다.
사마는 곤지가 처음 일본으로 갈 때 큰개루 왕이 왕손보존을 목적으로
임신한 그의 후궁을 동생 곤지에게 첩으로 주었는데 이 후궁이 현해탄을
건너던 중 섬에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마(島君)라 한다.
해서 무령왕은 실제로는 곤지의 아들이 아닌 큰개루 왕의 아들로서 동성왕과는 사촌지간이다. 무령왕은 일본 있을 때 웅략천황의 계체(繼體)태자와는 형, 아우하며 동문수학
하던 사이인데 계체천황 즉위 시에 무령왕이 보내준 동경(銅鏡)이 지금 일본의
국보다. 거울의 명문에 사마가 아우 계체를 위해 만든 걸로 표기돼있다.
무령왕은 백가(栢加)를 몰아내고 정치를 굳건히 하였으나 후사 없이 재위22년 만에
죽으니 일본의 나라백제 계체천황은 나무 관을 보내 예를 표했다.(서기523년5월)
무덤은 곰나루 공산성에 있다.
이로서 眞씨왕통의 비류 백제는 응신천황으로 마감되고 이후 온조 십제의 高씨
왕통도 동성왕,무령왕으로 이어지다가 무령왕이 후사 없이 죽으니 대장군이었던
남부여계의 扶餘씨 명농왕(시호;聖王)이 남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꾸었고 후에
의자왕으로 마감된다.
우리역사는 비류백제,온조십제,남부여를 통 털어 백제로 지칭한다.
*백제왕통: 비류천황...고황산천황....응신천황(이후 일본 나라백제천황으로 계승)
*십제왕통: 온조왕...큰개루왕...동성왕. 무령왕(이후 남부여 왕으로 승계)
*남부여왕통: 성왕,위덕왕...무왕, 의자왕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자들이 모두
고려(高麗)시대 사람들 이기 때문에 이미 왜국에 존재하고 있는 곰나루백제사,
중국에 있었던 외백제사를 우리역사에 편입시키기를 주저 하므로서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취급하게 된 소이다.
또 일본입장에서 보면 곰나루백제에서 천황이 도왜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역사를 만들 수 없었기에 천황이 하늘에서 직접 하강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
를 고사기, 일본서기에 기록하고 있다. 또 일본서기가 쓰여 진 싯점이 백제가
신라에 패망된 후이기에 반도의 주인이 신라인지라 일본으로 이주한 반도사람들은
적으로부터 쫒겨 온 꼴이 되니 당시 일본서기를 만든 천무(天武)천황의
입장도 미묘했으리라. 허기에 일본은 아직도 우리의 상고사 자료를 정창원에
밀폐시켜놓고 공개치를 않고 있으니 의식 있는 정부라면 하루속히 반환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신라 통일직전의 신라와 남부여(백제)의 관계를 살펴본다. 峨 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