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귀貴하다를 얘기하면 거의 천賤하다가 뒤따라옵니다 이는 마치 선善을 얘기할 때 자연스레 악惡이 따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꼭 함께해야 하는 게 아니라서 왼발과 오른발의 관계와는 다르지요 걸음을 걸을 때 왼발과 오른발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왼발 하나나 오른발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으니까요
이에 비해 선과 악의 관계라든가 고귀함과 비천함의 관계는 다른 쪽이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악이나 천함은 없을수록 좋지만 선량함과 귀함은 오롯할수록 좋지요 더러움과 깨끗함이 상대적이듯 세상은 흰색과 검은색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법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강제를 싫어합니다
하늘, 땅, 사람을 삼재三才라 하는데 음양설陰陽說에서 쓰는 말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과 사람 셋이 만물을 제재制裁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하늘과 땅은 대자연이고 사람은 인위人爲로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 그 자체는 마찬가지로 대자연에 들어갑니다 자연계에 곤충과 벌레는 들어가면서 사람이 빠질 수는 없는 까닭이지요
동몽선습 첫머리에 놓인 여덟 자 중 끝의 '중'자가 무슨 자냐 물으면 동몽선습을 읽은 이들조차 가운데 중中 자라고 답합니다 한데 이 글자는 무리 중衆 자입니다 따라서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지중萬物之衆에서 가운데 중中 자를 놓지 않고 무리 중衆 자를 놓았다고 하는 게 이게 알고 보면 예삿일이 아닙니다
물건 물物 자를 얘기하면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유무를 떠나 눈으로 확인되는 모든 물체를 뜻합니다 그러나 물物은 움직이는 물체입니다 만물萬物은 오만 가지 물건으로 대부분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이와 같은 오만 가지 무리衆에서 어떤 물건이 가장 귀할까요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무리衆입니다 사람은 개체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중衆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얘기하고 있나요 가장 귀한 존재를 얘기합니다 그냥 대충 귀한 게 아니라 어떤 것보다 으뜸되는 귀함입니다 그 이유를 오륜五輪에 연결시키네요 오륜을 알고 오륜을 실천하기에 비로소 가장 귀한 축에 듭니다 오륜을 모른다면 어떻게 표현할까요 으레 가장 천賤하다 할 것입니다
귀貴나 천賤의 기준은 재물貝입니다 귀할 귀貴의 부수가 조개 패貝듯 천할 천賤의 부수도 조개 패貝지요 재물貝을 중히 여기면서도 재물 위에 방석一을 깔고 앉아 중심中을 잡고 있는 모습이 귀貴라면 사소戔한 재산貝을 옆구리에 끼고 많네 적네 다투는 게 천賤이지요 이처럼 귀함과 천함의 구별은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일 것입니다 뭔가 좀 서글프지만 현실입니다
사람의 신분을 돈과 재물로 가르고 지위의 높낮이로 가른다는 게 가장 귀하다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면 바로 이러하지요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어찌하여 귀한것이 사람이냐면 사람에겐 다섯가지 윤리가있지 다섯가지 기본덕목 오륜을떠나 됨됨이를 얘기할수 없음이로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보통이 아닙니다 귀할귀 貴와 천할 천賤이 모두 돈과 재물을 바탕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섯가지 인간의 덕목인 오륜五倫으로 승화시킴이 대단합니다 이는 불교의 벼락 경전인 금강경에서 사구게를 내세움과 같지 않나요 나를 비우고 남을 비우고 중생을 비우고 잰 체를 비우라는 사구게의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까
금강경에는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진리를 깨닫고 몸소 옮기는 이 여래如來는 어떤 분일까요 진어자眞語者고 실어자實語者고 여어자如語者고 불광어자不誑語者고 불이어자不異語者라고 진실하고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속이지 않고 달리 말하지 않는 자라고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맞습니다 벌과 개미와 하이에나와 들개, 코끼리, 누에 이르기까지 무리를 지어 함께 살 길을 모색하는 숱한 생명들은 다 사회적 동물입니다 오륜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나요 집단이고 공동체society입니다 오륜은 관계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성을 미리 예시하고 있음이 바로 무리 중衆 자일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대표와 보좌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어른과 아이의 관계 친구와 친구의 관계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삶을 동몽선습은 말합니다 모든 생명이 다 비슷한 길을 걷지만 사람도 예외例外는 아니어서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어울려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륜 덕목이 불교의 오계라든가 기독교의 십계명에 견주어 뭔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관계성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음이 가장 귀한 존재일 수 있음이 사랑이며 나눔이듯이 곧 인륜입니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하듯이 관계의 소중함을 알기에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