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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겨자씨, 누룩, 한 알만한 믿음, 베데스다
(1) 겨자씨 비유
31.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13:31-33)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 주시기 위함이고, 천국의
속성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라는 것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를 드셨는데, 여러분이
겨자를 알지요? 매운맛과 향이 어울어져 있어서 우리 식단에 양념이나 약재로 쓰이고 있지요. 겨자
잎과 줄기는 나물로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셨는데, 이 겨자씨가 그냥 저절로, 또는 떨어져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기
밭에다 한 알을 갖다 심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주 긴히 필요해서 심었는데, 여러 알을 심은 것
이 아니고 오직 한 알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 알을 심었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근데 "이
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
지에 깃들이느니라"하셨습니다. 이 겨자씨가 아주 작다. 말하자면 씨가 땅에 떨어지면 작은 씨라서
눈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가 심어지면 나물로 먹을 정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
라, 약 1m에서 3m 정도까지 자라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들이 날아와 가지에서 쉬거나
둥지를 틀고 알을 품어 새끼를 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천국은 마치 사람이'라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겨자씨 한 알은 누구를 비유한 것일까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왜 겨자씨로 비유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겨자씨와 같은, 그러니까 이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씨라서 그 씨앗이 땅에 떨
어지면, 눈에 보이지 않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작은 씨 속에 있는 생명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그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씨가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압
니까, 모릅니까? 알잖아요. 그 씨 속에 생명은 보이지 않아도 씨 속에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은
싹터 올라와 자라서 다시 원래의 형태로 나오는 것은,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같이 하나
님께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눈에는 띄지 않는 그 작은 겨자씨와 같은 언약의 씨,
곧 예수님의 생명의 씨를 아브라함 가정에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 씨가 싹터 이스라엘 속
에서 자라 나물이 되고, 그 나물이 더 크게 자라 나무가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나오셨다는 말입
니다. 여러분, 씨나 나물이니 나무나 성분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생명의 언약을 받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한 그 씨는 곧 예수님을 말한다
고 갈3:16에 말하고 있으니, 다 예수님의 생명의 언약으로 자라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 속에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언약으로 오신 독생자로 보는 것
이 아니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일개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적
과 표적을 보고 선지자로 여기기는 했습니다.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서
도 배척했습니다. 심지어 이 사람의 이 모든 능력이 어디서 났겠느냐?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능력을 행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
눈과 정신을 깨우고자 그같이 그들이 실제로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겨자씨로 비유를 든 것입니다.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
는 것을 너희가 보며,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씨의 생명력에 새삼 감탄하지 않느냐? 그렇듯 모든 씨
보다 작은 것이라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만 하면, 그 생명이 약동하고 약동하여 씨에 비해 어마어
마한 큰 나무를 이뤄 공중의 새들의 안식처요 보금자리가 되어주듯, 지금 너희가 한 사람으로만 보
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다 갖다 심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아브라
함 가정에 심으신 생명의 씨가 싹터 자라 온 세상 사람이 들어와 쉼을 얻고 안식을 얻게 될 나무로
왔다는 것을 비유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도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데(요:56) 내가 바로 너희가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아다 말이지요. 그러므로 너희가 메시아를 기다렸다면, 진정 생명의 언약의
씨가 너희 속에 있어 그 생명의 씨가 싹터 자라왔다면,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은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니 공중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는 것처럼, 내게 나와 나를 영접하는 자마다 하늘 생명을 얻고 쉼을 얻는다
고, 이것이 너희가 받을 천국이라,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시라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들기만 하면 쉴 곳이 되고 영원한 안식처가 되신다는 말씀의 비유입니다.
