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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급(南伋) - 충경공 직제학공 군수공파 8세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남간(南簡)의 4남 – 남급(南伋)
남급(南伋, ?~?) 조선 전기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寜)이며 군수공(郡守公)파 파조이다. 증조부는 조선개국 1등 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충경(忠景)의 시호를 받은 남재(南在)이시다. 조부는 병조의랑 남경문(南景文)이고, 부친은 예문관직제학 남간(南簡)이며 모친은 운봉 박씨(雲峰 朴氏) 이조판서 충숙공 박신(朴信)의 딸이다. 부인은 개성 왕씨(開城 王氏) 렴(濂)의 딸이다.
남급의 생몰연도는 기록이 없으며 세종실록 기록을 바탕으로 활동 시기는 1410년~14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는 과학자이며 음률에 밝은 음악이론가 이다. 구리, 아연, 주석, 납, 철등 합금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범(范), 주형(鑄型), 틀]에 부어 각종 금속 주물(鑄物)을 제작하는 주조술(鑄造術)의 장인이었다. 이 같은 주조(鑄造) 기술로1418년(세종즉위년)에 제용 부정(濟用副正)으로 제기(祭器) 주조를 감독하여 말(馬)을 하사 받았다. 1420년(세종 2년)에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조선시대 두 번째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제작하였으며 활자제조 및 인쇄분야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낸 명실공히 기기 제작 분야의 실무 전문가였다. 십 수년간의 연구 끝에 새로운 자판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활자주조술과 활판법을 혁신시켰다.
1424년(세종6년)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어 조선통보 주화제작을 위해 경기(京畿) 양근군(楊根郡)의 주전소(鑄錢所)를 감독하였고 1429년(세종11년)에는 마포 주종소[鑄鐘所]에서 편종제작에 필요한 주조법, 조율, 표지 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편종을 만들었다.
1430년(세종12년) 악학별좌(樂學別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며 조회에서 사용할 악기(樂器)와 헌가(軒架)를 만들었으며 1431년(세종13년) 새로 만든 회례 악기(會禮樂器)를 올리었다. 1433년(세종15년) 임금이 근정전에서 회례연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을 사용하다. 조회(朝會)의 악경(樂磬)을 남양에서 만들고, 조제(朝祭)의 악종(樂鍾)을 한강에서 만들었는데, 연(堧)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또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버금으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헌가(軒架) 아악(雅樂) 및 무동(舞童)의 기예(技藝)를 쓰고, 여악(女樂)을 쓰지 않으며, 이웃나라 사객(使客)의 연회에도 여악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이른다. 그 해 전 판사(判事)로 임명되었고 말을 하사 받았다. 1438년(세종20년) 전 판사(判事)로 재직 시 마을의 온정(溫井) 조사를 어렵게 하였다는 일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았으나 온천은 단지 풍문으로 끝났다.
사대부화(士大夫畵)로 선서화(善書畵)에 글과 그림을 즐겼으며 특히 산수초가(山水梢佳)에 능하였다.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냈으며 사후 가선대부로 추증되었다.
지금의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의 지명에서 오류동(梧柳洞)은 의령 남씨(宜寧 南氏) 세거지로 조선 초기부터 오리울(梧柳洞)에 집단 거주하여 대성씨를 이뤘는데 지금도 몇 호가 살고 있다. 의령 남씨 가운데는 세종 때 주전소(鑄錢所)를 감독하고 박연(朴堧)과 함께 악기를 제작한 과학자인 대호군 남급(南汲) 장군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전해온다.
묘소는 1986년 순천군 순천읍 월계리 남암촌 손좌합장 하였다.
