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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단편소설]
쌍무지개
이광복
우리 부모님은 10남매를 낳아 셋을 잃고 7남매를 키웠다. 산아 제한이니 가족계획이니 핵가족이니 1인가구니 인구 절벽이니 인구 소멸이니 뭐니 그런 낱말 자체가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작은누님과 나 사이의 3남매가 갓난아기 때 사망했다. 이에 따라 작은누님과 내 나이 차이가 무려 아홉 살 터울로 훌쩍 건너뛰었다. 나는 7남매 중 통산 셋째였고, 내 밑으로 4남매가 있었다. 아들만으로 따지면 장남이었다. 큰집으로 출계한 이후에는 (큰)아버지의 종통을 계승하면서 한산이문(韓山李門)의 한 지파를 대표하는 7대 종손으로 자리매김했다.
작은누님과 나는 양가에서 자랐지만, 종종 친가에 가서 애꿎은 식량을 축내곤 했다. 양가와 친가 사이에는 그 무슨 경계나 허물이 없었다. 두 집의 부모님이 똑같은 부모님이듯 양가와 친가가 모두 ‘우리 집’이었다. 도랑에 든 소라면 양다리를 걸치고 왼쪽 언덕, 오른쪽 언덕 풀을 곱빼기로 뜯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가와 친가가 모두 빈한해서 뜯어먹고 자시고 할 풀이 없었다.
우리는 영세민이었다. 내가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 들어가던 해 큰누님이 공주군(지금의 공주시) 이인면으로 출가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둘째누님은 당초 충북 중원군(훗날 충주시로 통합) 주덕면으로 시집갔지만, 매형이 철도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되자 향리를 떠나 경기도 군포를 거쳐 수원으로 솔가했다. 누님들이 순차적으로 혼인하여 멀리 떠나갈 때 어린 나는 이별이 슬퍼서 엉엉 울었다.
내가 큰집으로 입후한 이래 친가에서 세 살 또는 두 살 터울로 남동생 차복, 여동생 옥희, 남동생 선복과 막내 남동생 계복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차복은 1954년생, 옥희는 1957년생, 선복은 1959년생, 계복은 1961년생이었다. 머리 좋고 착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동생들. 그들은 누님들처럼 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손색이 없을 만큼 자랑스러운 동기간이었다. 간혹 연세 많으신 누님들이 친정에 오면 이만저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 7남매의 이름은 모두 (큰)아버지께서 지었다. 그 어른의 최종 학력은 석성보통학교(지금의 석성초등학교) 중퇴로 끝났지만, 어쨌든 네 분 부모님 중에서 유일하게 학교 문턱을 밟아보신 분이었다.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찍부터 당신으로부터 한글과 천자문과 각종 예절을 배웠고, 당신께서는 갓 한글을 깨친 어린 내게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 『삼국지』 『유충렬전』 『장국진전』 등 얘기책 읽는 요령까지 일깨워 주었다.
1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음력으로 섣달 초순이었다. 해동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겨울 날씨 치고는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날이었다. 며칠 전에는 무시무시한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더니 그날따라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솔밭 사이에서 잔설이 추적추적 녹고 있었다. 나는 양지 바른 말랭이에서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두어 시간 연을 날렸다. 그러다가 얼른 연을 내 방에 갖다 두고는 굴렁쇠를 굴리며 친가로 내려갔다.
마침 아버지는 뒷간에서 분뇨를 푸고 있었다. 당신은 날씨가 잠깐 풀린 틈을 타서 변소 치우기에 나선 것이었다. 아버지는 똥바가지로 똥독의 인분을 퍼서 양동이 모양의 헌털뱅이 똥통에 옮겨 담고 있었다. 당신은 완벽한 성품 그대로 분뇨 한 방울 허투루 흘리지 않은 채 두 개의 똥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부지, 안녕하셨어유?”
“그려. 어서 오너라. 잘 지냈냐?”
“야.”
‘야’는 ‘예’를 일컫는 우리 고장 말이었다. 어머니는 뒤꼍 장독대의 장독들을 물행주와 마른행주로 번갈아가며 씻어내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옹기에 스며드는 따스한 햇볕. 차복과 옥희는 어머니 곁에서 얌전하게 놀고 있었다. 아직은 선복과 계복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사랑방 앞 추녀 안쪽 서까래에는 무시래기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아이구, 우리 윤복이 왔네. 즘심은 먹었냐?”
‘즘심’은 ‘점심’을 일컫는 말이었다. 양가도 그렇고 친가도 그렇고 우리는 늘 식량난에 허덕였다. 보릿고개에는 굶는 날도 많았다. 먹는 게 먹는 것이 아니었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씀에 가슴이 아릿아릿 아려왔다. 당신께서는 내가 윗집에서 점심을 굶었을까 봐 그렇게 물으신 것이었다. 내가 공손히 대답했다.
“야.”
“뭐 먹었어?”
“수제비 먹었슈.”
“수제비? 쯧쯧… 얼마나 배고플까.”
“괜찮어유.”
그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내 뱃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피라미 여울 넘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직 이것저것 철모르는, 갓 젖 뗀 어린것을 곤궁하기 짝이 없는 큰집으로 떠나보낸 친가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은 피맺힌 철천지한으로 썩어 문드러지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효자가 되어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불효자. 그렇건만 당신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1년 365일 하루도 변함없이 나를 끔찍이도 아껴 주었다. 나는 팥 바구니에 쥐 드나들 듯 친가에 자주 들락거렸다.
아버지가 똥지게를 진 채 뒷간을 벗어나 사립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똥지게 좌우 끄트머리 갈고리에는 묵직한 똥통이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똥물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양쪽 어깨의 균형을 수평으로 맞추면서 가만가만 발자국을 떼어놓고 있었다. 당신께서 볏짚 똬리를 틀어 똥통 똥물 표면에 살짝 얹어 놓았던 터라 똥물은 잘람잘람하면서도 전혀 밖으로 튀지 않았다.
