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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08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제6문]
하나님의 속성에 이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한 분이라는 말은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분은 한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오직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4:3) 다른 신이 없기 때문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씀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두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로마서 1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죄의 결과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안과 밖을 통하여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의 어두워져서 하나님 자리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어떤 것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할 때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는 줄 알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만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에서는 첫 번째 계명으로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의 존재 방식이 삼위로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한 분이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이단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그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고 해서 세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보다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진리를 더욱 잘 수호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던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 내용을 조금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나간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부패한 교의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불경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석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559, 1.13.4) 그러면서 몇몇 인단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1559, 1.13.5)고 말합니다.
어쨌든 성경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6문. 하나님의 신성 안에 몇 위격이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성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계십니다. 이 세 위격은 본질상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요일5:7, 마28:19).
5문에서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외에 없다고 설명했는데, 이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성 안에 몇 위격이 계시느냐? 세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보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데, 본문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각 위격이 자신의 경륜적 은택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고린도 신자에게 나누어주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에는 예배 마지막 순서로 축복 기도(축도) 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 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비교를 위해서 구약에도 보면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민수기 6장에 있는 말씀인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내용 자체는 다르지 않지만 구약의 경우는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여호와가 신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그리고 성령으로 나열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마태복음 28장 19절과 요한일서 5장 7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일단 마태복음 28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데, 이때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성자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까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도 보겠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총대들이 삼위일체와 관련해 요한일서 5장 7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했을 때는 이 내용이 아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없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우선 우리말 성경의 7절과 8절은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총대들이 사용한 King James Version(1611)은 6절 다음에 “하늘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총대들인 증거 구절로 인용한 7절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뒤 8절은 “땅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하나이니라”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여러분의 성경에 꼭 기록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상에서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성에는 삼위, 곧 세 위격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 위격이 계시지만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은 신적 본질이 동일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자존성을 생각해 보면 성부만 스스로 계시고 성자와 성령은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닌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부가 스스로 계시다면 동일 본질로 계신 성자도 스스로 계시고 성령도 스스로 계십니다. 제4문에서 언급한 다른 모든 속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가 무한하신데, 성부만 무한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십니다. 성부가 영원하신데, 성부만 영원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도 영원하시고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성부가 불변하신데, 성부만 불변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도 불변하시고 성령도 불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면 성자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말하면서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임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 합니다. 이때 ‘말씀’은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시되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3절과 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절에서는 성령을 속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거짓말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니까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동일 본질로 계시기 때문에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도 동등하십니다. 성부와 성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부는 아버지이시고, 성자는 아들이기 때문에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가 성자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동등합니다. 성령의 경우 성부 하나님의 영, 성자 예수님의 영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요15:26 참조), 이런 표현 때문에 성령의 권능과 영광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보다 작지 않습니다. 모든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합니다. 당연히 성부가 더 월등하다든가 성자와 성령은 조금 열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본질을 지닌 동등하신 하나님으로서 실체가 하나인 같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요10:30).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이렇게 증거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 한 분, 성자 한 분, 성령 한 분, 이렇게 해서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는 곧 성자요, 성자는 곧 성령이요, 성령은 곧 성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 또한 성부가 아니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부는 오직 성부이시며, 성자는 오직 성자이시며, 성령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부를 성자라고 하거나, 성자를 성령이라고 하거나, 성령을 성부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각 위격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말인데, 하나님 안에서는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표현할 때 성부를 전 신성의 근원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성부와 관련해 누구로부터 났다(발생), 혹은 누구로부터 나오신다(발출)는 그런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자의 근원은 성부이신데, 왜냐하면 성경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났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발생). 또한 성령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이신데, 왜냐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입니다(발출).
그리고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는 성육신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사도행전 20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이라는 표현 때문에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거나 혹은 신성이 고난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또한 났다, 나오셨다는 이런 표현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조금 전 동일 본질을 설명할 때 성부만 무한 영원 불변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도 무한 영원 불변하시고, 성령도 무한 영원 불변하시다고 말한 것처럼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고유성을 나타낸다는 말 때문에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말해는 안 됩니다.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와 관련해 수없이 많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할 때 이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 위격이 아니라 하나의 위격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저들에게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 이상의 신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일신론은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양자론적 단일신론 혹은 양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 혹은 양태론입니다. 양자론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면서 다른 인간들보다는 나은, 즉 성인으로 보는 입장들이 있는데,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태론의 경우 삼위을 한 하나님의 다른 모양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을 다른 시대에 다른 양식으로 계시하신다고 하면서 창조 시에는 성부로, 율법을 주실 때는 성자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것이 양태론입니다. 혹은 한 하나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양태론입니다. 예전에 보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나’라는 인물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목사로, 집에서는 아내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식으로 설명할 때가 있었는데, 이런 설명이 다 양태론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할 때 성부는 곧 성자인 것입니다. 성자는 곧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 또한 성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위격 상호 간에 관계를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고, 이때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같다고 보는 겁니다. 같지만 다른 모양으로 계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자론이나 양태론이나 무엇을 부인하느냐 하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성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끊임없이 성자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단일신론 이후 4세기에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등장했는데, 그는 성자가 비록 탁월함과 시간적 순서상 다른 피조물들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고 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정도 되는 그런 영적 존재로 보았던 겁니다.
