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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사망의 무덤에서 나왔는가? / 2020년 2월 23일 주일 예배
본문 / 요한복음 9:17-44
제가 전임지에서 목회할 때 당황스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한 고령의 할머니 집사님이 의식을 잃었습니다. 지병을 앓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예배를 멈추고 상태를 살피며 다급하게 119에 신고하려는 데 한 집사님이 저에게 목사님이 기도를 해서 일으키라는 겁니다. 병원에 갈 것 없이 말이죠. 저는 할머니가 쓰러져서 정신이 없던 중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이 어이없는 일은 뭐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제가 아무개 집사야 일어나라! 기도해서 벌떡 일어난다면야 저도 좋을 겁니다. 성도들이 저를 하나님을 보듯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쓰려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면 제가 지금 이렇게 있겠습니까? 한국교회에 스타가 되겠죠!
상대방을 갑자기 난처하게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맥인다고 하는데 저 집사가 나를 지금 맥일려고 그러나 생각을 한 것은 마침 저를 눈엣가시처럼 보는 장로님 한 분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벼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듣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목사가 능력이 있어야지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선택은 119였습니다.
홍콩의 무협이나 액션 영화를 많이 본 아이들이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고 높은 곳에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기적으로 오해하고 지금 나에게도 기적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세계에 분명히 기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적을 많이 본 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믿음은 기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서만 구원의 믿음이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기적이 주인공이 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중에서 일곱 가지만을 골라 기록하였습니다. 일곱 개의 기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증언하는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타락한 인생들이 원하는 육신의 만족과 세상을 영광을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그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 어떻게 열릴 것인지를 설명하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시기 전에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는 더 큰일을 보리라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표적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 어떻게 열리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으로 죄인들 앞에 막혀있던 하늘가는 밝은 길이 어떻게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십자가의 은혜로 열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여섯까지 표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증언하는 첫 번째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으로 그 포도주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보혈의 피를 마심으로 죄인들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시작한 첫 번째 표적이 오늘 본문에서 일곱 번째 표적인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행하신 표적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로 시작된 예수님의 표적은 부활의 표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사로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나사로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모든 죄인들과 그들의 죄와 저주를 대속하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중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사로를 통해 주님의 부활을 그리고 성도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어간다는 다급한 소식을 듣고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본문 4절에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시기 위한 표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망을 먹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망에게 먹히면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지만 사망에게 먹히지 않고 오히려 사망을 먹고 다시 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시고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 죽음이 사망을 삼키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면서 믿음으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로는 병이 들어 죽어갈 때 급히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은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병과 싸우며 죽어 가는데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죽음을 그대로 맞이하는 나사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서운했을 것입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야 너는 반드시 죽어야한다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왜 날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아버지도 마음을 찢으며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죽음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아버지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며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죽는 것은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위한 한 알의 밀이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오셔서 제 병을 고쳐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내 뜻대로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며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믿음으로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죽은 자만이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뭘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무엇을 기다리셨습니까?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백세의 얻은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믿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내게 없습니다! 고백하며 믿음으로 죽기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성도들을 지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죽은 모리아 산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곳에 주님의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만이 부활의 승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런데 생명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믿음의 죽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죽고 있습니까? 그나마 조금 있는 믿음이 죽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타락한 내 육체로 살려고 말입니다. 믿음으로 죽어야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말입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빨리 찾아와 병을 고쳐주는 것이 나사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원할 때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찾아온 주님께 정말 나사로를 사랑한 것이 맞느냐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기에 잠시 처절한 십자가에 버리셔야 했던 것처럼 주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시기에 그를 죽음의 고통에 던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소원과 기대가 이루어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바라는 소원과 기대마다 다 이루어져 자기 뜻대로 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택한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고난도 주시는 겁니다. 세상의 힘과 영광을 사랑하며 자신을 의지하는 외식하는 믿음을 박살내기 위해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기도 하시는 겁니다. 자기 뜻을 십자가에 매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영광을 주기 위해 반드시 사랑하는 자녀를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성도가 가는 믿음의 길은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매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날마다 주님의 뜻을 물으며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자기가 정해놓고 주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부활의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갖고 오시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야 네가 죽어야 나와 함께 영원히 산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어서 부활을 소망한다는 많은 성도들이 살아있을 때 믿음으로 죽는 십자가의 길은 외면합니다. 나를 버려서 주님을 뜻을 받들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기부인의 십자가가 없으면 생명의 부활은 결단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아직도 내 자신으로 살려는 욕망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십자가로 나를 부인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죽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사망의 저주에 빠진 타락한 모든 죄인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생들이 피할 수 없는 사망은 죄로부터 온 저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생명을 받고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에서 떨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 소진되면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린 가지가 금방 말라 죽지 않고 나무로부터 받은 생명력을 소진할 때까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육체를 위해 산다고 금방 멸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하나님께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사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향해 죽은 자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린 또 다른 이유는 나사로의 사망을 지켜보는 인생들에게 너희들도 이처럼 반드시 죽어야할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에 오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체였습니다.