구린내가 푸짐했다. 거름이라 생각하면 향기였고, 분변이라 생각하면 악취였다. 우물 쪽에서 샛길로 들어오다가 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친, 별쭝맞은 사고뭉치로 악명 높은 치범이가 지독한 구린내에 놀라 코를 감싸 쥐고는 재빨리 뒤돌아서서 벌 쐰 강아지처럼 후다닥 달아났다. 똥줄이 빠지게 도망치는 그 녀석이야말로 경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윤복아. 너는 쟤처럼 분뇨, 다른 말로 똥오줌을 드럽게 생각하믄 안 된다. 어른 앞에서 저렇게 자발머리웂이 오두방정을 떨어서두 안 되구… 어느 누구래두 지 몸에서 나온 똥오줌을 지 입으로 도로 먹지 않구서는 살 수가 웂는 겨. 사람이라면 적어도 3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지 똥오줌을 되받아 먹는 벱이란다. 치범이 저 녀석도 결국은 지 똥오줌을 먹고 자라는 놈이여.”
어머니는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그래서 낫 놓고 ‘ㄱ’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구한테 어떻게 얻어 들었는지 ‘분뇨’라는 어려운 한자어를 썼다. 그러고는 내게 다소 어렵게 느껴질까 봐 얼른 ‘똥오줌’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천자문을 뗀 데다 얘기책, 즉 고전 소설까지 여러 권 읽어 웬만한 어휘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당신의 말씀 중 ‘드럽게’는 ‘더럽게’라는 뜻이고 ‘지’는 ‘제’를 가리키는 것이며 ‘벱’은 ‘법’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자기 오줌똥을 자기가 도로 먹는다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그날 변소에 가득했던 분뇨를 시루봉 너머 뙈기밭으로 짊어져 날라다가 뿌렸다. 밭에서는 보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어느 정도 철 든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씀에는 깊은 사상과 철학과 교훈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께서는 자연의 순환 원리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분뇨가 논밭에 들어가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을 먹고 자란 농산물이 식품으로 탈바꿈되면, 결과적으로 되받아 먹게 된다는 뜻이었다. 거기에는 인과응보의 철리까지 함축돼 있었다.
좌우간 어머니의 두뇌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일례를 들면 10년이나 20년 전에 딱 한 번 마주친 사람일지라도 언제 어디에서 처음 대면했는지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이웃집 제삿날과 주민들 생년월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누구네 강아지 태어난 날까지 줄줄이 꿰뚫고 있었다. 당신은 뭔가 한 번 보고 들었다 하면 그걸 놓치지 않고 당신의 지식과 정보로 육화시켰다.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천재 중의 천재였다.
신기했다. 나는 비록 배고픔에 허덕일지라도 공부에 열중했고, 국민학교에 들어간 이후 시험만 봤다 하면 거의 만점을 기록했다. 내 사전에는 결석이나 지각이나 조퇴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료들 중에는 등굣길에 슬쩍 샛길로 빠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심한 녀석들이었다.
나는 줄곧 ‘공부 왕’으로 선두를 달리면서 학년말에 우등상과 개근상을 수상했다. 부상도 받았다. 생활 통지표에는 수·우·미·양·가 5단계 중 대부분의 과목이 ‘수’ 일색인데 딱 하나 ‘보건’ 과목에서만 ‘우’로 평가돼 있었다. 학교에서 상장과 상품과 생활 통지표를 받아 가지고 귀가했을 때 (큰)아버지 내외분께서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얘야, 증말 장하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우등상에다 개근상이라니… 네 뒤를 힘껏 밀어주지 못하는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하구나.”
‘증말’은 ‘정말’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당신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큰)어머니 또한 소매 끝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나는 상장과 부상과 생활 통지표를 들고 친가로 가서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보여드렸다. 당신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면서도 우등상과 개근상과 생활 통지표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간파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구, 우리 윤복이가 큰일을 해냈구나. 참 잘 했다. 본래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느니라.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재목이닝께 이 에미 말을 잘 듣거라. 요번에 성적이 잘 나왔다고 괜히 자만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기 바란다. 모름지기 천재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겨. 그 대신 바보나 숙맥은 손에 쥐어줘도 뭐가 뭔지 모르는 벱이여. 너는 홉글 배워 됫글로 풀고 됫글 배워 말글로 풀고 말글 배워 섬글로 푸는 사람이 되거라. 아무쪼록 일취월장하기 바란다.”
당신의 언변은 변사 뺨치고도 남을 만큼 절륜했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곧 청산유수였다. 비유든 은유든 속담이든 격언이든 뭐든 거칠 것이 없었다. 화법과 화술이 화환처럼 화려했다. 지난번에는 ‘분뇨’라는 단어를 쓰시더니 이번에는 ‘인물’ ‘재목’ ‘성적’ ‘자만’ ‘노력’ ‘천재’ ‘일취월장’처럼 대체로 식자층에서 선호하는 고상한 문자들을 막힘없이 구사했다.