6세기 말에 등장에 소시니우스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리우스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자는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고, 성부가 거룩한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주셨고, 죽음으로써 그 진리를 확증했으며, 부활 후에 그를 높여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한갓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고, 단지 하나님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인간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격을 지닌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 이후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반아리우스주의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당시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삼분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에게는 육체와 혼은 있지만, 인간의 영 대신 신의 영이 깃들여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은 성자의 신성을 반대한 것이고(아리우스), 그에 반대한 자는 성자의 인성을 반대한 것입니다(아폴리나리우스).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마치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 능력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소위 성령기계론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케도니우스가 주장했다고 해서 마케도니안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언급한 소시니우스주의자들 역시 성령의 신성도 아울러 부인했는데, 몇몇 이단만 말했을 뿐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있어왔던 겁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매우 중요하고도 소중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삼위일체라고 하면 어거스틴 이후 더 이상 발전된 내용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잘 정리해 두었는데, 특별히 1장에서 8장까지가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외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매우 잘 요약해 둔 시조가 있는데, 아다나시우스 신조입니다. 매 주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고백을 하는데, 전체 고백을 다 하고 난 뒤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해 이것보다 더 좋은 요약은 없다고 생각되게 때문입니다.
참고로 아다나시우스의 경우는 동부 교부인데, 동방의 경우 성령에 대한 고백 가운데 이중발출, 즉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는 것이 동방의 고백인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이중발출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아다나시우스가 작정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신조를 여기서 다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여기에 어떤 내용까지 담고 있느냐? 일단 1항에서 11항까지만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 정통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2. 이 신앙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고야 맙니다.
3. 그 정통신앙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니 삼위일체이시고 일체로서 삼위이시며
4. 위격의 혼합이나 본체의 분리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5. 왜냐하면 아버지의 한 위격과 아들의 다른 위격과 성령의 또 다른 위격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한 하나님이시며 그 영광도 동일하고 그 위엄도 동일하게 영원하십니다.
7. 성부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성자가 존재하며 그런 식으로 성령이 존재하십니다.
8. 성부가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자가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령이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9. 성부가 무한하시고, 성자가 무한하시고, 성령이 무한하십니다.
10. 성부가 영원하시고, 성자가 영원하시고, 성령이 영원하십니다.
11. 그러나 세 영원한 분들이 아니고, 한 영원한 분이십니다.
21항 이하 26항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21. 성부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22. 성자는 성부에게서만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시었습니다.
23.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나신 것이 아니라, 나오셨습니다.
24. 그러므로 한 성부이고 세 성부가 아니시며, 한 성자이고 세 성자가 아니시며, 한 성령이고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5. 또 이 삼위 안에는 다른 위보다 앞서거나 뒤서는 위가 없으시고, 다른 위보다 크거나 작은 위가 없으십니다.
26. 오히려 세 위가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등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항인 44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44. 이것이 정통신앙(Catholic Faith)이므로, 이를 신실하게(참되고 분명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단순히 어렵다, 난해하다고만 볼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이 삼위일체를 아는 것이 정통신앙으로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삼위일체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되, 삼위로 계십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한 위격이 다른 한 위격 안에 있고, 삼위 전체 역시 각 위격 안에 있다. 한 위격이 삼위 전체 안에 있고, 삼위 전체 역시 삼위 전체 안에 있으며, 그 삼위 전체는 하나이다. 또한 두 위격 혹은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즉 성부와 성자를 합하더라도 성령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성자와 성령을 합하더라도 성부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성부와 성령을 합하더라도 성자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합하더라도 성부 성자 성령 각각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각 위격은 그 존재와 본질과 속성과 사역에서 삼위일체 자체처럼 똑같이 크고 위대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앞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일하심 역시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표현의 이해를 위해서 에베소서 1장으로 설명 드리면, 우선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4절과 5절을 보시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두 번째로 7절을 보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세 번째로 13절과 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분들은 에베소서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성부의 계획, 성자의 구원, 성령의 적용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성경 자체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한 분 안에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만 계획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도 계획하시고, 성령도 계획하십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자만 구원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도 구원하시고, 성령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적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만 성취된 구원을 적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도 적용하시고 성자도 적용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 은혜를 베푸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으로 말하지만 성자와 성령은 사랑을 베풀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교통하심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교통하심이 성령 하나님만의 은택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할 때 삼위일체 전체에 공통되는 은혜라기보다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전 신성의 근원은 성부이시고, 성부로부터 성자가 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셨기기 때문에 질서 상 제1위격이 성부, 제2위격이 성자, 제3위격이 성령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성부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먼저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집행으로써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집행에 있어서는 중보자이신 성자 하나님의 사역 없이는 구원의 은택을 얻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은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부와 성령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로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자만이 인성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성부도, 성령도 인성을 입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인성을 입으신 분은 오직 성자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자만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구원하신 그 역사는 성자만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어떤 표현까지 있는가? 사도행전 20장 28절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피 흘리신 분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고 할 때는 인성의 표현보다는 신성의 표현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성부가 고난을 받은 것인가란 생각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인성과 신성,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두 본성이 교통하기 때문에 이때는 한 본성에 속한 것이 다른 본성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더불어 본문에 대하여 어떤 개혁자(John Wallis)는 피 값을 치르신 분은 성육신하신 성자이지만, 그런 구속과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밝혀주는 내용으로 본문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는 이런 내용 때문에 정통교회는 1215년에 피오리스라는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했는데, 이는 그가 각 위격의 개별적인 역사를 강조하여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구약은 성부시대, 신약은 성자시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령시대라고 하여 성령에 대한 강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의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