(2) 누룩 비유
앞에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가 연결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생명 얻게 하시는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들이 서게 될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부풀게 하는 것이 누룩의 성질이
지요?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부풀게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면 됩니다. '커진다, 퍼진다'는 의미
도 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여자가 서 말의 가루 속에 넣어 전부 한 덩어리로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여자'는 이스라엘과 그 '신앙'을 말합니다. '가루'는 '온전히 드려지는
희생 제물, 온전한 희생으로 드려지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서 말'은 삼위 하나
님의 역사, 아버지의 일하심과 아들 예수님의 일하심과 성영님의 일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
독생자 언약의 복을 주시고, 그 이스라엘 신앙 속에서 그 복을 온전케 하시려고, 삼위 하나님이 함
께 일하신 것을 의미하고, 십자가에서 그 복이 다 이루어짐으로써, 이제 삼위 하나님의 구원하신
뜻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그것이 천
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이 계속
퍼져 나가는 것이 그 속성입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간에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계속
성장해가는 것이고 성장해가는 것이 천국이지 멈춰있거나 뒤로 퇴보하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있으면 계속 자라고 약동하고 운동하는 것이지, 그것이 천국이
지 미지근한 것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3)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마17:20에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
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
리라 눅17:6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
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도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 여러분, 앞에 비유의 말씀에서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씨임에도 땅에 심어졌을 땐 그것이 어떻게 됐다고 했습니까? 그 속에 생명이 있어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들인다고 하셨듯이,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같이 우리에게도 한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기고,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그것이 순종한다고 하
십니다. 한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으면 말입니다. 도무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그 믿음은 한
다고 하십니다. 한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으면, 이런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니, 이것이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일입니까?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니 옮겨진다는 것, 뽕나무더
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심어진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진짜 저 산을 옮길 수 있
다는 말씀은 아니지요. 누가 믿음으로 산을 옮겼다고 하는 것은 들어본 적은 없고, 뽕나무도 뿌리
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해서 심어졌다고 하는 것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사람이 산을 옮긴다
는 것, 뽕나무를 바다에 심어지게 한다는 것, 어떤 방법으로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을 옮겼다고 하신 말씀은 성서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다 아는 것이니, 그러면 무엇을 비유하신 것인가? 그
러나 무엇의 비유인지 다 안다 해도, 사람으로서는 옮길 수 없고 바다에 심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한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겨자
씨만큼만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겨자씨로 비유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독자의 언약, 그 언약이 영혼에 심어진 자, 그 언약을 가진 자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요, 예수님이 그 언약으로 오신 독생자인 것을 알아보고, 영접한 그것이 겨자씨만
큼의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심으신 생명의
씨요, 그 씨가 영혼에서 자라 예수님을 열매로 만나게 된 생명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만 있
으면 그것은 생명이 있는 믿음이니, 산도 옮기고 뽕나무도 바다에 심기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러면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같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정확한 믿음이 아니면, 산을
옮길 수 있을까요? 뽕나무 바다에 심기어지게 할 수 있을까요? 하늘이 무너져도 없는 거예요. 그
신앙 속에만 하나님의 독생자 언약이 살아 있고, 그 신앙 속에만 생명의 씨가 있고 싹터 자라 산도
옮기고 뽕나무도 바다에 심기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열매로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은 무엇이고 뽕나무는 무엇일까요? 산은 도무지 옮겨버릴 수 없는, 나면서부터 사람을 매
고 있는 것, 타고난 자아, 본성의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뽕나무는 원래 뿌리를 땅속에다 깊게 내
리는 식물이라 그렇게 깊게 뿌리내린 것을 들어서, 사람의 본성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자란 그 저주
의식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것이 겉으로 그러난 것이 곧 병입니다. 죄와 귀신으로 인한 질병들입
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고 병의 노예가 된 죄의 열매들, 이것이 전부 사람을 묶고 있는 산 같은 것
이요, 깊게 뿌리내린 저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말씀하신 것은, 한 사람이 아들에게 있는 간질을 고침 받으려고 제자들에게 왔는
데 고치지 못했어요.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고하자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
으시며,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 하시고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았다고 했습
니다.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믿음이 적은'하신 것은 아직 율법의 정신에서 나오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
음이 확실치 못하고,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임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
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었음에도 도대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는 간질을 고치지 못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본성의 저주에서,
