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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에서 놓임 받는 기쁨>의 줄거리:
기억 속에서 내 인생 중에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인가요? 성취나 획득? 합격이나 선발이나 만남? 어떤 기억이 있든 진짜 기쁨은 내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끝나는 거지요. 사람들은 흔히들 그리스도를 만나 이전과는 다른 이후의 삶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을 바꾸는 대신 끝내는 분입니다.
삶에서 놓임 받는 기쁨
(누가복음 2:21~40)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에서 놓임 받는 기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삶에서 놓임 받는 기쁨’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안나(헬라어로는 한나)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을 통하여 조금 낯설지만 마땅히 우리가 누려야할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침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서 율법에 정한 정결예식을 위하여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들과 마주치게 된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통해 아기 예수가 자신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기쁨과 감격에 겨워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있습니다. 26절을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29~30절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평안히 놓임을 받았다는 말로부터 시므온이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은 시므온의 인생의 목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므온에게 있어서 자신의 직업이나 신분은 삶의 부수적인 요소들이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의 마음속에서 인생의 의미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고 끝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생이 약속대로 끝나게 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과 똑같은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이제 죽음의 시점은 그리스도를 만난 뒤가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냐를 문제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시므온이 종을 놓아 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라 볼 때에 그 말대로 얼마 안 있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의 시기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약속을 받았다면 그리스도 만나기를 소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만나면 나는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만 나의 삶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마냥 기쁘게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만약 나이 서른에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면 한창인 나이에 죽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과연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다만 이로부터 누가가 시므온의 찬가를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시므온의 이야기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함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도를 받아서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이전의 생애는 무슨 일을 했든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써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놓임을 받게 됩니다. 말이 좋아 놓임을 받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고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과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기록하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나는 죽는 것이고 내 인생은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말을 빌리자면 놓임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남편이라면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남편이라는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아버지로써의 인생은 끝이 나고 아버지라는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됩니다. 회사의 직원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직원이라는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곧 그리스도를 만나면 죽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의미는 하나님을 믿어서 그리스도를 전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이 놓임의 역사가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놓임’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뤼오(ἀπολύω)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신분으로부터의 놓임이 왜 좋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놓여남이 자유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남편이라는 신분은 종노릇하고 있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라는 신분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고 아빠나 엄마라는 신분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좋게 여길 수 있으나 실제로는 영성부재 상태에서 느끼는 왜곡된 체감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장관이든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신분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러한 삶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시므온의 찬가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써 하시는 일은 이 세상이 나에게 짊어지게 했던 신분과 처지와 환경과 자격으로부터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기존의 인생이 끝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고 자격도 없으니 세상에서 죽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세상에서의 신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도를 할 때에 무조건 예수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다”라고 했지만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므온의 찬가에서 드러나는 대로 세상이 정해 준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할 때에 “엄마라는 신분에서 놓임을 받고, 직장인이라는 신분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이는 곧 당신의 생에 대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 기쁜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세요.”라고 했다가는 발길에 차일 것입니다 .
이와 관련하여 34~35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인생은 끝나기에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패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용케 시므온과 같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관점에서는 정신 나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흥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정신이 똑바로 박혀서 인생이 끝나는데 예수를 왜 믿느냐고 여기는 사람들은 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는 동안 세상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많고 얻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예수를 전도 받은 자들은 도저히 삶이 끝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으면 이전보다 더 잘 살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찬가에서 나타나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이 끝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도와 마음을 가지고 살았든지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일 뿐입니다. 지식인으로써 유명한 이어령씨 같은 경우에는 노령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문학평론가였으며 교수였고 장관까지 하셨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36~40절에서는 안나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6~37절을 보면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12살부터 정혼이 가능하고 14살에 결혼을 했다고 치면 21살까지 7년을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어서 60년이 넘는 기간을 홀로 지냈던 셈입니다. 이어서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안나가 한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시므온과 안나는 똑같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적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삶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써 내 생애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내 생애를 끝내는 분으로써 얽매였던 신분으로부터 놓아주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자녀에게 속박을 받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다면 정말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아닙니다.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 부담감과 압박감을 예전과 동일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세상의 삶으로부터의 놓임입니다. 나 스스로 이 세상을 잘살아보겠다고 여기는 것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계명을 어기는 행위를 해야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악의 열매일 뿐입니다. 죄악은 내 인생 한번 잘살아보겠다고 의욕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삶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므온의 찬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29~31절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놓임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을 더욱 조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니까 내가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또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사업도 잘되고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사업이나 건강으로부터 놓임을 받은 자의 태도일 수 없고 당연히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시므온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한 후에 며칠 뒤에 죽었는지 몇 년 뒤에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놓임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언제 몸이 죽었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살아야 되는 인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도 삶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나 열두 제자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의 21~22절을 보면 예수님이 팔 일이 되매 할례를 받았고 마리아와 요셉이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할례와 정결예식을 통해 기존의 삶에서 놓임을 받고 죽은 자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유대인들에게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할례와 정결예식의 근본취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삶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내가 사는 인생이 끝나버린 사람들의 나머지 삶은 내가 죽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결예식은 부정함을 씻기 위한 절차입니다. 부정함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요새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었다면 자신이 날씨를 느끼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있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노래에서 하나님을 ‘주재(主宰)’라고 불렀습니다. 주재는 하나님이 단순히 개인의 주인이심을 넘어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삼라만상의 주인이심을 일컫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주재이시여! 날씨가 더운 것도 당신께서 덥게 하고 계심을 잘 알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조건이나 환경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것이 완전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재정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는 돈이 없다. 요새 돈이 안 벌린다.”고 말할 것입니다. 반대로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나는 돈이 많아. 요새 돈이 잘 벌리네.”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돈이 없는 상태로 주관하시는구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돈이 많은 상태로 이끄시는구나.”라고 하게 됩니다.
