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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3일 주일 메시지
시리즈 제목: 하나님의 꿈을 배우자5
설교 제목: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
마태복음 19:27~28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설교 목적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요, 현실의 부족함이 충족되는 세상이다. 꿈이 성취될 때 한(恨)이 풀어진다. 하나님의 꿈은 미래에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며 엇나간 현실이 바로잡힌 세상이다. 그것은 여한(餘恨)이 없는 세상이다. 구도(求道)는 하나님의 꿈을 배우고 그것에 자신을 바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의 생애(生涯)를 생각해 보고 그 중심이 되는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점에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와 행위가 의미를 가졌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 후에 유대땅에서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어떻게 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는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견해를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한은 어떻게 풀어지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교회와 세상을 꿈꾸어야 할지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한(恨)을 품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2. 한(恨)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3.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된 비결
4. 인생의 한은 어떻게 풀어지는가?
1. 한(恨)을 품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누구나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 절대반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 끈질기게 주인공을 따라가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골룸’입니다. 반드시 반지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그는 본래 호빗(스미골)이었으나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끝부분에서 골룸은 주인공의 손에 있던 반지를 빼앗기 위해 주인공의 손가락을 이빨로 끊어버립니다. 골룸은 그 절대반지를 손에 넣었지만 이글이글 끓는 용암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골룸의 욕심은 그를 괴물로 살게 했고 결국 불구덩이에 타 죽게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당하게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깊고 깊으면 한(恨)이 됩니다. 한(恨)이라는 한자는 신분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마음에 갖게 되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늘 손을 모으고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던 사람의 마음에는 아마 ‘나도 언젠가 저렇게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덕순 집사님은 생선장사를 하면서 오남매를 양육하셨습니다. 그런데 70년대까지 서울역 뒤의 염천교에 수산시장이 있어서 거기서 생선을 떼어 와서 팔았는데, 어느 날 정말 멋진 3층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마음 속에 ‘나도 저렇게 훌륭한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열아홉에 결혼하여 강원도로 갔다가 세 자녀를 낳아 스물일곱 살에 서울 행당동으로 왔는데, 거할 곳이 없어서 남편의 형님네 식구들과 한 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집 옆에 축대를 쌓아서 겨우 방을 마련하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선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마침내 3층집을 짓고 아래 두 층은 세로 내주고 3층에서 널찍하게 살았습니다. 이집사님은 집에 대한 한을 풀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 중에 하나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럽에 스코틀랜드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영국 옆에 있지만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오랜 세월 투쟁을 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가장 위대한 영웅은 윌리엄 월리스(1270~1305)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건져낸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800년 전에 살았던 이 인물을 지금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영화가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 1995년)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 월리스가 영국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월리스는 한 마디를 크게 외칩니다: ‘Freedom!’ 그것은 ‘자유’라는 뜻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이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한(恨)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스코틀랜드는 그들의 선조들이 한으로 여기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도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억눌리고 짓밟힌 세월을 오래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깊은 한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한을 달리 보면 현실 속에서 부족한 것이며 앞으로 이루고 싶은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한(恨)은 소원이며 꿈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취할 때 우리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꿈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사람에게 계시되면 사람은 그 꿈을 소원으로 여기고 삽니다. 그것은 사명이며 자신의 꿈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꿈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이며 그들이 인생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한이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꿈을 받아 어떻게 살았는지를 지난 네 주 동안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어떤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사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오늘 저는 예수님의 한(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한(恨)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사람의 한은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느 시대에 살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소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출생하셨고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의 부모는 출산 후 8일만에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몸에 새긴 표시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에 동참하며 그 언약에 충실할 것을 서약합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는데 아직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를 기른 양부(養父)입니다. 요셉은 목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이 살던 시절에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살았습니다. 속국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그 시절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매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웠습니다. 또한 초승달이 뜨는 초하루가 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조상 대대로 지켜온 절기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세 차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역대하 8:13). 예수님의 가정도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성장 과정, 그리고 나라의 상태와 신앙생활을 보면 예수께서 어떤 소원으로 사셨을까 우리는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네 사람의 저자들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복음서입니다. 그리고 그 저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예수님의 바람과 소원, 그리고 예수님의 한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른살에 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고 그들도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받은 언약이 성취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 제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실 때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19:27~28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들이 얻을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는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상이 바르게 되고 만인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낡고 부패한 세상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세상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이 세상이 열렸다면, 이제 다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입니다. 그 세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이 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미리 약속된 희년(禧年, Jubilee)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눅 4:16~19).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바람과 예수님의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실 때,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을 속이고 사욕을 취하는 지도자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었습니다. 현실의 문제에 사로잡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염려하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 지내면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을 주시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눅 21:34).