저주의 의식들에서 놓여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각색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적으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같은 예수님을 진정 알아보고 믿으면, 그것은 겨자씨만큼의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은 생명이니
그렇게 생명을 노략질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할 수 없는 것을 하신 하나님이
시며 생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진정 마음에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그것은 생명이니, 자기에게
있는 산도 저리로 옮기고, 뽕나무도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바
로 생명이기 때문이요, 그 믿음은 산 것이기 때문이요, 그 믿음의 출처와 근거는 아브라함에게 언
약하신 독생자가, 마침내 사람 안에 오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그 예수님에게 두었기 때문이요, 그래
서 생명 없는 죽은 것들이 이 예수님의 믿음(생명) 앞에서는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빛 앞에 있을 수 없고, 죽은 것은 생명 앞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11:20-25에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아주 안타까워하시는 하시는 심정으로 이 믿
음을 가지라고, 강조하듯 말씀하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이해하고 바로 하려면 그
말씀을 좀 읽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
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
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
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
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른 것을 베드로가 보
고 그것을 이야기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이런 일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도 산이나 뽕나무나 다 같은 것을 말합니다. 22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
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그 뜻을 가진 믿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믿음은 지금까지 제가 겨자씨만큼만의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설명해드린 그것을 말
하는 거예요. 아셨습니까? 23에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했습니다. 그
같이 하나님의 뜻을 가진 하나님의 믿음이 되어서 산도 옮기라 하고 뽕나무도 바다에 심기우라 하라
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로써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사람을 그런 것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
하나님의 일에 대한 믿음에 서서 명하고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된다는, 그대로 되었
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여기에 의심하거나 하면 하나님의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는 말씀
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믿음으로 세워지고 명하고 쫓아내는 그것을 마음에 의심치
않아야 그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절대 명심할 일입니다. 그리고 용서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절대 명심할 일입니다. 그걸 말씀한 것이라는 것, 여러분 '아멘'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영에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자, 곧 성영님이 오신 자는 영적이요, 믿음이요,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권세, 진리를 가진 권세가 되려면, 이제 예수님의 말
씀과 표적 나타내심의 뜻을 내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여 내 안에 있는 저주와 저주의식은 사단의 것
이니 사단의 것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바로 뽕나무도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
기우라 하면 바다에 심기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것이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 산처럼 버티
고 서서 사람을 정죄로 묶고 있던 죄와 저주와 모든 저주 의식, 이런 것은 다 사단의 것이니, 믿음
으로 옮겨버리고, 바다는 사단이 지배한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니, 곧 사단이 지배한 세상의 것은
다 그 사단의 것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자는 이제 죄의 정죄나 저주
는 발붙일 수가 없는 것이니, 자신을 저주로 묶고 있던 것들을 그 믿음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속에 깊게 박혀 있던 것이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
는 것이 아니니 참으로 믿음이라는 것, 믿음의 일로 영적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열리는 이해가 확
있어야 하고,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졌다는 그것을 분명히 백 프로 믿는 것이 돼야 합니다. 백
프로 믿는 것이라는 것은 '진짜 그럴까? 에이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하나! 아닐거야!'하는 이런 것,
믿어졌다 안 믿어졌다 하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이 돼야 할 것이지만, 이렇게 요동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렇
다는 것으로 백 프로 믿고 흔들리지 않는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피조물의
능력이 차차 나타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되었으면 하나님 자녀의 권세요,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이름의 권능을 나타내시는 성영
님이 오셔 계신, 즉 능력을 나타내는 천사가 있는 것이요, 마귀가 굴복케 하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
리라"하신 것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산은 요동치 않습니다. 그처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그 믿음은 산처럼 요동하지 않음을 말하고, 그같이 요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
을 말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그 믿음은 계속 자라나서 온전한 천국이 되는 것입
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
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막16장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그 믿음은 생명이 있어 요동치 않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이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속에 버티고 있던 산을 옮겨놓는 것입니다. 왠지 불안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그 산을 자기에게서 옮겨버리라는 말입니다. 그 산을 명하여 쫓아내라 그 말입니다. 자기
속에 산들을 두고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요, 천국이 아니니,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뿌리 깊이 있는 산, 즉 두려움의 영, 슬픔의 영, 낙심의 영, 고독의 영, 고
집의 영, 비웃는 영, 정죄의 영, 비판의 영, 막무가내 영, 거짓의 영, 욕심의 영, 분쟁의 영, 혈