몸이 아프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몸이 아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아픈 몸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우선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정결예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난다는 것은 아픈 몸이 끼어들 수도 없고 재정문제가 끼어들 수도 없고 날씨가 끼어들 수도 없으며 코로나 상황이 끼어들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이 세상을 보니 그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먼저 보고나면 그 다음에 의식 안에 포착되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내가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포착되는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볼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사냥꾼은 새를 볼 때에 사냥감으로 봅니다. 농사꾼은 곡식을 쪼아 먹는 귀찮은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새도 아버지가 먹이시고 계심을 봅니다.
백합화를 볼 때에도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사람은 꺾어다 집에 꽂아놓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보는 예수님께서는 그 백합화에서 하나님이 주재이심을 발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삼라만상의 주인이심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백합화를 보면서 아버지가 입히고 계신다고 여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장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먼저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19장 11절에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할례의 본래 취지가 인격적 속성 안에 취득된 자는 정결예식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손으로 붙잡고 책임질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못되게 굴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을 먼저 바라보면 못되게 구는 것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면 못된 남편의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남편에게 묶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하나님 다음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만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보게 될 때에 어떤 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모든 것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정결예식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과 밀착되어야 하고 할례가 뜻하는 대로 늘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도록 정결예식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밀착할 수 없다면 더럽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마음으로 끌어안고 책임지고자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의 노예가 되고 세상에 의해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 키워보겠다고 애쓰지만 실은 마음을 더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자녀를 대할 때마다 더러움을 묻히게 됩니다.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잘 해보겠다고 애쓰고 사업장에 나가서 열심히 뜁니다. 그러나 사업장에 배설물을 묻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더러운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하나님과 밀착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당 조직에서 장로나 집사나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동행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계속 세상의 종으로써 살아갈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은 신분으로부터 놓임 받는 것입니다. 아빠로써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아빠라는 신분으로부터 놓임 받는 것입니다. 놓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빠라는 이름의 종으로써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남편으로써 제일 큰 기쁨은 남편이라는 신분에서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멋진 아내와 살아가는 남편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남편이라는 신분의 종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장이라는 신분을 좋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사장이라는 신분의 종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장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사장이라는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자로써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나의 생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어서 어떤 상황이든 누구 앞에 있든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끼어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34절에서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놓임 받는 것이 기쁨인 줄을 모르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육체가 죽는 것조차 근원적인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놓임을 받아야만 합니다.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시시콜콜한 사소한 일로부터 크고 중요한 일들까지 빠짐없이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을 때에 삶은 놓임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날씨가 더운 것도 마냥 불평할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날씨를 보면 하나님이 날씨를 덥게 하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이렇게 덥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놓임을 받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놓임이 싫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책임을 지고 있고 붙잡고 있고 해야 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을 할 때에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끌고 가셔서 밀착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이 이루어지면 완전한 자유인으로써의 삶이 시작됩니다. 내가 책임지고 살아야 될 내 생은 끝난 것입니다. 내 생이 끝난 상태에서 아버지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생이 시작되게 됩니다. 아버지가 이루실 뜻이 있다면 내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장갑으로 끼시고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주의 손’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는 곧 나의 인격을 하나님께서 장갑삼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내 생이 끝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 생이 끝나는 것만큼 큰 기쁨은 없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생에서 대통령이 되든 재벌이 되든 그것은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생이 끝나고 세상의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이야말로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들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고백하시고, 정결예식과 할례의 정신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우선시하여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모든 신분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로운 삶을 사실 수 있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시므온이 노래하듯 우리 또한 생애가 끝났음을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수준의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의식 안에 잉태하고 죽은 자의 의식으로 살게 하여 주심으로써 정결예식과 할례의 취지가 내 인격의 속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