◆ 남급(南伋)의 가계도 - 충경공 직제학공 군수공파 8세
재(在) 충경공 | 5세 | |||||
경문(景文) 의랑공 | 6세 | |||||
휘(暉) 의산위공 | 간(簡) 직제학공 | 지(智) 충간공 | 7세 | |||
급(伋) | 충의위 (忠義衛) 건(健) | 척(倜) 홍주목사 | 준(俊) 감찰 | 8세 | ||
군수공파 | 호군공파 | 목사공파 | 감찰공파 | 파 |
◼ 증조부 : 남재(南在, 1351년~1419년)-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 조부 : 남경문 (南景文, 1370년~1395년/1403년) - 병조의랑, 영의정부사에 추증
◼ 조모 :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 方氏) 방순(方恂)의 딸,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參議) 고려의 문신, 호 만송당(晩松堂)
◇ 부 : 남간(南簡) 1400년 ~ 1440년 예문관직제학
◇ 모 : 운봉 박씨(雲峰 朴氏) 이조판서 충숙공 박신(朴信)의 딸
◼ 장남 : 남준(南俊) : 감찰
◼ 차남 : 남척(南倜) : 홍주목사, 상호군
◼ 3남 : 남건(南建) 충의위(忠義衛), 호군
◼ 4남 : 남급(南伋) : 군수
◼ 부인 : 개성왕씨(開城王氏) 렴(濂)의 딸
- 장남 : 남협(南拹) : 찰방
손자 : 남인(南訒) : 진사
- 1녀 : 경주이씨 이종신(李種信)에게 출가
▶ 경자자(庚子字) - 남급(南伋)
경자자(庚子字)는 조선시대에 주조된 금속활자 중 계미자(癸未字)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활자이다. 1403년(태종 3)에 태종은 서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고 조선시대 최초의 활자인 계미자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수개월에 걸쳐 계미자 수십만 자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계미자는 활자 모양이 정교하지 못했고, 활자를 구리판에 배열한 후에 가열한 황랍(黃蠟)을 부어서 단단히 굳으면 먹을 칠해 찍어 냈기 때문에 밀랍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활자가 쉽게 흔들려서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종이의 양이 두어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1420년(세종 2년) 11월 세종은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伋)에게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활자와 구리판을 주조하도록 명하였고, 지신사(知申事)김익정(金益精)과 좌대언(左代言)정초(鄭招) 등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여 약 7개월의 공역을 거쳐 활자를 완성하였다. 주조기술과 조판기술이 계미자에 비해 개선되기는 했지만, 인출할 수 있는 양이 20여 장에 불과했고 글자가 작아 열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활자를 사용해서 찍은 인본(印本)을 경자자본(庚子字本)이라고 칭한다. 1403년 계미자(癸未字)를 시작으로 경자자(1420)·갑인자(1434)·병진자(丙辰字, 1436)·경오자(庚午字, 1450)·을해자(乙亥字, 1455)·정축자(丁丑字, 1457)·을유자(乙酉字, 1465)·갑진자(甲辰字, 1484)·계축자(癸丑字, 1493)·병자자(丙子字, 1516)·경진자(庚辰字, 1580)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자가 전해진다.
갑인자 추정 고활자 <인사동 97번지 출토, 국가유산청 자료>
■ 사학지남(辭學指南)의 주자발문(鑄字跋文)에 기록된 - 남급(南伋)
2024년 8월에 한국국학진흥원의 기사를 발취한 부분으로
「 조선 초기 금속활자로 찍은‘사학지남(辭學指南)’을 국가유산에 지정되도록 신청할 계획이라고 7일 밝혔다.
사학지남은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편찬한 것으로 글 짓는 방법과 사례를 정리해 과거에 대비하게 한 지침서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해 1420년(경자년)에 만들어진 두 번째 활자인 경자자(庚子字)로 인출한 것이다.
경자자본‘사학지남’일부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책의 끝에는 이천(李蕆)과 남급(南汲)이 담당하고 김익정(金益精)과 정초(鄭招)가 감독 업무를 관장해 활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주자사실(鑄字事實)을 기록한 주자발문(鑄字跋文)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세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 주조됐던 조선 초기 활자 인쇄술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
그리고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두었다.
