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으로 이동 점심식사로 간고등어집을 찾았다
유명세가 있는 식당이었으나 생각보다 만족도가 있지는 않았다
식당에서 가까운 임청각을 찾았다
임청각은 한창 주변 정비 및 복원을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임청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19년(중종 14)에 형조좌랑 이명(李洺)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이다.
우리가 더 관심있게 봐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라는 것이다
석주의 본관은 고성이며 경상도 안동의 유림 명문가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생가인 임청각은 왕의 궁궐이 아닌 사대부 반가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 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 병탄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을 정도로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집안이다. 또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그렇다보니 일제는 1942년 이 집안의 정기를 없애기 위해 저택 앞에 철로를 깔게 한다 물론 그러면서 99칸의 저택은 50칸 정도로 쇠락해지고 기차의 울림으로 더욱 고택이 훼손되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 일제 청산의 기치를 올렸던 전 문재인정권 때 와서야 비로소 옛 임청각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철로도 없애고 이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석주 이상룡은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나중에 신흥무관학교가 된 부속 교육기관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간다.
그리고 1925년 임시정부 첫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내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병사한다.
임청각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글씨로 전해져 오고 군자정 현판은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 선생 글씨란다.
대청인 군자정에는 임청각과 군자정 현판을 비롯하여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 파서 이집두, 석주 이상룡의 시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훼손을 막기 위해 관광객을 대청에 오르지 못하게 해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세 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람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靈室)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으로 말하는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임청각을 나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고성이씨 종택인 탑동종택이 나온다
탑동종택은 고성이씨 탑동파의 종갓집으로 고택의 집터는 신라시대 고찰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란다
그래서 종택 앞에는 국보16호인 법흥사 칠층전탑이 웅장하게 남아있다 높이 17m. 기단폭 7.75m.
전탑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법흥사에 속해 있던 탑으로 추정되는 것이지, 지금까지 탑 주위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한 것은 아니란다. 철도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어 전탑이 금이 가 있어 그 틈새를 살피느라 곳곳에 측량도구가 끼어져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차곡히 쌓여져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기단 남쪽 면에 설치된 계단은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고 있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현존하는 전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에 속한단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라
고성이씨는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썼다는 이암과 태백일사를 썼다는 이맥의 집안이다
그렇다보니 이 집안에서 환단고기를 대대로 보존해왔고 이를 통해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초 대종교를 활성화시키는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도 그렇고 이때 대종교 내의 조직 인물들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나철, 서일 등은 물론 홍범도와 오동진, 김좌진 같은 인물들이 다 대종교를 믿고 있었다
1대 교주인 나철이 중심이 되어 1909(융희 3)년 음력 1월 15일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 재동에 있던 6칸짜리 초가집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명과 함께 모아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개창한 것을 시초로 본다.
1919년 3 1운동은 개신교와 천도교 세력이 주축이긴 했지만 대종교도 함께 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4월에는 중광단을 조직했던 서일이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했고 이 대한정의단과 신민회 계열이 합작하여 대한군정회를 조직했으며 다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보이듯이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이다. 위에 언급한 대한군정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북로군정서다.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3대 교주(당시 호칭은 도사교)가 될 사람으로 공인받았다.
이 북로군정서는 훗날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대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되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편을 들어준 소련에 의해 토사구팽 당해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당해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서일은 자유시 참변에 이어 그해 9월 27일 소련군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아 휘하 병사들이 궤멸되자 이에 책임감을 느껴 대종교 도사교 직위를 계승하기 전에 자결하였다.
어쨌든 고성이씨와 환단고기. 대종교는 같이 연결되며 이 집안을 독립운동의 명가로 만든게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석주의 손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든가 대한민국이란 독립된 나라에서 하층민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었으니 이 임청각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지금의 이런 실정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