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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4장 1-5절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저들이 음란한 여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음란한 여자일 뿐만 아니라 음란한 여자로서 음란한 자식을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들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와는 정반대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는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 대하여 내 백성이라고 칭하셨으며, 내 백성이기에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음란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에 하나님은 음란한 자리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책망의 음성을 높이기도 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호세아 2장 14절부터 3장까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은 다시금 호세아 4장에서 책망과 징계의 말씀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을 베풀겠다고 하실 때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인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망과 징계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책망과 징계의 원인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책망과 징계의 말씀을 하지 않으면 또 다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위협의 말씀을 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우선 호세아 4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시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논쟁하겠다고 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법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하시는가? 지금까지 살펴온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때문에 너희와 논쟁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논쟁하겠다고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저들과 화해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하자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논쟁하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겠다고 하실 때 은총과 긍휼 없이 행하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논쟁하겠다고 하시지만 단순히 벌을 주기 위한 논쟁보다는 저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런 논쟁 속에서도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거절한다면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있다면 거기에는 영원한 저주가 선포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저주가 선포될 대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안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입니다. 육적 이스라엘로 부르셨지만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육적 이스라엘 안에 유기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리셨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가 선언될 수밖에 없는가? 유기자여서 저주가 선언될 수밖에 없는가? 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버리셨기 때문에, 유기자여서 저주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저들에게 영원한 저주가 선언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지만 그 기회를 그들 스스로가 차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돌아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의 자리에 머물고자 했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논쟁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서요 다른 하나는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면서도 결국 자기 백성을 향해 은총과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전자의 경우 택자든 유기자든 상관없이 실행이 됩니다. 유기자에게만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택자일지라도 실행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오직 택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으로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지만 긍휼과 은혜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논쟁하겠다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국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편에서 뭔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참되다고 할 수 있으며,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하나님께 따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처럼 생각하여 따지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와 논쟁하겠다고 하실 때는 하나님 편에 뭔가 잘못한 일이 없다는 전제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들에게 엄히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부당하게 심판을 행한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좋지 못한 일을 겪을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반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겪고 있는 일이 부당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의논 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때 우리는 사람을 주목하지만 사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셔서 그 모든 일을 허락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 부당하게 그 일을 행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하여 부당하게 여긴다면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부당하게 행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인생에서 어떤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와 논쟁하겠다고 하시는 것은 이런 너희의 입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반박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논쟁하겠다고 하시면 우리의 모든 입을 막아야 합니다. 논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죄악 된 행동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논쟁하겠다고 하시면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31:6)는 말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혹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는 말씀으로 대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논쟁하겠다고 하시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 말씀을 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맙니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논쟁하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소송을 제기하고자 하시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인데,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이 땅에는 진실도 없다, 인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는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이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나아가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열거할 때 진실도 없다, 인애도 없다, 그래서 저주와 속임과 살인, 도둑질, 간음 등이 편만해 있다는 말씀은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을 의식하고서 열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명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열매가 무엇인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와 속임과 살인, 그리고 도둑질과 간음 등이 북이스라엘에 편만하다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단어의 경우 맹세라는 뜻도 있는데, 맹세와 함께 속임을 일삼기 때문에 거짓된 맹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맹세, 그리고 살인과 간음, 도둑질, 복수하는 일들이 편만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웃 사랑의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는 있었는가? 이미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 너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의 열매도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 사랑의 열매가 없을 수 없는데, 너희에게 이웃 사랑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와 같다고 알리고 계시는 겁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버렸는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식으로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또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무수한 제물도 가지고 나와 예배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향해 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자치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같은 신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나타나고 있는 열매가 무엇인가? 진실이 없다, 인애가 없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 도둑질, 간음, 복수하는 것 등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거짓이 만연한 것이고, 인애가 없기 때문에 잔인하고 포학함이 가득한 것입니다.