▶ 편종(編鐘) - 남급(南伋)
편종(編鐘)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宋)나라로부터 들어온 아악기이다. 편종과 편경의 제작은 오직 중국에 의존하였었는데 세종조에 이르러 우리 기술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편종은, 크기는 같으나 두께가 달라 음높이가 다른 종 열여섯 개를 나무틀인 가자(架子)에 매단 악기이다. 오른손으로 쇠뿔 망치인 각퇴(角槌)를 잡고 종의 아래쪽에 둥글게 표시된 수(隧)부분을 쳐서 연주한다.
<『세종실록』 편종: 종이 12개로 구성된 편종을 중성 편종이라 하는데『세종실록』「오례」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 > - 좌측
< 『악학궤범』의 편종: 종이 16개로 구성된 편종을 정성 편종이라 하는데 『악학궤범』에 관련 내용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오늘날에도 이를 토대로 악기를 제작한다. 국립국악원> - 우측
편종은 1429년(세종 11) 2월부터 한강에 주종소(鑄鍾所)를 두어 본격적으로 편종을 만들게 되어 필요에 따라 우리의 기술로 제작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편종을 주조하는 데에는, 종의 음률이 크기에 따라 달라지게 하는 방법, 두께에 따라 달라지도록 옛 제도를 따르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채택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종 아래편 정면에 둥근 수형의 표시 즉, 수라 일컫는 종의 타격 부위를 고안하였다. 종은 치는 부위에 따라 다른 음을 낼 수 있으므로 악사들이 악기의 다른 곳을 쳐서 음이 맞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430년(세종 12) 7월에는 가자를 꾸미는 동물 장식을 진양의 『악서』에 의거하여 아악용에는 범, 속악용에는 사자(獅子)의 형상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옛 제도를 바탕으로 하면서 보완의 과정을 거치며 악기가 완성되었다. 편종을 만드는 제도는 대부분 1429년(세종 11) 박연(朴堧, 1378~1458)의 건의로 확정되었고, 그 이후에 주조된 편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박연과 함께 종의 제작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급(南伋, ?~?)을 들 수 있다. 남급은 원래 주자소(鑄字所)에서 구리판을 주조하고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여 감독하던 인물이었는데 금속제조에 정통(精通)하여 악기 제작에 참여하였다.
궁중 연향악기 - 편종
이후 편종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은 몇 차례 있으나 세종조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연과 남급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구리와 주석을 배합하는 기술을 보완한 결과 맑은 음색을 갖추게 되었고 정교하게 조율하여 기존의 중국 편종보다 음률이 잘 맞는 악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자주적인 기술로 아악기 제작을 완성함으로써 국가의 품격과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 세종실록의 기록 - 남급(南伋)
• 1418년(세종즉위년) 제기(祭器) 주조(鑄造)를 마친 감독관 공조참판 이천(李蕆)과 제용부정(濟用副正) 남급(南伋)에게 내사복 말[內廐馬] 각 한 필씩 하사 받았다.
■ 1421년(세종3년) 주자소(鑄字所)에 술 1백 20병을 내려 주었다. 이전에는 책을 찍는데 글자를 구리판[銅板]에 벌여 놓고 황랍(黃蠟)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이를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 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지휘하여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해정(楷正)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 장을 찍어 낼 수 있다. 임금은 그들의 일하는 수고를 생각하여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찍어 내라고 명령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그 잘못된 곳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경자년(1420) 겨울부터 임인년(1422) 겨울에 이르러 일을 끝냈다.
- 1423년(세종5년) 정양과 남급의 노력에 힘입어 금, 슬, 대쟁, 생, 봉소 등이 악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에는 화, 우, 피리, 훈,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도 완성되었다. 한데 이들 악기의 기본음이 통일되지 않아 소리가 어색했다.