문맹자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땅띔조차 할 수 없는 고품격 표현들. 어머니는 평소 과묵했지만,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실타래에서 실 풀어내듯 일사천리 사통오달 천의무봉으로 당대 최고의 명언을 술술 쏟아냈다. 그러면서 그 어떤 지식인 못지않게 난해하고 차원 높은 어휘들까지 총망라하여 적재적소에 적확하게 꽂아 넣었다. 충청도 사투리만 아니라면 언어 역량이 웬만한 전문 아나운서를 능가했다. 지금쯤 ‘우리말 겨루기’ 같은 국어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당연히 장원을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홉글 됫글 말글 섬글은 십진법을 좇아 학업의 부가 가치를 극대화하라는 말씀이었다. 한 홉[合]만큼 배우면 한 되[升]만큼 깨치고, 한 되만큼 배우면 한 말[斗]만큼 깨닫고, 한 말만큼 배우면 한 섬[石]만큼 터득하라는 당부였다. 달리 말하자면 한 가지를 배워 열 가지 이상으로 확대 재생산하라는 뜻이었다. 우리 사회의 도량형(度量衡)이 척관법에서 미터법으로 바뀐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최고 학부까지 나왔으면서도 동서남북조차 못 가리는 얼뻘뻘한 바보 멍청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홉글 배워 됫글로 푸는 것이 아닌, 그와는 정반대로 섬글 배워 말글은커녕 됫글이나 홉글로도 못 푸는 얼치기들이었다. 개뿔도 모르는 그런 무지렁이 깡통 졸부들이 코 묻은 돈 몇 푼 손에 쥐었답시고 오만방자하게 까불며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 반면 어머니는 학벌이 없으면서도 말글이나 섬글 이상의 탁월한 학식으로 세인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학력과 관계없이 식견이 높았고, 설사 견문이 넓지 못했을지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광대했다. 무엇이든 어머니에게 여쭤보면 척척 정답이 나왔다. 나는 당신을 통해 학벌과 학식이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철칙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때 나는 친가에서 호박씨를 까먹다가 시래기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동생들까지 여러 식구가 북적북적해서 그런지 윗집에서 단출하게 깨지락깨지락 수제비를 먹을 때보다는 훨씬 더 착착 입맛이 당겼다. 밖에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초저녁에 일찍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 한 채에 온 식구가 몸을 들이민 채 윗목 쪽으로 머리만 나란히 내놓고 있었다. 방바닥이 따끈따끈해서 참 좋았다. 시루봉으로부터 부엉부엉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윗집에서 (큰)아버지 내외분이 나를 기다리겠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당신들께서 몸소 찾으러 오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전부터 나는 종종 친가에서 숙식했고, (큰)아버지 내외분들께서도 응당 그러려니 용인해 주었다. 최종적으로 어머니가 입으로 후, 하고 불어 석유 등잔 호롱불을 끈 뒤 아버지 곁에 누웠다. 나는 동생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이내 깊은 잠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이튿날 새벽이었다. 이가 들끓는 통에 온몸이 근질근질 군시러웠다. 나는 잠결에 속옷 솔기를 손으로 살살 더듬어 이를 잡았다. 보리알만 한 이가 손끝에 걸리면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톡톡 눌러 죽였다. 부모님이나 동생들이 잠을 깰까 봐 무척 조심하면서 잇따라 이를 서너 마리나 잡아 터뜨렸다. 그때쯤 해서는 방구들이 식어 밑자리가 점점 더 썰렁해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뒤꼍 장독대 쪽에서 달그락, 돌바닥에 사기그릇 맞닿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궁시렁 궁시렁 뭐라 주문 외우는 독백이 이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뒷문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캄캄한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천지신명님, 대자대비 부처님, 저희 대주와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머니는 똑같은 주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닭장에서 꼬끼오 꼬끼오 닭이 울었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우물에 가서 아직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은 정화수를 떠다가 사기대접에 가득 담아 장독대 판판한 돌바닥에 올려놓고는 무엇을 그렇게도 잘못했는지 두 손을 싹싹 빌며 치성을 드렸다. 하얀 대접 안쪽 밑바닥 한가운데 ‘福’ 자 청화 명문이 들어가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구월심으로 가족의 안녕을 발원했던 어머니. 본래 당신은 조실부모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뿔뿔이 흩어졌던 천애고아 3남매 중 막내였다. 어머니 위로 언니와 오라버니가 계셨다. 타관 객지 남의 집 부엌데기가 되어 알뜰한 살림꾼으로 성장한 당신께서는 천생연분이신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고 우리 동기간을 낳으신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날씨가 확 풀려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고, 복숭아나무에도 망울망울 꽃망울이 부풀고 있었다. 양달이냐 응달이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느릅나무에 뾰족뾰족 새움이 트는가 하면 수숫대로 엮어 만든 울타리 틈새에는 쑥과 몇몇 가녀린 잡풀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느 날이던가 하루는 아버지가 돼지우리 앞 수채와 잇닿은 빨랫돌 옆에 화덕을 놓고 쭈글쭈글 우그러진 대형 양은솥을 걸었다. 구장(지금의 이장) 집에서 빌려온, 음식 장만과는 상관없이 허드렛물을 끓이거나 빨래를 삶을 때 요긴하게 쓰는 허름한 솥이었다. 어머니는 솥에 양잿물을 넣고 겨우내 빨지 못했던 옷가지와 이불 호청 따위를 가득 담아 소 뼈다귀나 돼지 뼈다귀 삶듯이 푹푹 삶았다. 화덕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차복과 옥희가 화덕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타일렀다. 장작불과 양잿물이 모두 다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동생들이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끔 철저히 경계했다. 어머니가 빨래를 삶는 동안 나는 보초를 섰고, 동생들은 어머니와 내 말을 잘 따라 화덕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꿀꿀거리고 있었다. 배고픈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돼지우리 쪽으로 다가가 쌀뜨물 한 바가지에 보릿겨 한줌을 풀어 구유에 부었다. 그러자 돼지는 두 말 않고 푸우푸우 거친 숨을 내쉬며 그걸 열심히 먹어대고 있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고픈 데에는 밥이 최고의 약이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점점 사그라지는 장작불을 껐다. 빨래가 삶아질 만큼 삶아진 것이었다. 우리 집에는 이럴 때 사용하는 집게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는 솥에 들어 있는 삶은 빨래를 부지깽이로 주섬주섬 건져 올려 밤색 플라스틱 함지박으로 옮겼다. 솥에서는 아직도 세탁물에서 우러나온 누리끼리하면서도 칙칙한 땟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당신은 곧 솥에 찬물을 철렁하게 가득 채운 뒤 빨래방망이로 휘휘 저어 폐수의 온도와 농도를 조절했다. 내 눈에는 그 장면이 잘 이해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버릴 물까지 소중히 다루는 어머니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엄니, 구정물에 왜 찬물을 붓고 그렇게 휘저어유?”
