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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부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
로마서 8:28~30
설교 목적:
로마서를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해 보겠다. 구원의 서정으로 알려진 이 본분에서 우리의 구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는 지난 주 설교에서 다룬 주제와 관련이 있다. 즉, 사람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지난 주에 다루었다면, 이번 주에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이 설교는 신앙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을 갖게 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의 정체성과 지위
2. 인간과 세상의 문제
3.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
4.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계획
5. 구원의 순서(order)인가 양상(aspect)인가?
6.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7. 천로역정인가 왕노릇인가?
1.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의 정체성과 지위
지난 주에 저는 성경이 들려주는 두 가지 진실은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점과 지금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지위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이 세상을 맡아 관리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통치하는 역할이기에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특별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복이 온 세상에 흘러나오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별도로 구별하여 마련하신 곳이므로 거룩한 곳이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두십니다. 인간이 그곳에 머물러 하나님과 함께 일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생명 충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에덴동산이며 시온산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이며 시온산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교회는 이제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구별하신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지위와 신분, 그리고 역할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본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운영해 오신 이야기를 성경으로부터 배울 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결국 그 계획대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시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대로 모든 생명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세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과 세상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2. 인간과 세상의 문제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나면, 인간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와 이 세상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하여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게 하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경건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종류의 악이 인간의 삶에 불거집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이런 비극적인 상태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서 말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려서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탄식과 고통뿐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참고, 롬 8:20~22).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의 삶이 허무한 데 빠지는 삶입니다. 다스려야 할 것들을 섬기는 삶이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우상숭배는 동물 모양을 섬깁니다. 이집트의 신들을 보면 대부분 동물 모양입니다. 그것은 신들이 그런 동물의 모양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우상숭배는 권력을 상징하는 신상이나 사람 모양의 신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우상숭배는 돈이나 쾌락을 더 많이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것을 섬깁니다.
다스리고 정복하여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인간이 도리어 짐승 모양의 신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찌 허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돈이 왜 필요합니까?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우리는 먹을 것을 구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입합니다. 돈을 유통함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운영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더 잘 가꾸기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이 세상을 희생해야 합니까? 무엇이 목적입니까?
돈 그 자체는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이나 돈을 벌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돈은 돈일 뿐이니까요. 그러면 돈을 바르게 사용하고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생의 본분과 목적을 먼저 명확하게 파악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본분을 바르게 깨닫지 않고서 어떻게 돈을 바르게 사용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을 회복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3.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시작 부분에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소개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1, 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롬 1:2~4).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이 복음입니다.
그 복음에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구원은 사람답게 사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롬 8:21).
허무한 데 굴복하여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사는 삶이 썩어짐의 종살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삶입니다. 그 두 가지 삶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에서 한평생 고생하면서 이방신의 신전을 짓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열방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는 자기도 죽고 세상도 망가지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기도 살고 세상도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점점 더 많은 땅이 사막으로 바뀌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고 생태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삶이라면,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면 인간에게는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가리켜 ‘의롭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은혜를 힘입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우리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죽음에 넘겨지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롬 4:25).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그가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강조하여 율법대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체험과 계시를 통하여 이것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그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며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 앞에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4.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계획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8~29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말은 보기에 좋다는 의미이며 또한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갈 때 받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겠다고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오늘 이 사람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눅 19:9)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다가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사도 바울이 순종할 때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이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바로 그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됩니다. 그의 삶도 그의 가정도, 그리고 그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도 점점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면서 그의 모습을 닮기를 계획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지으시고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입히셨는데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그 아들의 형상을 입혀주셨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세상을 생육번성충만하게 하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5. 구원의 순서(order)인가 양상(aspect)인가?
