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만에 동네 친구들 모임을 갖을 거라 연락이 와서
처가 교회 가는 길에 차로 태워다 주고
공주로 향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 먼저 동네 여기저기 산을 찾아 조상들 묘역을 다녀봤다
수촌공 묘역
증조 할아버지 묘역
진사공 묘역 등을 돌아보니 약속 시간이 되어 상서리 식당으로 향했다
모임을 갖고 헤어진 후 다시 동네의 여러 다른 묘역을 찾았다
유수공 묘역
용호공 묘역
구사공 묘역
동암공 묘역
다시 가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궝말의
전주공 묘역
궝말 산 능선을 넘어 단평으로 가니 동래정씨 묘역도 있다
동창 정상용이네 조상들인 것 같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면 조선시대 좌의정까지 역임했던 정지화의 묘가 있다
정지화(鄭知和)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이다. 어머니는 돈녕부도정 민유경(閔有慶)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는 4촌간이다.
상용이네 조상으로 상용이네에서 시제를 모신다고 하는데 올해는 벌초관리가 덜 된 듯 싶다
정지화는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정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637년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있으면서 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 초 원주목사로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승지·대사간 등을 거쳤다. 한편, 외직으로 전라도·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 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기도 하였다.
약 1년 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했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할아버지 정창연 때까지만 보면 우리 집안하고 잘 지냈다 그런데 그 이후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갈라서면서 이렇게 같은 마을에 정적과의 동침으로 누워있는 형세이다
하긴 정재희 같은 경우는 수촌공 오시수를 구하려 무던히도 애쓴 모습도 있다 이들은 그렇게 서인 소론으로 이어온다
당대 서인이란 주류에 있어서인지 우리쪽 석물과는 다르게 비석이나 문인석 등이 섬세하고도 정교하게 잘 조각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상흔인지 정치적 싸움의 상흔인지 비석 곳곳에 상처가 심하다
남구만 서, 박세채 찬으로 되어 있다
동네를 돌아보고 천안으로 오르는 길 신풍을 거쳐 유구 길로 선택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어 신풍 동원 2리에 있는 저암공 묘역도 다시 들렀다
동원2리 불광사 표지판이 있는 농로길을 따라 올라가면 맨 끝에 또다른 절이 있다
그 절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오른쪽 산으로 300여미터 오르면 저암공 묘역이 나타난다
평생을 경신사화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수촌공 오시수를 그리워하며 그 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덤곁에서 모시다 쓸쓸히 세상을 하직한 저암공 오상유
21살 이른 나이에도 대과에 합격한 당대 수재 중 수재였지만 경신사화로 두 부모와 숙부들, 세상의 붙임 등 모든 것을 잃고 그 한으로 이 궁벽한 공주 시골 궁촌에서 살다간 파란 많고 한 많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품성대로 그 누구도 찾기 힘든 이 자리에서 조용히 영면하고 있다
그런 그의 삶이기에 그의 시에 녹아있는 한의 감정, 설움의 정서는 그를 아는 이가 읽으면 한과 슬픔으로 덧난 우리네 민중의 상처를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묘 옆에 있는 동자석의 표정에서도 그런 그의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
우연하게도
그런 인간세상의 비정함과 번뇌의 고통, 통곡의 한을 씻어주는 역할을 할 매체가 역시 묘역에서 내려오면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절 이름은 모르겠는데 지난 번 왔을 때 보다 규모는 커진 것 같은데 한층 쓸쓸하다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조성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하게 되어 있다.
서해로 이미 기울어진 빛이 마지막 발광을 쏟아내고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주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후불탱화로는 주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가 봉안되는데, 극락정토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도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묘사한 극락구품탱(極樂九品幀)과 아미타탱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법당의 내부구조도 극락정토왕생신앙이 강했던 만큼 대웅전에 버금가는 화려함을 보이고 있다. 화문(花文)과 비천(飛天)으로 장식하는 불단을 비롯하여, 주불 위에는 닫집인 천개(天蓋)를 만들고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나 극락으로 인도하는 극락조 등을 조각하여 장식하기도 한다.
비록 얼어붙어있지만 저암공이 그토록 좋아하던 연못도 조성되어 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동원1리 쪽으로 가면 동원리 탑이 남아 있다
공주 신풍 동원리 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1층과 2층 옥신의 체감률은 급속히 떨어져 균형을 이루지 못하나 상당히 정제된 석탑으로 기단부와 옥개석이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다.
그렇게 저암공의 이세상에서의 삶이 고통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한에 싸인채 설움의 세상을 살다 그것을 풀고 가지 못했지만 저승에서는 극락왕생의 복이 꼭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빌고 천안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