“어서 식으라구 그러지. 이렇게 저으면 양잿물 성분도 좀 묽어지구 좋잖어?”
어머니의 입에서 ‘성분’이라는, 이른바 전문 용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을 때 나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어머니의 일거리는 빨래를 삶아냈다고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물을 식히고 양잿물 성분을 희석시키기 위해 그런 별도의 수고를 거치는 것이었다. 내가 또 물었다.
“구정물을 수채에 그냥 확 쏟아버리면 되잖어유?”
“그러믄 안 되는 거여.”
“왜유?”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믄 지렁이란 놈 눈이 멀어. 수채에는 지렁이가 많이 살응께 조심해야지. 양잿물 독성이 그대로 흘러나가믄 땅속에 사는 작은 벌레들과 땅강아지들이 죽을 수도 있잖냐. 부처님 말씀에 살생하지 말라고 했는디 그 아까운 목숨을 해치믄 되겄어? 안 그려?”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수채에 서식하는 지렁이와 땅속의 다른 생명체들이 죽거나 다칠까 봐 빨래 삶은 물의 열기와 양잿물의 독기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감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이와 빈대와 모기 등속의 물것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인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짓인지 간단없이 헷갈렸다.
어머니는 솥에서 건져낸, 플라스틱 함지박에 가득 담긴 빨래들을 깨끗한 물로 재차 빨고 잘 헹궈서 빨랫줄에 널었다. 그러고 나서 완전히 식어버린 오수를 수채 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훈풍에 바지랑대를 중심으로 주욱 길게 매달린 빨래들이 학교 운동회 날의 만국기처럼 기분 좋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한편, 내 유년 시절 우리 동네에는 여기저기 여러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윗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 말랭이 너머 길가 언덕에 있는 감나무, 신작로 옆 잿무덤부리에 있는 감나무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주민들은 보통 윗집 감나무를 윗감나무, 길가 언덕 감나무를 가운뎃감나무, 잿무덤부리 감나무를 아랫감나무라 불렀다.
수령으로 말하자면 윗감나무가 단연 최고였고, 그 다음은 아랫감나무와 가운뎃감나무 순이었다. 윗감나무가 노년이라면 아랫감나무는 장년이요 가운뎃감나무는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시루봉과 질빵너머와 잿무덤부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네 일대는 뺑뺑 돌아가면서 거의 대부분 윤구병씨네 땅이었다. 감나무 세 그루 또한 그분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윗감나무 곁에 집을 지었고, 친가 아버지는 윤씨의 특별한 배려로 가운뎃감나무 위쪽 산기슭 밭뙈기 한 필지를 경작했다. 양가와 친가가 공통적으로 그분의 은덕을 입고 있었다. 그분에게는 남아도는 유휴지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금싸라기 땅이었다. 친가 부모님은 해마다 이 밭을 가꾸어 생계와 직결된 그 나름의 곡물 소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해 6월 초순이었다. 망종과 현충일을 전후해 학교에서 며칠간 농번기 방학을 주었다. 잠시 학교 수업을 멈추고 농가 어른들 일손을 덜어드리기 위해 시행되던 임시 휴업. 나는 양가 (큰)아버지 내외분과 보리를 베었고, 그 이튿날에는 친가 모내기를 도와드린 데 이어 사흘째 되던 날에는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가운뎃감나무 위쪽 산기슭 밭뙈기에서 콩 심기에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앞으로 나아가면서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 콩을 넣은 뒤 슬쩍슬쩍 흙을 그러모아 투덕투덕 덮었다. 작은 바가지에 콩 씨앗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머니 곁에서 서툰 솜씨로나마 정성스레 콩을 심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한 구덩이에 콩을 꼬박꼬박 세 톨씩 넣고 있었다. 나도 어른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했다. 어쩌다 아차 실수로 두 톨을 넣게 되면 얼른 한 톨을 더 추가했다.
일을 한두 시간이나 했을까, 오금이 아프고 허리와 엉덩이까지 뻐근했다. 날씨까지 후텁지근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콩 심기에만 몰두해 있었다. 당신들은 어쩌면 오로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분들인지도 몰랐다. 시루봉에서 소쩍새가 울면 구례들에서 뜸부기가 맞장구를 쳤다.
이상했다. 한 구덩이에 콩을 한 톨씩만 넣어도 그만일 텐데 어찌하여 굳이 세 톨씩 넣는 걸까. 궁극적으로 한 구덩이에서 콩 한 포기만 올바로 자라서 손실 없이 결실하면 성공이었다. 콩을 심는 데에도 아마 무슨 법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엄니, 어째서 한 구뎅이에 콩을 세 톨씩 넣어유?”
‘구뎅이’는 ‘구덩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밀짚모자를 썼고, 어머니는 머리에 흰 왜포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밭둑 저쪽 도랑에는 토끼풀과 자운영이 뒤엉켜 서로 꽃 자랑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얼굴에 묻어난 땀을 수건으로 쓰윽 훔치면서 내게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두 궁금했냐?”
“야.”
“아이구, 우리 윤복이는 얼마나 신통한지 모르겄네. 한 구뎅이에 세 톨씩 넣는 걸 유심히 보았던 모양이구나. 옛날부터 콩을 세 톨씩 심는 까닭이 있지. 한 톨은 땅 속에 사는 벌레 몫이고, 한 톨은 새나 짐승 몫이고, 나머지 한 톨이 사람 몫인 겨. 벌레와 짐승과 사람은 물론 천지만물이 함께 잘 엄당겨서 살어야 하지 않겄냐. 그렇지?”