■ 1424년(세종6년) 경상·전라도에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고 별감(別監)을 나누어 보내어 그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전(前) 봉례랑(前奉禮郞) 강속(姜涑)은 경상좌도에, 행 호군(行護軍) 백환(白環)은 경상우도에, 호군(護軍) 이온(李韞)은 전라도에 보냈다. 앞서 경기(京畿) 양근군(楊根郡)에 일찍이 주전소를 설치하고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시켜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제 백환이 상서(上書)한 데 따라 2도에 더 설치하기로 하여 돈 만들기를 넓히게 된 것이니, 남급과 백환이 기예로서 이름을 드러낸 사람이었다. 앞서 임금이 경상좌·우도에 나누어 주전소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일을 볼만한 사람이 없어서 어렵다.
- 1429년(세종11년)에는 마포 주종소[鑄鐘所]에서 편종 제작에 필요한 주조법, 조율, 표지 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편종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은 박연 외에도 남급, 정양, 장영실 등도 악기 제작에 참여하여 성과를 내게 하였다.
■ 1430년(세종12년) 악학 별좌(樂學別坐) 상호군(上護軍) 남급(南汲)이 조회에서 사용할 악기(樂器)와 헌가(軒架)를 만들어 바쳤다.
■ 1431년(세종13년) 1월 21일 상호군(上護軍) 남급(南汲)·대호군(大護軍) 박연(朴堧)·경시 주부(京市注簿) 정양(鄭穰) 등에게는 안장 갖춘 말을 하사 받았다.
• 1431년(세종13년) 6월 15일 상호군(上護軍) 남급(南伋)·대호군 박연(朴堧)·군기 판관(軍器判官) 정양(鄭穰) 등이 새로 만든 회례 악기(會禮樂器)를 올리었다.
■ 1433년(세종15년) 임금이 근정전에서 회례연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을 사용하다. 조회(朝會)의 악경(樂磬)을 남양에서 만들고, 조제(朝祭)의 악종(樂鍾)을 한강에서 만들었는데, 연(堧)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또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버금으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헌가(軒架) 아악(雅樂) 및 무동(舞童)의 기예(技藝)를 쓰고, 여악(女樂)을 쓰지 않으며, 이웃나라 사객(使客)의 연회에도 여악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이른다.
■ 1433년(세종15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유사눌(柳思訥)과 상호군(上護軍) 박연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전 판서 김자지(金自知)와 전 판사(判事) 남급(南汲)에게 말을 하사 하였다.
■ 1438년(세종20년) 사재감 부정 이사맹이 온정(溫井)을 조사하기 어렵다하여 의금부에 명령하여 전 판사(判事) 남급(南汲)과 향리(鄕吏) 김우(金雨) 등 5인을 국문하게 하였다.
■ 1467년(세조13년) 경기(京畿) 부평부(富平府) 굴점리(崛岾里)의 고(故) 판사(判事) 남급(南汲)의 집에 온천(溫泉)이 있다고 고(告)한 자가 있었으므로,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와 우의정 황수신(黃守身)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의령남씨 충경공 직제학공 호군공파 남급(南伋) 선조의 기록을 세종실록에서 찾아보면, 남급(급 : 汲-길다), 남급(급 : 伋-속다)의 이름의 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한자의 표기로 여러차례 나타난다. 기록순서로 확인해보면 한자만 다른뿐 같은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그 시기 기록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과는 정확히 일치한다. 공조참판 이천(李蕆), 대호군 박연(朴堧), 군기판관(軍器判官) 정양(鄭穰)들과 함께 기록되어있다. 시대와 본을 달리한 또 다른 남급의 기록도 있으나 의령남씨 남급(南伋)의 기록과는 다른 인물이다. 이와 같은 판단이 오판일수 있으나 연결고리가 거의 일치하여 조심스럽게 글을 작성해본다. 추후 새로운 선조의 자료를 발굴하면 다시 원고를 수정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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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세종실록
세조실록
용채총화
국악사전
국가유산청
한국국학진흥원
인천시 계양구청
위키조선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