기의 영, 분노의 영, 미움의 영, 조급의 영, 산만한 영, 초조의 영, 책임 전가하는 영, 의심케 하
는 영 이런 등등의 부정적인 모든 것들에 지배받아 있던 것을 쫓아내고 옮겨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이 있어 옛 성품에 들어앉아 뿌리내린 이런 저주 의식은, 그것들에게 옮기라 하면 다
옮길 것이니, 저주받은 악한 영의 것이니, 내게서는 이제 끝났으니, 내 것이 아니니, 내게서 다 옮
기라고 명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권세입니까?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권세인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표적이 따르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뱀을 집
으며'하셨지 않습니까? 뱀은 저주의 영을 상징하는 짐승입니다. 뱀을 집는다는 것은 내게 저주의 영
을 물리치는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주의 영을 굴복케 하는 권세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저주의 영, 귀신을 얼마든지 묶고 결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권세입니다. 아셨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겨자씨만큼만 있던 믿음이 계속 자라도록 천국을 경험해가야 합니
다. 말씀을 근거하여 믿음을 사용함으로써 계속 천국을 침노하여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셨다, 죄 사함을 얻게 하셨다, 영생을 얻게 하셨다, 내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
가 나음을 얻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하는 등등의 이
같은 모든 예수님의 것들을 백 프로 자기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자기 양
식으로 계속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적 사람의 몸을 이루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
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서 그대로 운
동하는 말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피로 죄를 씻어주셨다고 하면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아 시
인하여 그 믿음을 말하여 복창하면 죄가 씻어지는 것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
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하신 말씀을 받아 기쁨의 복창
이 일어나고, 그 말씀으로 함께 살면 그 말씀이 부활의 날에 자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활도
모르고 자기 속에 부활이 없는데 이후에 부활하겠습니까?
천국이 어떻게 생겼을까 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신 겁니
다. 사람이 천국 가기 원한다고 해도, 천국이 그 안에 없으면 말씀이 그를 부활의 날에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고 공의의 하나님이니, 말씀을 외워 안다는 것으로 천
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죄에서 돌이켜 회개한 자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날
에 말씀이 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회개를 초월하실 수가 없다는 것,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가 분명히 된 자가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을 너희의 것으로 받았으면, 그 말을 입으로 복창하여 내놓아라. 원하는 대로 구하라 말입니
다.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믿음대로 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
시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없는 세상 것, 육의 것을 구하라고 하신 것 아니에요.
우리의 문제들도 말씀에 근거를 두고 믿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평안을 주옵소서""건강을
주시옵소서""불안을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짊어지시
고 채찍에 맞아 피 흘려 나음을 주셨고, 저주를 담당하셨고, 죄를 대속하셨고, 가난한 우리 대신
가난케 되시므로 우리로 부유케 하셨다고 하셨고, 평안을 끼쳐주셨다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이 모
든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되는 권리를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침노하라, 이제 건강할 권리
가 와 있으니 네 것으로 받아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주심을 감사하고, 나은 자임을 복창하고 병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불안 염려를 쫓아내고 옮겨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유할 권리가 있음을 감사하
고 예수님과 말씀으로 부유의 능력을 갖춰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도 따라서 부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물질로 부자 되게 해줄 능력 도무지 없습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취업시켜줄
만한 사회적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구든지 저에게서 세상 지식, 세상 정보를 듣기 원
하고 세상 학문의 말 등을 요구한다면, 저는 그런 것은 줄 것이 없기 때문에 저하고는 코드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사는 복이나 받자고, 마음의 위로나 되자고 오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감당할
자신 전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부유를 이루게 하려는 것 외에
는 다른 것을 내주는 것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요,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영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적 부유를 이루게 하려고, 지금까지 그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이 말씀을 받아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어도, 그것은 생
명이니 그 생명은 자라나게 되어 있고, 산도 옮기고 뽕나무도 바다에 심기어졌을 것이요, 영적으
로 부유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삶도 부유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복인 것입니다. 돈이 많아서 부유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능력, 마음에서 염려하지 않는 능력, 아버지가 채우시는 복으로 모
든 것을 넉넉히 감당하고, 누리고 살게 되는 복이 되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여러
분이 믿고 받는다면 영적 부유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환경도 아버지가 확실히 책임지는 것입니
다. 막16:17,18에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
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하신 것은 바로 이제 믿는 자들에게
는 예수님과 같은 영적 권세를 주겠다, 영적 권세가 와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영적 권세가 와있
으니 못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8:26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악한 영들이 배를 뒤엎어 죽이려고 바람으로 바다를 일으킨 것
을 말합니다.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어도 이같이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를 꾸짖어 잠잠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세가 믿는 자에게 와있다 그 말입니다.
