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청 신우회 수요예배 메시지
일자: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설교 본문: 시편 18:25~27
설교 제목: 신앙의 본질과 궁극적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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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에 다시 현장예배로 모였다. 설교 본문은 이사야 52장 7절이었다. ‘아름다운 소식을 들고 산을 넘는 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우리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물론 예수님이 그 좋은 소식을 들고 산을 넘으셨고, 이사야도 그랬다. 구약성경에서 그 소식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방과 자유를 얻은 자들의 환호성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눌려 있었고 주눅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스리신다!’는 선언은 예수님의 선포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와 비슷하다.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는 것은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구원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가적인 독립과 신앙적인 자유와 번영이 절실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목적과 존재의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대와 민족의 정체성에 기초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전파되고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복음일까? 전통적으로 기독교회에는 사영리에 기초한 복음전도가 보편적이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니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받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영생을 얻으려면 그 어떤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도 이룰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과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대비하여 제시된다.
그런 이유로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이 잘 전달되는 곳에는 가난과 고통이 자리한다. 그리고 어떤 사회나 나라가 부유해진 후에는 기독교 신앙의 쇠퇴를 경험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허무와 갈등, 그리고 염려와 근심 같은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자살률이 높고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그만큼 해결하지 못한 고통이 많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복음이냐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식과 좋은 소식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예언자 이사야는 노래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복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엡 3:4). 그가 깨달은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며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감추인 비밀이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이기도 하다(3:8). 아마 사도 바울이 풍성함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그리스도가 단지 유대인들을 위한 분으로 계시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아우르며 그들을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일 것이다(3:6).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깨달은 것을 정리해 보자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다시 높이 세우시고 하나님 앞으로 부르실 때 이스라엘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선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은혜와 지혜로 세상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농부와 같으며,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양무리의 본이 되어 그들을 푸른 초장과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가 될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이며 약속이며 분복이다. 이런 삶을 가리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인생이라 부르고 반석 위에 선 사람과 같다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그는 만족하고, 그는 풍성하며, 그는 기뻐하고 행복하다. 그것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부른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알고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므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관용과 포용을 베풀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시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5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편 18:25~27
이것은 다윗의 노래로서 사무엘하 26장에도 반복되어 기록되었다. 시편에서 다윗이 노래하는 주제는 바람직한 인생이란 자비와 온전함, 그리고 정결과 진실함, 겸손을 실천하는 삶이다. 그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갚아 주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깨닫고 정리한 바를 종합해 보자면,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며 사는 것인데, 다윗은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시편에서 노래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런 삶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고 보았다. 그것을 깨달은 후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빛깔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각 세대가 성경에서 발견해야 할 진리이며 자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적 질문은 무엇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인간은 불안을 느끼고 염려하는 존재다. 우리가 성장과정에서 느끼는 불안은 다른 모양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불안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리고 삶에는 만족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연히 불만이 쌓이고 기쁨이 사라진다. 그래서 불안은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할 인생의 짐이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인간의 한계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에 갇혀 있다. 우리는 육체의 한계에 갇혀 있고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는 현실에 갇혀 있다. 그렇기에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다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그 안에서 자족하고 사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종교가 인간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감사하며 서로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 연대하고 더 나은 공동체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한 모습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초대는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 11:28~30).
여기서 우리는 종교가 초월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 자신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리고 자족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기도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새롭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정규적인 예배와 성도의 교제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신앙인은 새롭게 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배와 기도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종교적인 체험이다. 그리고 그 체험이 신앙인에게 주는 유익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에 신앙인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께 진실하고자 노력한다.
신앙인에게 최고의 계율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는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며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 감사와 기쁨과 자유를 누린다. 그 능력과 감격으로 신자는 자기 이웃에게 덕을 베푼다. 그것은 다시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이것이 세상의 등불이며 소금이 된다는 의미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힘입으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불안과 염려를 극복하고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그것이 신앙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이며 유익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이런 삶이며, 이런 삶은 오는 세상에서 완전하게 꽃피울 것이다.
신우회원으로서 우리가 매일 묵묵하게 우리의 본분에 충실하고 진실한 신앙을 계발시켜 나가면 우리는 영생을 맛보며 영생의 기쁨을 나누는 복음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된다.
<끝>.
2월 1일 신우회 예배 메시지
https://youtu.be/i49mqSJcP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