칼빈의 호세아 주석을 보면 본문에 대하여 소수의 사람들만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행들이 어디에나 만연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종류의 죄악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악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짓는 자들이 더 이상 숨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는 자들처럼 은밀한 곳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땅에는 어디에나 음란한 행위들이 그토록 심하게 만연되어 있어서 그 땅 전체가 하나님의 멸시와 범죄들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도 없고 이웃 사랑도 없고, 그래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셔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 모든 악의 근원을 그 세 번째 구절에서 지적을 하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식의 부재로 인하여 이 모든 악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할 때 그 지식은 진실과 인애를 열매로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짓이 만연해 있는 것이고, 잔인과 포학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주에 확인하겠지만 6절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냐? 멸망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란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만약 너희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너희 속에 있는 그 하나님 지식이 우리들의 생활을 억제시키는 고삐 역할을 할 것이지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방종하게 되어 죄를 범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 알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그렇게 행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 인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6절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실제로 오늘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즉 하나님은 이 땅이 슬퍼한다는 표현을 통해 심판을 집행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알리십니다.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심판하겠다고 하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심판하겠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을 미루시는 것처럼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심판을 미루지 않겠다고 알리십니다. 이 땅이 슬퍼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게 그 땅에 사는 자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땅에 사는 자들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짐승,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고, 심지어 바다의 고기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대상이 죄를 지은 사람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처럼 저들도 죄를 범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다른 피조물까지 해를 입게 될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알리시는 겁니다.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 역시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롬8:21-22). 사람의 죄의 심각성 때문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명의 발달 혹은 과학의 발달이라는 이름 아래 환경을 오염시켜 그 심각성을 말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존층 파괴, 플라스틱 섬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은 환경의 오염, 환경의 파괴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죄의 심각성은 그것보다 더 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편안함을 위해 자동차도 만들고, 플라스틱도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환경 오염, 환경 파괴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들고, 플라스틱을 만드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는 것,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저주와 속임과 살인, 도둑질, 간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까지 심판을 받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는 만큼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십시오. 얼마나 진실합니까? 얼마나 인애가 있습니까? 진실보다는 속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직해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합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 불신이 생기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고들을 보면서 진실과 인애가 참으로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간통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부부 사이의 진실과 인애를 버리게 만든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살인은 하지 않을지라도, 실제 간음은 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 마음 가운데 살인과 방불한 일이, 간음과 방불한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탐심이 모든 인류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과 인애가 있다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해서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해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명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고, 거기에 인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이 있는데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릴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마당만 밟고 나갈 뿐입니다(사1:12).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인애로써 나타나야 합니다.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의 계명이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실천될 수 있도록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열매 없이 주 앞에 나아간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열매가 없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앞에서 진실도 없다, 인애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의 열매가 전혀 없다고 말했는데, 그 모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가?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제사만 드리느냐 하면 때때로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들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로 이끄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참된 선지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권면하더라도 그 권면을 달게 듣지 않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고집이 세고 심술궂은 사람들은 책망을 받을 때에 오만하게 된다고 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얻지 않았는가?”라는 불평으로 저들 앞에 서는 자들로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모든 예언자들과 교사들보다 더 우수한 것처럼 자기들의 지식을 교만하게 자랑하면서 배우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은 정당한 가르침에 대한 거절 때문이요, 그렇게 거절하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앞에서는 누구도 선생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도를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받았지만 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학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저보다 더 많은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성경 앞에서는 학생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는 결국 교만 외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 무엇을 거절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정당한 가르침까지 거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성경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의 경고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고전1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과 다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정당한 가르침조차 거절하는 자로 있었기 때문에 5절과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낮에 넘어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 특히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는 제사장과 다투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된 선지자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낮에 넘어진다면 거짓 선지자들은 밤에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낮에도 넘어지는 일이 있고, 밤에도 넘어지는 일이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낮과 밤 할 것 없이 계속해서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고 하시는데, 이때 어머니는 호세아서의 비유로 말하자면 음란한 아내인 고멜입니다. 이 고멜은 북이스라엘을 의미하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낮에도 넘어뜨리고 밤에도 넘어뜨려 결국 북이스라엘을 멸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누구에게 이런 심판이 임하는가? 제사장과 다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정당하게 가르치는 자들과 다투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식의 부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하였지만 자의적 예배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식의 예배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고안한 예배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 사랑을 버렸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실이 어디 있으며, 인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타나는 열매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하여 살인과 간음과 거짓 맹세, 도둑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겨 왔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아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생각하여 참된 가르침을 거절했던 겁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당하게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그것을 거절하여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할 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 이 지식이 중요합니다. 다른 지식은 세상 삶에 있어 어느 정도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지식은 영생을 줍니다. 영생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사랑이 실제로 나타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이웃 사랑의 실천을 실제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하고 힘써야 할 부분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그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결국 넘어지게 되는 결과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비록 계시로 기록된 성경은 66권이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 사랑의 깊이처럼, 그 사랑의 높이처럼, 그 사랑의 넓이처럼 계속해서 배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