막9:25-26에 "아이의 아비가 벙어리 되고 귀먹은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
라 하시니 귀신이 소리지르며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쳐서 못 듣고 말을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귀신이 듣지 못하게 하고 벙어리 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있는,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와 있고, 그 이름을 믿는자 앞에
귀신은 굴복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그 믿음 앞에는 빛 앞에 어둠이, 생명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영적 권위요 영적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적 권세요, 권위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같은 영적 권세가 와 있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것만 말씀드려도 우리 믿음의 근거가 분명해야 하는 것, 하나님
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라는 것 알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니라는 것,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능력 아니라는 것,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
로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것은 생명이니 온전히 천국을 소
유하는 큰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아멘
(4) 베데스다 못가와 병자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
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
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
치 말라 하시니 (요5:2-9,14)
요5장에 기록된 베데스다 못가와 병자에 대해서 요약하여 말씀드립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일은 비
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뜻을 깨달아 볼 수 있게 하신 것으로서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2에서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다고 했는데 '베데스다'의 뜻은
'긍휼의 집' 또는 '은혜의 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의미입니다. 병
의 저주에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예요. 죄로 인하여 들어온 이 모든 병을 낫고 자, 큰 소망으로 연못
가에서 물의 동함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이 병자들을, 마침내 오리라 언약하신 분이 오셔서 낫게 하
신다는 것을 보인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곳에서 긍휼을 베
푸실 것인데, 어떤 긍휼이냐?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그 죄로 인하여 병
들어 고통받는 것을 긍휼히 여겨, 무슨 병이 되었든지 다 낫게 하실 것이라는, 병에서 구원하실 분
이 오실 것이라는, 그것을 이 베데스다를 통해 천사가 율법 속에 두신 뜻을 나타내 미리 보여 알리
신 뜻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4에서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
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있는 연못을 베데스다라 이름하
고 가끔 천사를 보내 물이 동하게 하여, 제일 먼저 뛰어드는 자는 낫게 하시는 것으로, 그같이 하
나님이 사람 가운데 오셔서, 사람을 묶고 있는, 인생에 들어온 고달픈 무거운 짐을, 평안하기를 원
하나 평안할 수 없는, 육체에 들어온 그 모든 병을 낫게 하실 것이라는, 그것을 미리 보여 예고하
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사람으로 오신 그분에게서 병자들의 나음을 얻는 일이
나타나면 그분이 곧 천사로 말미암아 알리신 바 된, 베데스다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
다. 그분이 곧 낫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집, 성전이 오신 것이라는 것을 그 사건으로 알
리신 방법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 나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낫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
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긍휼을 베푸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한 방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람도 천사와 자연도 다 오실 예수님을 알리는 일을 하는 것에 사용되
었던 것입니다.