‘엄당겨서’는 ‘어울려서’ ‘조화롭게’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꿀밤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띠잉 했다. 지난번에는 지렁이와 벌레의 생명에 빗대어 부처님 법문을 인용하셨는데, 이번에는 콩을 통하여 생태계의 공생과 천지만물의 공존공영까지 각인시켜 주었다. 만일 어머니가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했다면 크게 성공했을 것이었다. 며칠 후 콩밭에서 튼실한 콩 싹이 땅거죽을 떠밀고 올라왔다.
각설하고, 어머니가 두 분이신 관계로 나에게는 외갓집도 두 곳에 있었다. 양가 쪽으로 따지면 논산군 두마면 두계리(지금의 계룡시), 친가 기준으로는 전북 익산군(지금의 익산시) 망성면 신작리 무네미에 있었다. 그곳에서 외숙이 자전거 대리점을 경영했고, 이모는 강경 금강변 황산나루 근처에 살고 있었다. 두마면 외갓집 진주강씨 가문이 가난했던 데 비해 망성면 외갓집 파평윤씨 일문은 부유했다. 다만, 이모네는 여러 모로 힘겹게 살고 있었다.
5학년 때 초가을이었다. 윗집 마당 한복판 아름드리 감나무에 주먹만 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가지 끝에 매달린 감들이 그네 타듯 흔들거렸다. 용보들이며 구례들에서는 벼들이 하루하루 점점 더 누런빛을 띠는 가운데 유례없는 대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옥수수수염이 시들고, 수수목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오곡백과가 야무지게 여물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해거름녘에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갱갱이 외갓집에 가서 하룻밤 자구 이모네 집까지 다녀오자.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더 바뻐지기 전에 댕겨오는 것이 좋겄구나. 어떠냐?”
‘갱갱이’는 ‘강경’이었다. 당신은 강경에 인접한 익산 망성을 그냥 알아듣기 쉽게 강경으로 에둘러 통칭하고 있었다. 논산과 강경을 함께 아우를 때에는 ‘놀뫼 갱갱이’라 일컬었다. 이제 곧 추수기에 들어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려유.”
“숙제가 많으믄 어떡하지?”
“그거야 지가 알어서 할게유.”
“알었다. 그럼 그날 같이 가자.”
어머니는 사나흘 동안 당신 동기간 집에 예의로 내놓을 선물을 준비하느라 여간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벼르고 별러 실로 오랜만에 찾아가는 친정이건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쁠 만큼 워낙 쪼들리는 살림이다 보니 도대체 가져갈 만한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논 엿 마지기를 사주신 외숙에게는 일응 도조를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위 친족 동기간들과 손아래 조카들에게 따로따로 실용적인 선물을 마련하고 싶었다. 언니와 오라버니와 올케에게는 최소한 몫몫이 옷감 한 벌씩, 조카들에게는 신발과 양말을 한 켤레씩 선사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푸줏간에 들러 쇠고기라도 몇 근 뭉텅 베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빈자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최종적으로 챙긴 물품이란 논산 장 기름집에서 짜온 참기름과 남새밭에서 수확하여 잘 말린 알록달록한 강낭콩과 헛간에 매달아 두었다가 한두 시간 껍질을 까서 모은 마늘 알맹이가 고작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두 몫으로 갈라서 묵은 신문지로 포장한 뒤 바리바리 보퉁이에 쌌다. 한 몫은 망성 외갓집 몫, 또 한 몫은 황산나루 이모네 몫이었다.
토요일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무명 적삼과 몸뻬(もんぺ) 대신 깨끗한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있었다. 당신은 곧 보퉁이를 머리에 인 뒤 사립문을 향해 휘적휘적 발길을 재촉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신작로 잿무덤부리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버스를 타고 논산에 닿았다. 논산 차부, 즉 시외버스합동정류소에는 대한여객 한흥여객 전북여객 등 여러 회사 소속 노선버스들이 들락날락하였다. 버스 꽁무니에서 시커먼 매연이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공주행 버스 옆에 강경행 버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운전사가 차내 정면 한가운데 운전석에 올라 핸들에 열쇠를 꽂았고, 조수가 보닛 라디에이터 내부 엔진과 연결된 자동차 앞 범퍼 동그란 구멍에 꺾쇠 모양의 철제 스타팅 공구를 꽂아 넣고 부리나케 잡아 돌렸다. 버스가 그르릉 그르릉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부릉부릉 부르릉 냅다 목청을 높였다. 시동이 걸린 것이었다. 그 당시 버스 보닛은 운전석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이미 공개했다시피 어머니는 간판이나 안내판 따위를 전혀 읽을 줄 몰랐다. 논산과 강경을 자주 왕래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길을 척척 잘 찾아내는지 귀신도 두 손 들고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당신은 승차와 환승과 하차에도 능수능란했다.
곁에 있던 공주행 버스가 먼저 떠날 때 이쪽 버스가 갑자기 후진하는 것 같았다. 착시 현상이었다. 드디어 우리 버스도 출발했고, 어머니와 나는 강경 차부에서 내린 뒤 부지런히 걸었다. 어머니는 ‘만월표’ 하얀 고무신을 신었고, 나는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니, 지가 그 보퉁이 좀 들어드리믄 안 될까유?”
“말은 고맙다만, 내가 이고 가는 게 희낀 마음 편하다. 잘못하믄 참기름 엎질러질 수도 있응게.”
‘희낀’은 ‘훨씬’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보퉁이를 머리에 인 채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육감으로 어머니의 속내를 잽싸게 훔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짐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참기름의 안전을 차용하면서 진짜 거짓말이 아닌 가짜 거짓말로 얼렁뚱땅 둘러댄 것이었다.