그 다음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더 설명합니다: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0
이 본문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먼저, 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경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자손들을 계속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실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롱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계획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작게는 그들의 유익처럼 보이지만 더 크게 보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의롭게 하신다는 말은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제사들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의 설명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예수님이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의인의 죽음을 당하셨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을 보면 구원이란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선한 뜻을 이루시려고 미리 계획하시고 사람을 부르시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출발하며, 인간의 부르심으로 나타나고, 그 목적은 인간을 다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에덴동산에 들이신 것과 같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후에 그들 가운데 집을 지으시고 함께 사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의롭게 된 사람이 얻게 된 새로운 정체성이며 지위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충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어떤 순서로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간이 구원을 받는 순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소명, 그리고 칭의와 영화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의롭다 하시고 장차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자신의 앞에 서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6.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는 동사들의 시제를 보면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사의 시제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나타내는 문법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어제 검정색 옷을 입었다’고 말하며, ‘지금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있다’고 말하며, ‘내일 나는 두꺼운 외투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리는 동사의 시제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는 동사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입니다: 미리 정하셨다(proo:risen), 부르셨다(ekalesen), 의롭게 하셨다(edikaio:sen),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다(edoxasen). 이 모든 시제는 문법 용어로는 ‘아오리스트’(aorist)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서울시민 걷기대회가 열린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걷기대회의 코스는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왕십리 광장까지 오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걷기대회에 참가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이 대회를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 걷기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집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광화문에서 출발했는데 지금 신당동을 지나고 있어. 이제 조금 있으면 왕십리 광장에 도착할 거야.’ 여기에는 출발한 일과 지금 지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도착할 일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기자의 설명을 듣습니다. 기자는 서울시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전체 코스를 한눈에 바라보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번 서울시민 걷기대회는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신당동을 지나 왕십리 광장에 도착하는 코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일하실 때 그것은 먼저 세상과 우리를 위하여 미리 계획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소명(召命), 그리고 칭의(稱義)와 영화(榮化)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원의 순서(order)라기보다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모습인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aspect).
앞에서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복을 누립니다. 그것은 은혜 가운데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롬 5:21).
그러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시편 8편에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지위에 오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고 다스리는 지위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시는 것이 영화롭게 되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때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장 나중에 설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화롭게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영화롭게 된다는 말은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고 그것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날에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열방을 위한 모델과 빛이 되는 것처럼 그런 지위를 교회가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얻는 구원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로 된 새 사람의 옷을 입는다고 했고(엡 4:24),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으며(고후 5:17),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벧전 2:9). 이것은 구원받은 인간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임을 나타냅니다.
구원받기 전에 인간은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그런 삶은 허망합니다. 사람과 돈을 두려워하고 쾌락과 권세의 종살이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며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람들과 협력하여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에 동참합니다(엡 2:10).
그것은 마치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고 축복하는 지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5~6, 표준새번역
7. 천로역정인가 왕노릇인가?
우리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천로역정으로 이해합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은 지금부터 340년 전에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이 쓴 소설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와 그 이후에 만나는 여러 경험을 비유하여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 가장 지배적인 생각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식의 생각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출애굽 여정을 읽으면서 요단강 건너가 들어갈 가나안 땅이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이라고 이해합니다. 찬송가에도 그런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목적을 가나안 입성이라는 단순한 일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의 목적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 때문에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 약속은 본래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큰 민족을 주시는 최종 목적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날에 생육 번성 충만을 선포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문에 나오듯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라는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란 에덴의 아담처럼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적 왕노릇이며, 시온산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알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시 16:6).
물론 신앙생활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향해 여행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아이로 태어나서 청년으로 자라고 그리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 부모처럼 다른 사람을 돌보는 수준으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고전 13:11, 요일 2:14). 성경은 우리의 삶을 그런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합니다. 그러나 성숙하면 할수록 사람은 나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더 성숙하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경영하시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시는 큰 그림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계획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가지며 그 계획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소란스럽고 때로는 답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당에 와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피하고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해하고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하나는 피해자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승리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있는 곳을 어떻게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든지 그것을 통해 더 나은 길을 찾아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는 구원이 미래에 완성되기에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신분과 지위에 걸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이미 버렸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새롭게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자책하는 삶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새롭게 만드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을 단칼에 둘로 나누듯 요약하는 것은 속단의 위험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데 큰 유익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까, 아니면 장차 이루어질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 선택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결정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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