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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엘 2장 28-3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의 성취로 성령 강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특별히 사도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처음부터 다른 언어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 술에 취해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열 한 사도와 함께 사도 베드로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게 되는데, 그 핵심은 ‘하나님의 큰 일’(행2:11)에 대한 것으로 사도행전 2장 21절의 말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데 있습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영어로, 어떤 사람은 프랑스어로, 어떤 사람은 불어로 말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들이 말한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한데 그것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행전의 기록 때문에 요엘서 전체 말씀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꽤 익숙할 뿐만 아니라 유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잘못 이해되기도 하는데, 본문 28절에 보면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볼 것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쪽에서는 신비한 체험, 은사 체험과 관련해서 본문을 풀기도 합니다. 혹은 성령이 임함으로 그렇게 되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제2 성령세례로 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의 임함으로 각종 은사를 행할 수 있고, 또 신비한 체험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세에 회복되는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말세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말하는데(히1:2 참조) 이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교회가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말세 이전,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성령의 부어주심이 전혀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12:3b).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행2:21, 롬10:13), 주의 이름을 참되게 부르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구약 백성의 구원은 분명히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즉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해서 성령이 그때서야 비로소 나타나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소위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그때 처음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된 주의 백성들 마음속에서 역사하셨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약에서부터 역사하시던 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2-3)라는 말씀과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런 역사가 구약에서는 한번도 없었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지만, 구약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 임하셔서 역사하셨던 것이 신약 시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인 것입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 임한 것일 뿐, 결코 성령 사역의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엘서의 내용을 보면 재앙이라는 심판으로부터 그 내용을 시작합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날’에 대한 말씀도 하시는데, 이런 재앙과 심판의 원인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특히 요엘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의 강퍅함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돌이킬 것을 말씀하시고, 돌이키지 않을 때 재앙을 내리심으로 돌이킬 것을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돌이킬 것을 말씀하시고, 나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까지를 말씀하심으로 저들이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십니다. 나아가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성회로 모여 금식하면서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재앙을 내리시던 손길을 거두시고 재앙을 내리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일이 있다면, 그래서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성회로 모여 주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줘서(겔11:19),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줘서(겔36:26)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단순히 돌이키도록 하는 데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이 유대인 중심이라면 성령의 역사는 신약에 이르러 이방인에게까지 미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선 2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앞서도 말했지만 사도들이 사도행전 2장 성령 강림과 관련된 사건을 요엘서와 연결시켜 이해한다고 할 때 그 핵심은 하나님의 큰 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요엘서는 ‘그 후에’라는 말을 덧붙여서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내용 이후라는 말씀입니다. 앞에 있는 내용은 회복의 말씀으로 너희가 마음을 찢고 돌아오기만 하면 재앙을 거두시고 다시금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회복은 구약 가르침 방식을 따릅니다. 순종하면 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고 할 때 구약은 복을 외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요엘서 자체도 그런 방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회복의 말씀으로 요엘 2장 21절 이하 27절을 말씀하실 때 땅이 회복될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아지게 됨으로 먹고 마시는 데 있어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회복에 있어 외적으로 풍족하게 되는 것, 외적인 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은 무엇이 본질인지를 말씀하시는데,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이 부분을 인용할 때는 ‘말세에’라는 말로 인용하는데, 이 모든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성히 성취될 것임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는가?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너희 늙은이가 꿈을 꾸도록 하기 위함이요, 너희 젊은이가 이상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민에게’라고 할 때 그 구체적인 대상이 너희 자녀들, 너희 늙은이와 젊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서는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어 회복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내용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요, 꿈을 꾸는 것이요,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앞에서 땅의 회복을 말씀하셨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더 중요한 본질로 장래의 일을 말하게 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 즉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ᅟᅡᆼ을 보는 것은 선지자 직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장래의 일을 말한다는 것은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예언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장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꿈과 이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던 계시의 방식들입니다. 민수기 12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선지자에게 주실 때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는 모세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소위 모세에게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있었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모세를 구별된 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29절입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만큼 모든 백성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세 시대 그리고 좀 더 넓게 구약 전체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그 말씀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는 판명성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희미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바에 대해서도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구약 시대는 선지자가 없으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물론 말씀 사역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유익을 교회가 받지만, 반드시 그들이 있어야지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없이도 얼마든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목사라는 직분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목사라는 직분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뜻하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엘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때가 있다. 그때는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그때는 너희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다. 그때는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땅의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외적인 복을 말씀하셨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지식이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사람들 중 선지자를 세우셔서 말씀하셨다면 그때는 모든 자가 마치 선지자가 된 것처럼 있게 하셔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꿈을 꾸고 이상을 보게 한다고 해서 지금도 직통계시가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만민입니다. 