그다음 연못의 물이 동하는 것은, 연못 가운데서부터 물이 끓어오르듯이 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합
니다. 천사가 그 물을 동하게 한 후에 맨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 것은 바
로, 하나님께서 천사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의 역할을 보이신 뜻입니다. 율법이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율법 속에 넣으신 하나님의 본뜻을 알게 하시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3에서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
을 기다리니 하지 않았습니까, 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든 병자
는 바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가끔 와서 물을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게 되는 것으로서 모든 병자가 해당하는 것이 아니니, 그때를 놓친 다
른 병자들, 잠깐 한눈파는 사이 이미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 버렸고, 물만 동하기만 하면 즉시 뛰어
들어갈 것으로,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물이 동하는 것을 보고 즉시 뛰어 들어갔
지만, 동시에 뛰어든 누군가와 간발의 차이로 기회를 놓치고, 몸과 옷만 적시고는 실망을 가득 안
고 나와야 하고, 또 한편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반사적으로 자기도 그냥
뛰어 들어가 보는 이런 진풍경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실망이 되고 슬픈 광경
인가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앞에 놓인 인간의 영적 고통인 것을 보여준 일입니다.
낮고자 하는 그 간절한 목마름은 또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소망을 갖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지를 모르니 잠시도 자릴 비울 수도 없고, 마음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치
니 그것이 물이 동하는 것인 줄 알고, 여기저기서 뛰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이 동한 것이
아니라서 다시 힘들여 올라옵니다. 입은 옷은 다 젖고 온몸의 아픔을 견디며 간신이 기어 올라와서
돌아보니, 그사이 물이 동하여 다른 사람이 뛰어 들어가 낫게 된 것을 보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베데스다 연못가는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임을 보여준 것이란 말입니다. 죄로 인하여
들어온 이 모든 저주의 고통에서 놓여나고 나음을 얻기 원하는, 그 긍휼을 입기를 원하는 영혼들
의 형편을 보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죄 사함의 긍휼을 입을까, 어느 때나 저주가 온전히 벗겨져
온몸을 괴롭히는 병의 나음을 얻게 되어 인생의 이 고달픈 마음과 몸의 짐을 벗게 될까 하는 그
목마름을 가진 자들의 형편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데스다는 긍휼을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모든 병을 낫게 하시는, 물의 동함같이 그 은
혜를 주실 분이 오실 것임을 알리신 뜻이었습니다. 그같이 저주에 묶여있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
겨, 은혜 베푸실 베데스다로 비추어주신, 그 예수님께서 기어코 그 베데스다 못가에 오셨음을 우리
가 6절에서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병자를 물에 넣어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냥 "네가 낫
고자 하느냐?"물으셨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내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도 없어 누가 나를 좀
넣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넣어줄 사람도 없고 내가 가보려고 하는 동안 늘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갑니다"라고 자기의 큰 무력함을 고백하니,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삼십팔 년 동안 묶여 있던 병자가, 병에서 놓여나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4절에 "그를 만나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므로 병이 죄로 인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못가에 이 모든 병자가 이제는 물이 동함을 기다리며 실망과 좌절과 고통을 겪
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나음을 얻게 되는 긍휼을 입
게 되었으니, 베데스다 연못물의 동함은 그칠 것이며, 긍휼의 집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셨
으니 더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
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고 부르시는
것으로, 예수님 자신이 긍휼을 베푸실 분으로 오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이 곧
은혜 베푸실 물이 동한 것입니다. 천사가 물을 동한 것은 단 한 사람만 고침 받는 것으로 그쳤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물이 동한 것은, 이제 영원히 그치지 않는, 누구든지 뛰어드는 자마다 나음을
얻게 되는, 베데스다 긍휼의 집에 동한 영원한 물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만나 하늘에 들어가는 자가 되게 하려고, 이같이 온갖 사건
들로 비추어주고 나타내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아버지의 자비하신 그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렇게나 자세하게 나타내주고 계시니 아버지의 그 사랑과 복을 느끼고 깨닫
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오늘 말씀에 이해가 되셨고 아멘으로 받는 말씀이 되겠
습니까? 말씀을 여기서 맺습니다.
삼위 하나님께 감사 올리며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8 장 겨자씨, 누룩, 한 알만한 믿음, 베데스다.p205-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