강경에는 젓갈 상점과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 가옥들이 많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매우 경이로웠다. 강경의 명소로는 옥녀봉, 명물로는 수문 개폐 장치를 꼽을 수 있었다. 좌우 도로변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다. 용보들이나 구레들처럼 그곳 들판의 벼이삭에도 누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호남선 철길을 건너 전북 망성면으로 들어섰다. 강경은 충남이고 망성은 전북이었다. 아까 집을 떠난 뒤 부여군에서 논산군으로 군계(郡界)를 넘어 왔는데, 이제는 충남에서 전북으로 도계(道界)를 넘은 것이었다. 과거 몇 차례 부여군과 논산군, 즉 자군(自郡)에서 타군(他郡)으로 넘나든 적이 있지만, 충남 자도(自道)에서 전북 타도(他道)로 넘어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그만큼 행동반경을 넓힌 셈이었다.
마침내 외갓집에 당도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이 기울어 가을볕이 한풀 꺾였지만, 제법 먼 길을 부랴부랴 걸었던 터라 얼굴과 목덜미에 땀이 찐득하게 묻어나 있었다. 외숙 내외분과 외사촌 형제들이 얼마나 반색을 하는지 콧날이 시큰하면서 눈시울까지 화끈해졌다. 머리 위로 고추잠자리들이 무리를 이루어 하느작하느작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로변에 자전거 대리점이 있었다. 외숙의 사업장이었다. 점포 천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신품 자전거들이 가득했고, 벽면 안쪽으로는 투명 비닐로 포장한 오토바이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대리점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논과 밭은 전부 외갓집 땅이었다. 외숙이 크게 성공하면서 그 토지를 점진적으로 사들여 농지를 대폭 확장한 것이었다. 점포 건너편 기름진 밭에는 무와 배추가 통통하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외숙모의 안내를 받아 안채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대청도 널찍했다. 저쪽 마당가에는 여태까지 손을 대지도 않은 볏짚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땔감으로 볏짚을 쓸 만큼 썼는데도 그토록 엄청난 재고가 남아 있었다. 뒷문으로 보이는 배롱나무에 화사한 분홍 꽃이 만발했고, 보리똥나무에는 뿌옇고 벌건 보리똥 열매가 눈부실 만큼 다닥다닥 열려 있었다.
외숙모가 선풍기의 전원 스위치를 살짝 눌렀다. 그러자 선풍기 날개가 사르르 돌면서 속도를 점점 더 높였다. 마당가에는 여러 종류의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어떤 맨드라미꽃은 마치 수탉 볏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귀빠진 뒤 처음으로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어머니가 보퉁이를 풀어 외숙모에게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당신께서 손수 장만한 정성 가득한 선사품을 전했다.
그 무렵 우리 동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전제품이 전무했다. 여름 내내 주민들 모두가 부채로 더위를 식혔다. 설령 전기가 들어온다 한들 주민들의 대부분은 선풍기를 구입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가전제품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신문명 또한 희귀했다. 20여 가구 중 딱 두 부잣집에만 괘종시계와 재봉틀이 있었다. 선풍기는 갸우뚱 갸우뚱 고개를 좌우로 유연하게 돌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골고루 배분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외숙모가 차려낸 저녁상은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물론이고 해산물에다 나물에 이르기까지 산해진미가 넘쳐나고 있었다. 음식이 하도 많아서 입이 떡 벌어지는 데다 어느 것부터 먹어야 할지 대관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외숙이 내게 말했다.
“윤복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많이 먹어라. 그동안 얼마나 배곯고 지냈냐. 나는 니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니가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면 통학용으로 자전거 한 대 줄게.”
그 말씀에 가슴이 울컥했다. 외숙은 파평윤씨 일파의 대들보 같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내 친가에 ‘질안배미’ 논 엿 마지기를 사주셨던 귀인 중의 귀인. 외숙 내외분은 어떻게 해서든 동기간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려고 온갖 온정을 베풀었다. 나는 모처럼 배가 터질 만큼 포식했다.
그 이튿날 오전 외갓집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조카들에게 겨우 구깃구깃 구겨진 소액권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외숙은 어머니에게 빳빳한 고액권 지폐로 노자를 듬뿍 안겼고, 나는 외숙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받아본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용돈을 받았다. 얼마나 고마운지 감루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친정에 하찮은 예물을 홉으로 내놓았다면 외갓집에서는 어머니와 나에게 고귀한 은혜를 섬으로 베풀었다. 어머니와 나는 황산나루 이모를 찾아뵈었다. 제방 너머 선착장에는 나룻배들이 몸을 맞댄 채 뒤뚱거리고 있었다. 금강이 유장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이모네 가족들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받은 사상 최초 최고 최대의 감동적인 환대를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마을 어른들 사이에는 ‘촌놈이 장에 다녀오면 사랑방꾼 잠을 못 자게 군다’는 말이 있었다. 모처럼 누군가가 논산 장이나 부여 장에 다녀오게 되면 현지에서 새로이 보고 들은 화젯거리가 하도 많아 남이야 듣건 말건 사랑방꾼 잠 못 이루게 밤새도록 신나게 떠들어댄다는 뜻이었다. 나 또한 외갓집 방문 체험에다 초 치고 된장 풀고 갖은 양념 다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하루 이틀쯤은 족히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이듬해, 즉 1964년 1월 석양국민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내 학업은 사실상 그것으로 끝난 셈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극빈이어서 나를 더 이상 가르칠 경제력이 없었다. 그때 일생일대의 대반전이 일어났다. 친가 아버지께서 거액의 빚을 내어 나를 논산대건중학교에 입학시켜 주신 것이었다.