예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맡을 새로운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온 세상을 뒤덮을 생명의 숲이 될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을 비출 등불이며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길 잃은 나그네들이 쉴 만한 안식처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별도로 모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이끌어 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또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소망은 온 이스라엘이 깨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에 충실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말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죽이고 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처럼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버리고 그 무리는 와해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면,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온 세계인의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요?
3.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된 비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교회가 어떻게 사방으로 확산되었는지를 소개합니다. 다음 시간에 ‘사도 바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살펴볼 때 사도행전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인의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하는 글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1996)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 1934년생)입니다. 이분은 오랫동안 미국의 워싱턴대학교에서 사회학과 비교종교학을 가르친 교수입니다. 이 책에서 스타크는 1세기 이후 기독교회가 어떻게 급속하게 성장했는지를 분석하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성령이 임하여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세계인의 종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여러 관점이 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 같은 학자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독교가 발흥한 원인을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무엇을 힘써야 하는지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원인이 좋은 교리 때문이 아니라 서로 애착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통일교회는 미국에서 그 독특한 애착관계와 개방된 네트워크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고 합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이것을 보고 종교의 성장 원인이 무엇인지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직접적이고도 친밀한 대인 애착관계라는 구조를 형성하는 종교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천지 같은 이단종파는 일찍부터 이런 점을 파악했는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는 문화적 연속성입니다. 즉, 개종을 하려면 이전에 하던 모든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문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에게 큰 장애물이 됩니다. 바울의 경우에 사방에 전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거나 절기를 지키러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면 그것은 큰 부담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람이 얼마든지 의롭게 된다고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셋째는 초기교회 당시에 로마에 두 차례의 역병이 세상을 휩쓸었는데 그 때 통치자들도 나 몰라라 하는 환자들을 기독교인들이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 일은 로마제국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고 마침내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과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에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도시는 인종과 종교 갈등으로 비참하고 위험한 사회였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의 인권은 무시되어 낙태와 영아사망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 속에서 기독교회는 사회를 응집하게 하는 새로운 규범과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관계를 제시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구제와 희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아오듯이 교회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자신의 책에서 이 외에 좀더 다양한 원인을 제시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 몇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진 공동체였습니까?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어떤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서로 따뜻하고 끈끈하게 연결된 애착관계를 형성합니다. 단지 형제 자매로 부른 것이 아니라 형제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배타성을 버리고 누구든지 포용하고 서로에게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귀하게 여겨지지 않던 여인들과 아이들을 소중히 대함으로 공동체 안의 인구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공동체에게 있는 생명력 넘치는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과거를 돌아보면 서로 돌아보고 함께 친교의 시간을 가지며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뜨거운 기도의 시간을 가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학생들과 청년들, 그리고 장년들도 부흥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30년 전과는 매우 다른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원리는 변함없을 것입니다.
4. 인생의 한은 어떻게 풀어지는가?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골룸 같이 허망한 것을 바라다가 한을 풀려고 불구덩이에 빠지는 비극으로 삶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영웅 월리스처럼 미래에 이루어질 꿈을 꾸며 한을 품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꿈을 꾸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 꿈은 현실에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다고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하나님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꿈꾸셨던 그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 그것은 먼 훗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예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확실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 너무나 확실할 때 과거시제로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 몰래 사고를 친 형제를 만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 왜 이렇게 했어? 너 이제 죽었다!” 아직 부모님께 혼나지 않았지만 이미 부모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혼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새로운 세상이 곧 온다! 내가 만 왕의 왕으로 다스릴 새로운 세상에는 너희도 왕노릇 할 것이다. 이런 믿음과 기대가 교회 공동체에게 원수를 보복하기보다 위하여 기도해 줄 마음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로 용서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이 찾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공동체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갈릴리 시골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지금 온 세상에 충만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며 우리는 바로 예수님이 부르셔서 그렇게 만드실 모델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르침은 중세를 지나오면서 천상의 세계와 지옥의 불구덩이 이야기로 변형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포용적이고 사회를 포용하던 따뜻한 교회는 사람들을 인종과 종교와 교리에 따라 편가르고 따돌리는 편협한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꿈꾸시던 새로운 세상에서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데 이제 죽은 후에 천상에 올라가서 살 세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오고 싶은 피난처가 되지도 못하고 세상에 매력과 희망을 줄 수 없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꿈을 배우고 바라고 행하자!’는 교회의 표어를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어 예수님의 꿈을 배우고 함께 그 꿈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그 꿈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이 꿈꾸시던 새로운 신앙공동체로 자라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