사망의 무덤에 갇혀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시체가 이 타락한 세상이라는 무덤에 갇혀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생들이 합의해 놓은 세상의 썩어질 힘과 영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죄악의 냄새를 진동하며 시체처럼 죽어가는 타락한 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생들아 저 사망의 무덤 안에 냄새나는 시체로 썩어있는 저것이 바로 너희들의 실상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죽은 시체들이 자신들의 송장됨을 모르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잠시 있다 사라질 자신의 육체를 의지하며 그 육체를 섬기고 숭배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대로 그 육체의 만족을 위해 세상의 물질과 재물과 힘과 영광과 가치가 되는 것을 자아숭배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무덤 안에서 죄악으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정욕과 탐심으로 죽어가는 그 시체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하시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의 무덤에서 나오셨습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 멸망의 성읍에서 나오라고 하였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는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롯도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소돔에서 멀리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사망의 무덤에 갇혀 죽어가는 시체들이 세상의 썩은 냄새나는 영광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마치 홍어를 삭힌 고약한 냄새에 익숙해지면 그 냄새에 중독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런 걸 왜 먹나 역겨웠는데 지금은 마니아가 됐습니다. 그 암모니아에 중독되면 더 독한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영광에 중독된 육체로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의 육체를 자극하고 만족하게 하는 그 달콤한 매력을 끊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빠진 사람들은 더 좋은 차, 새로운 옷, 더 좋은 집, 더 좋은 여행지, 더 맛있는 음식, 더 새로운 쾌락, 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먹방 프로에 출연하는 한 사람이 음식을 먹으며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먹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게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먹는 즐거움도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망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망의 무덤에서 성도들을 일으켜 나오게 하려고 세상의 무덤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본문 43절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성도는 사망의 무덤, 그 세상에서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나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듣고 계십니까? 나오셨습니까? 나가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밭도 사야하고 소도 사야하고 장가도 들었으니 가지 못한다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일을, 내 사업을, 내 소원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나가긴 나가야 되는데 발목을 잡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사망의 무덤에서 자력으로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사망의 무덤에서 구더기를 파먹고 사는 재미에 빠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돌로 막혀있는 무덤을 열고 나오겠습니까? 무덤 문이 열려 있어도 죽은 자에는 불가능한 일인데 그 무덤은 무거운 돌로 닫혀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돌을 굴려내고 죽은 자를 살려내지 않는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완전히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망의 무덤을 열고 하나님께로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타락한 죄인들은 다 죽은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사망의 무덤을 향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외치며 사망을 찢어내고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로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고 죽은 나사로에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시는 것은 내가 사망을 이기었다! 선포하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사망을 이긴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무덤에서, 죄와 사망에서 나와라 말씀하실 때에 회개하며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믿음으로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사망을 이기는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로 우리의 저주와 사망을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흐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33절부터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말씀합니다.
38절에서도 주님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것입니까? 죽은 나사로는 곧 다시 살릴 것이 아닙니까?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은 강하게 분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 아파하셨고 슬프셨으며 또 강하게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이 분노하시는 것은 죄로 왕 노릇하며 인생들을 억압하며 사망으로 권세를 잡은 마귀에 대한 분노입니다. 사망과 원수에 대한 분노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으로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마귀에 대하여 강하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을 없애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물은 그 마귀의 종노릇하며 죄에 사슬에 묶여 사망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죄인들의 그 눈물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와 저주와 고통과 눈물을 내가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죄의 권세인 사망을 없애겠다고 아버지께 드리는 십자가의 눈물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에 동참하셔서 그 눈물을 십자가로 가져가시고 모두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눈물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는 주님이 자신의 모든 죄와 저주와 고통과 눈물을 가져가셨음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과 고난의 눈물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그 죄에 끌려가지 않고 눈물을 흘려도 그 슬픔에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로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고난의 눈물로 부활의 승리와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죄와 저주와 눈물을 가져가셔서 죄를 없애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무덤에 갇히셨지만 그 무덤에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세상과 죄와 사망의 무덤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4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산 자로 불러내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풀려나 살아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사망을 십자가로 대속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그 은혜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둘째 열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을 이고 다시 산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산 성도는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합니다.
눈물과 고통과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그 무덤으로 다시 돌아가면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무덤에서 나오셨습니까? 세상의 물질과 재물과 힘과 영광과 쾌락과 즐거움으로 죽은 육체를 숭배하는 사망의 무덤에서 나오셨습니까?
주님의 눈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이 죄와 사망의 무덤에 갇혀 죽어가는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거기에서 나오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 앞으로 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부활의 소망을 이루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