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에게 화양연화는...
<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를 읽고>
2024.11.더불어
가을이 어느새 가고 초 겨울같은 쓸쓸함이 가득한 계절이 다가왔다.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렀던 시기가 1953년 11월부터라고 하니 아마도 이맘때쯤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소설은 겨울로 접어드는 11월부터 다음해 5월의 봄을 맞이할 때까지 이중섭이 통영에서의 화가로써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섭이라는 화가에 대해서는 소 그림이나 부인과의 편지 글로만 기억했지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는 못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고향 통영의 내가 알고 있는 지명들과 장소 그리고 통영의 예술가들과 함께 통영을 스케치하러 다니던 이중섭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다.
화가 또는 예술가라면 어떤 하나에 미치도록 빠져있을 때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몰두하는 편이 많은 것 같은데 이중섭은 그림 속에 가족을 담고 가족 속에서도 그림으로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참 인상 깊게 다가왔다.
“부부 사이의 정직은 모순되지 않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틈이 생기고 감정이 뒤엉켜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어쩔 수없이 헤어져 있게 된 부부지만 자신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모습과 그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 부부의 모습이 대단해보였다.
그렇게 애틋한 가족들과 현실에서 함께 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 속에서도 그림 속에서의 가족의 모습은 행복하게 그렸다. 가족들과 늘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그였기에 가장으로써 가족들을 건사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늘 그를 짓눌렀던 것이다. 대작을 향한 열망은 그가 가족들과 함께 하고픈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기에 통영에서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밤낮없이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한다.
이중섭의 그림의 소재에는 소, 복숭아,나무, 꽃, 까마귀, 아이들, 물고기, 보름달등이 자주 보인다. 특히 통영에서는 통영의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들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가 표현한 통영은 푸르다가 아닌 통영은 붉다라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통영은 붉다. 통영의 붉음은 저녁이 아니라 새벽이고 해가 진 뒤가 아니라 뜨기 전이다. 동쪽바다로 해가 올라오기 전에 밤을 지배하던 감정이 분홍으로 바뀌었다. 일출이전이 일몰 이후보다 붉은 항구 통영“
이중섭은 술과 담배를 자주 했는데 그중에서도 담배는 늘 그와 함께 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담배 곽에서 나온 은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가 많은 걸 볼 수 있다.
“이중섭의 담배는 심사숙고의 증거라는 칭찬도 들었다. 담배를 피우며 거듭 새드 엔딩으로 달린 탓에 최악을 면했고, 차선을 넘어 최선에 닿기도 한다는 것이다.
각성과 자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손만 뻗으면 확보할 수 있는 종이가 은지였다. “
이중섭의 그림 중에서도 표지에 있는 벚꽃위의 새라는 그림은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벚꽃과 새 그리고 노랑나비가 나오는 평온한 그림이다. 현실은 이 그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힘들게 살았지만 그림은 따스하고 평화롭다.
이중섭이라는 화가는 부유한 형의 지원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접했고 그로인해 예술작품을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통영에서 나는 여러 가지 예술공예품들을 수집하기도 했고, 특히 통영의 나전칠기에 대해 높이 샀다.
“통영에선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이들을 최하로 친다. 말 대신 행동을 믿으며, 그 손으로 그 사람을 평한다. 재산도 학력도 품성도, 단련된 솜씨 앞에선 하찮다.”
통영에서 만나게 되는 문화,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이중섭에게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을 지피게 하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지 않았을까한다.
이중섭은 화가였지만 즐겨 시를 외우고 읊었다.
“시인을 ‘견자‘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 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걸, 글로 바꾸믄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믄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화가는 색깔에서 글자를 읽구, 시인은 글자에서 색깔을 본다! ”
시인은 시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화가는 그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시적이다. 휴전이 되면서 북으로 가지 못하게 되면서 어머니께서 계신 원산에서 그린 그림들을 가져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글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던 그였지만 들고 다니기 쉽게 그도 시처럼 종이에 써서 언제든 가지고 다닐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통영의 다양한 먹거리에 눈이 가고, 내가 아는 음식들에 군침이 절로 도는 듯했다. 그리운 통영의 음식들을 만나는 기쁨도 컸다.
갈치호박국, 서실무침, 대구탕, 해삼통지짐, 파래무침, 호래기젓, 뽈락구이, 유자차, 대구탕, 방풍탕평채, 멍게주먹밥, 털게, 개조개유곽, 군소무침, 벵아리메움...
이중섭은 음식을 대하면서도 생선은 자신이 갈수 없는 어머니가 계신 원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에 부러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추운 겨울 하루 종일 통영을 스케치하러 다닌다고 꽁꽁 언 몸을 따뜻한 대구탕 한 그릇이 그의 몸으로 들어가서 조금이나마 따스하게 그 마음까지 녹여줄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싶었다.
통영에 와서 대작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중섭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림으로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이 함께 하는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간다.
나는 만약에 .... 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되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헛되다고들 하지만, 또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후배 마영일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나전칠기양성소를 운영하던 유강렬이 통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그림을 조금 더 일찍 세상 사람들이 알아봐줬더라면....
이중섭에게 있어서 화양연화를 묻는다면 화가로써는 그림에 매진했던 통영에서의 6개월이 될 것이지만 인간 이중섭에게 있어서는 통영에 오기 전에 도쿄에서 가족들과 함께 했던 1주일간이 짧았지만 그에게 화양연화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화양연화의 순간은 짧아서 더 찬란하고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아니면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