너희 자녀들이요, 늙은이요, 젊은이요, 심지어 남종과 여종에게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조금 읽어드리면, “예언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과 화해하신 다음에 외적인 증거를 통해서 그 화해를 보여주시면서... 곡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실 것으로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재앙의 증거인 기근과 궁핍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예언자는 정반대 종류의 증거를 통해서 화해를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교회의 회복은 땅의 수확이나 생활필수품의 풍요에 달려 있지 않는 만큼 예언자는 여기서 경건한 자들의 생각을 한 단계 더 높여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추구하게 하고 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 묘사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예언자도 여기서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연기되었던 교회의 새로운 회복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여기서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틀림없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이후로 탁월하게 소유한 지식의 빛이다.”
이런 내용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요한복음 16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왜 성령이 임하셔야만 하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가르치시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또 다른 이름으로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고, 진리의 성령인 만큼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진리는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들은 것을 말할 뿐입니다. 또한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직 들은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40일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행1:3)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질문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입니까? 이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정치적인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할 때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임에도 불구하고(롬14:17)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해서만 생각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그들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복음을 참되게 전하는 자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먹고 마시는 것,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가? 성령의 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너희 자녀들에게, 너희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그리고 남종과 여종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과 같은 역사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인해 주의 몸 된 교회의 사역인 말씀 사역으로 인해 모든 만민에게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어 탁월한 지식의 빛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회복은 지난번에 살핀 외적인 회복, 땅의 회복, 먹고 마시는 것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습니다. 이 복을 구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신약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우리는 이것이 교회의 참 된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만듭니다. 성경의 수없이 많은 기적들처럼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든 자의 병이 고쳐질 때 거기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요엘서를 통해 약속하시고 계신 바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심지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적과 이적은 그 자체로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된 열 명의 나병환자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열 명 모두의 나병을 깨끗하게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구원은 누구에게만 있었습니까? 모두가 아닙니다. 오직 한 명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아홉은 단지 육체의 깨끗함만 받았을 뿐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들과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17:18)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고침은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난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참된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기적을 말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복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적 자체를 위한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위한 기적이요, 복음을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나 표적, 기사와 희한한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것 역시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것으로 있지(행14:3, 19:11-20), 방언을 하고 표적을 보이고 기사와 희한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적과 기사들은 오직 말씀을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분명한 것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고 할 때 사도라는 직분 자체가 비상직으로 있으며, 비상직분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는 이런 표가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도의 표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말씀에 대한 조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주의 몸 된 교회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기 때문에(행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주께 있다는 것이요, 주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내용으로 와서 30절과 31을 보시면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28절과 29절의 경우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이라면 30절과 31절은 심판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이적을 하늘과 땅에서 베푼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서 놀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피와 불과 연기 기둥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 일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비유적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만민에게 부으실 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일과 관련해 요한계시록에서도 말씀하시는 바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8장과 9장입니다. 거기에서 일곱 나팔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이어지는 모든 내용은 최후 심판 이전 환난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때 인, 나팔, 대접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병렬 구조로 설명하는 방식인데, 인이 끝나야지만 나팔이 있고, 나팔이 끝나야지만 대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하여 병렬적인 구조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난과 관련해서 요한계시록은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을 말하는데, 요한계시록 8장 7절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8절에서는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또 10절에서는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12절에서는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요한계시록 9장으로 넘어가면 1절과 2절에서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이런 환난과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은 이런 말씀을 왜 여기서 하시는가? 한편으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게 경고하심으로 헛된 것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선 말씀과 함께 생각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자기 백성이 돌아올 때 회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졌지만 그 땅을 회복시켜 먹고 마실 것이 풍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측면에서 무엇이 본질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이런 저런 환난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위협하기보다는 그들을 경고하여 그들이 헛된 꿈으로 기만하거나 앞으로는 결코 있지도 않을 것, 곧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한 안식을 기대하는 일이 없게 하고자 이 말씀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칼빈).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께서 강제로라도 하늘을 보게 하지 않는 이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의 것만 추구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듣지 않으면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사는 줄 알고 그것으로만 염려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이 땅에 것에 대한 소망을 거두도록 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환난을 주십니다. 