‘수석’이 화근이었다. 만약 내가 국민학교를 2등이나 3등으로 졸업했더라면 아버지께서 그런 무리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다 수석을 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부모님께 큰 타격을 안겨드린 것이었다. 죄송하게도 나 한 사람 때문에 부모님과 동생들이 더 힘든 고생길로 들어섰다.
그 어간에 경천동지할 대형 변고가 발생했다. 외숙이 돌연 위암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 시절에는 의술이 미진하여 누구든지 암에 걸렸다 하면 예외 없이 그대로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뭐 건강 보험이니 의료 보험이니 그런 것도 없었다. 외갓집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우리 가족은 가장 든든한 최후의 후원자를 잃었다. 외숙이 작고했을 때 어머니는 실신했다가 정신을 되찾은 뒤에도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 부모님은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외숙이 주신다던 자전거는 물 건너갔고, 나는 장장 30리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학우들이 점심 도시락 뚜껑을 열 때 나는 운동장으로 나가 음수대에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녹록지 않았다. 어른들은 부여 논산 양방향 거리를 계산할 때 항용 우리 동네에서 부여까지 20리, 논산까지 20리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부여 방면에서 볼 때 논산읍 초입이 아닌, 읍내 한복판을 관통한 저 멀리 부창동에 있어서 통학 거리를 산출하자면 20리에다 그만큼의 구간을 더 추가 산입하는 것이 옳았다.
통학은 힘들었다. 워낙 허기져서 체력이 고갈되었고, 가는 길 오는 길 길바닥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학업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하절기에는 해가 길어 별 걱정이 없었지만, 낮 길이가 짧은 동절기에는 등굣길에서 뜨는 해를 맞이했고, 하굣길에서 지는 해를 떠나보냈다. 집에 시계가 없어 등교 때 출발시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집에서 학교에 도착하면 입에서 쓴내가 났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초죽음이 되어 콧구멍에서 단내가 났다. 늦가을 추적추적 비 내리는 어스름에 성동면 공동묘지 옆을 지날라치면 어디선가 귀신이 뛰쳐나올 것 같아 머리끝이 찌풋거렸다. 비포장 신작로에는 크고 작은 자갈들이 울멍줄멍하였다.
여름철 흙먼지가 극심할 때에는 곧잘 정지리에서 원북리 방향으로 우회했다.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 논산 부여 간 철도를 부설하려고 지반 공사를 진행하던,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공사를 중단한 뒤 방치해둔 미완의 노선이 있었다. 직선으로 쪽 곧은 지반 한복판으로는 우마차 길이 나 있었다. 근방 주민들이 길가에 보리나 호밀 같은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책가방, 다른 한 손에 영어 단어장을 들고 사타구니에서 요령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본래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겁도 없이 논산대건중학교를 졸업한 뒤 논산대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중3 때의 담임이신 권길중 선생님의 강권에 못 이겨 그렇게 된 것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나 할까,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짧은 혓바닥으로 침을 멀리 뱉으려고 덤비는 형국이었다.
사실인즉 내가 교복 입고 학교 다닐 때 동생 차복과 옥희는 허름한 옷가지를 걸치고 험한 일에 시달렸다. 동생들의 경우 국민학교야 의무 교육이니까 무난히 졸업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학업은 언감생심 기대 난망이었다. 머리가 나쁘거나 공부를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학비를 조달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복과 계복의 앞날도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동생들에게 미안했다. 나만 높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형평에 맞지 않았다. 참 면목 없는 일이었다. 훗날 선복과 계복은 상급 학교로 진학했지만, 차복과 옥희는 결국 국졸 학력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내 바로 밑의 두 동생에게 큰 부채를 짊어지고 살아왔다.
실지로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느라 더 많은 노고에 부대꼈다. 당신은 길쌈에다 바느질은 물론 논밭 농사일에 이르기까지 날이면 날마다 일에 파묻혀 살았다. 당신에게는 애당초 농한기니 뭐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쩌면 오로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한여름에는 양잠 농가에 공급하는 잠망(蠶網)을 만들었고, 추수가 끝나면 윗방 베틀에 올라앉아 겨우내 모시나 삼베를 짰다.
말이 나왔으니까 얘기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즈음 염색 보세 가공의 중간 과정인 홀치기가 부녀자들의 농가 부업으로 크게 성행했다. 수건처럼 갸름한 홀치기 원단을 ‘시보리(しぼり)’라고 했다.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홀치기에 매달렸고, 거기에서 얻는 소득으로 가용에 보태는 것은 물론 내 학비까지 대주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날 나는 숙제를 마쳐 놓고 잠깐 아랫집 친가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머니 주위에 동생들 전원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날씨가 춥다 보니 그들은 나가 놀 수조차 없었다. 옷도 얇고 허술했다. 난데없이 동생들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생래적으로 일복을 타고난 어머니는 콧잔등에 돋보기를 걸친 채 홀치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간, 그리하여 안경테를 굵은 실로 두루뭉술하게 연결한 구닥다리 돋보기. 어머니는 누군가로부터 얻어온 그런 고물 돋보기를 삐뚜름하게 쓰고 있었다. 문풍지가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어서 오너라. 춥지?”
“괜찮어유. 견딜 만 해유.”
“그렇다믄 다행이구나. 우리 윤복이는 장차 대성할 인재이닝께 엥간한 추위쯤이야 잘 참을 겨. 거기 따뜻한 자리로 앉거라.”
“엄니. 맨날 일만 하시믄 힘들지 않어유?”
“힘들지. 그렇지만 어쩌겄냐. 본래 새끼 많은 소가 멍에 벗을 날 웂다구 했느니라.”
우문현답이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그때그때 구구절절 척척 적절한 말씀한 하시는지 절묘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의 처지는 미상불 새끼 많은 소와 판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소에게 새끼가 아무리 많다 한들 어머니에게 딸린 우리 동기간처럼 많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소라면 우리 7남매는 당신 몸에서 태어난 송아지들이었다.
당신은 그야말로 죽도록 일만 하는 소처럼 살았다. 그러면서 힘겹기 짝이 없는 자식들 양육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생사람 잡는 극심한 치통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치과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어쩌다 논산 장 또는 부여 장에 가서도 불어터진 자장면이나 라면 한 그릇 사먹지 못한 채 쫄쫄 굶었다. 내가 말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웂네유.”
“괜찮다. 너는 우리 집 맏아들이자 가문의 종손이다. 니가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거라. 차복아, 옥희야, 선복아, 계복아… 느이들은 항상 맏이를 아부지처럼 생각하거라. 만약 아부지가 돌아가시믄 그때부터 맏아들이 아부지 대신 가장으로 올라가게 되는 거란다. 아무쪼록 우애 좋게 지내거라. 동기간에는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겨. 그러구 이웃 간에는 황소 한 마리 가지구두 다투어서는 안 된다. 알겄냐?”
“야.”
동생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너그러워 어느 누구와도 말다툼을 벌이거나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네 분 부모님은 나 한 사람을 가르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나는 당신들의 고혈을 빨아 1970년 1월 논산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와 동시에 초·중·고 통산 12년 개근이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내 졸업장에는 부모님과 동기간의 땀과 눈물과 피가 배어 있었다. 외람되고 과분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출세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예나 지금이나 끗발 없는 민초들은 숙명적으로 가시밭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권문세가들이 풍요를 세습할 때 가난뱅이들은 궁핍을 대물림하게 마련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부여나 논산 땅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호적 나이까지 잘못 등재되어 앞길이 콱 막혀 있었다. 내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무 살, 만으로 열여덟 살이었지만, 호적 나이로는 아직 열일곱 살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연령 미달인 터라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몇 해 전부터 농어촌에 상경 열풍이 불고 있었다. 나도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울에 가면 뭔가 꼭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해 초여름이었다. 나는 맨몸으로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로 들어섰다. 그런데 웬걸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서울에서는 일자리 대신 말 못할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영등포에 첫발을 디딘 이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뒈지게 고생했다. 객지 생활이 그토록 혹독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고 실전이 있을 따름이었다.
살기가 죽기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네 분 부모님께서 몸 전체로 보여주신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나는 어떤 난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 대결을 벌였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을 하면 저절로 무쇠 같은 용기와 강철 같은 투지가 솟구쳤다. 단도직입적으로 천명하건대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특히 어머니는 희생의 화신이었다. 한평생 가족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바쳤던 어머니. 우리 동기간은 당신의 거룩한 헌신을 딛고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어머니에게 가장 많은 피와 땀과 노고와 상처를 안겨드린 애물단지였다. 그런 내가 함부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 생명의 원천이었다. 객지로 나온 이래 나는 한시반시도 부모님과 동기간을 잊은 적이 없었다.
더 나아가 나는 한산이문의 후예였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을뿐더러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 법이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작두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조상님을 욕보이거나 부모님 은공에 배은망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지난 세월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며 골병이 들도록 사력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병법에 이르기를,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 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임전훈(臨戰訓)으로서 나에게 큰 교훈이 되어 주었다. 나는 전쟁에 나선 군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 세파를 헤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투 의지가 필요했다.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인미답의 험난한 역경을 헤쳤다. 책도 읽을 만큼 읽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성적표는 너무 초라했다. 어머니의 덕목과 지혜를 절반만이라도 확실하게 구현했더라면 당신 말씀처럼 큰 인물이 되어 대성했을 텐데, 이 못난 자식은 쓰디쓴 쓸개를 씹으며 죽을 동 살 동 모진 세파를 헤치기에 바빴다. 그 결과 나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늘 여기까지 왔다.
이래저래 여러 부면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장남의 도리에 미흡했고, 종손 노릇 또한 역불급이었다. 나의 무능으로 아내와 아이들 3남매까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형극의 길에서 허덕였다. 내가 객지로 나선 지도 반세기 이상 훌쩍 흘러갔고, 그러고 보니 내 나이는 어느덧 고희를 거쳐 희수를 목전에 두었다. 내 인생은 이렇듯 쓸쓸한 허탕으로 어물쩍 황혼에 접어들었다.
어제 오후였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려는 것일까, 한강 둔치 저 너머로 쌍무지개가 높이 떴다. 세상만사가 말짱 부질없는 환상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두 겹의 현란한 무지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안 (큰)아버지 내외분과 아버지 어머니와 동기간이 그리웠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 서글퍼 양쪽 눈가에 아롱아롱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충남 부여 출생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주요경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평생교육원 원장(제3대), 『월간문학』『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한국문학진흥 및 국립한국문학관건립공동준비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제27대~제28대),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이사,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제6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조직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대한민국 명예해군
[주요작품]
소설집 『화려한 밀실』 『사육제』 『겨울여행』 『먼 길』 『동행』 『만물박사(전3권)』 『뿌리』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 『폭설』 『열망』 『술래잡기』 『겨울무지개』 『바람잡기』 『송주임』 『이혼시대(전3권)』 『삼국지(전8권)』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사랑과 운명』 『불멸의 혼-계백』 『구름잡기』 『안개의 계절』 『황금의 후예』
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 『슈퍼맨』
산문집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전래동화 『에밀레종』
교양서적 『태평양을 마당처럼 세계는 없다』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문학과 행복』
시나리오 『시련과 영광』 『아, 대한민국』 외 다수
[수상]
대통령표창(1987, 1995). 제7회 동포문학상. 제2회 시와시론문학상.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1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문인부문). 노동부장관 표창. 제28회 국제PEN문학상. 제14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대상. 제3회 익재문학상. 제9회 정과정문학상. 제3회 한국지역방송연합(KBNS)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대한민국예술문화공로상. 제61회 한국문학상. 제21회 창조문예문학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