재앙을 주시고, 때로는 심판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늘 백성이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심으로서 주께서 오실 것을 기다리되 인내하면서 준비하면서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 환난도 주시고, 재앙도 주시고, 심판하시는 일들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일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비록 환난이 있고, 재앙이 있고, 심판의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혹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이런 심판의 징조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일이 있고, 또 말씀 앞에서 회개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참되게 부른다면, 거기에는 28절의 말씀처럼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준다고 말씀하신 역사가 있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참된 구원의 보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확대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참되게 부르는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거짓되게 부르고, 형식적으로만 불러선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28절,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준다고 할 때 어떤 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라는 의미에서 만민을 해석하길 원하지만, 만민은 32절에 제한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데, 그들에게만 제한되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누군가?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준다고 할 때 그 대상으로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준다고 할 때 그 대상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28절의 만민은 결코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자가 아니라 남은 자입니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하는 자입니다. 피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움을 전제로 합니다. 30절과 31절의 말씀처럼 심판의 징조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인, 나팔, 대접으로 알려진 환난은 창세기 시작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심판 때까지의 내용으로 하는데, 이런 환난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피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피하는 자가 있는데, 피하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은 2장 1절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피하는 자가 남은 자라고 할 때 누구에게로 피하는 자들인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여호와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여호와의 부름을 받지 못한 자는 누구도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만이 피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남은 자가 될 수 있는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사람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렀다는 것은 소위 효력 있는 부르심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효력 없는 부르심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효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또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겁니다. 이때 효력 있는 부르심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시간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르심이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은 영원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구절에서 “예언자의 부르심이라는 말에는 그저 베푸신 선택의 의미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자,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할 수 있는 자, 소위 남은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따라 선택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데, 그들은 누군가? 하나님께 피하는 자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는 자입니다. 남은 자가 그들인데, 그들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선택에 따른 시간 안에서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부어주셔서 진리의 빛을 더욱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누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인가에 대하여 로마서 10장은 조금 더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지금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주를 믿어야 합니다.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는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있기 위해서는 전하도록 보내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즉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할 때 궁극적인 주체는 보내신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전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지만 듣는 자들 가운데는 항상 믿는 자만 있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부르시지만 거기에 효력이 있는 자가 있고 없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 달린 문젠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환난 중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세에 일어날 일들로 말미암아 낙심하지 않고 주께로 피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노력, 열심, 우리의 덕,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을 보시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로마서 10장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5)는 말씀으로 보내시는 자에 집중하기보다는 전하는 자에게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 주체이지만 그가 사용하시는 도구들이 결코 헛되지 않고 주의 복된 역사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셨다고 해서 역사 안에서 복음을 전할 자를 보내시지도 않고, 그래서 듣지 못하게 만들고, 믿음이라는 방편도 없이 자신이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시지만 그가 도구를 사용하여 일하신다고 할 때 도구로 사용되는 것들은 결코 헛되게 사용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기도 하는 겁니다. 믿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셔야지 만 믿을 수 있지만, 그가 주신다는 전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에 대하여 믿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회개가 공로가 되고, 믿음이 공로가 되는 것은 주의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고 할 때 방편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다시 말해 영적 이스라엘이요, 주의 몸 된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신다고 알리고 계시며, 그 일은 땅의 회복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교회의 회복은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부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적이나 은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부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라 할지라도 환난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구약에서도 있었고 신약에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은 그런 시대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 역시 때가 되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반드시 유효적 부르심으로, 자녀 삼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그리고 결국 영화롭게 하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선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조건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조건으로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야지만, 주의 이름을 참되게 불러야지만, 참된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조차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들로 있습니다. 믿음도 주시고, 믿음에 합당한 고백도 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주체라는 사실을,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동시에 주께서 주시는 방편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갈 것을 권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여전히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있는가, 주의 이름을 참되게, 믿음으로 부르는 자로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이 말씀이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얼마나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말씀과 동떨어져 믿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믿음을 점검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진리의 빛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요엘서 바로 앞에 호세아서가 있지만, 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는가 할 때 결국 하나님 지식의 부재가 그 원인으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이것이 교회의 가장 큰 복으로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든 생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아는 것이 바탕이 되어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생의 목적이 되고 방향이 되고 또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