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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다(성육신, 인카네이션)-라는 말은 엄청난 말이다. 1절에서 말씀은 태초부터 계시던 ㅎ님이라고 했는데, 영원 전부터 계시던 ㅎ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다니 이게 믿어지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슨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말을 믿느냐고 반문하며 비웃겠지만 이게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기적이다. 이들이 바로 지난주에 공부했던 ‘ㅎ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이들은 형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창세전부터 ㅎ님의 택하심을 입어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는 것을 알고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마13장(천국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허락, but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no~)/마치 CD를 컴퓨터에 넣어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컴퓨터와 CD가 같은 언어 체계를 갖고 있을 때에 가능하듯이, ㅎ님의 백성만이 IX를 영접하여 믿게 되는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너희 눈은 봄으로, 귀는~ 복이 있다)
이러한 경우를 요10장에서는 주님이 ‘내 양은 목자인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양의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가 청각이 아주 잘 발달하여 자기 목자의 음성을 정확히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간혹 한 우물에서 여러 목자의 양들이 섞여져서 물을 먹였어도 흩어질 때는 반드시 자기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기 때문에 전혀 혼돈이 생기질 않는다고 하니 신기하다. 그러니 주님의 양은 주께서 부르심으로 영접하는 것이지, 사람의 설득으로 예수를 믿게 하는 게 아니다. 모두 ㅎ님의 택하심 속에서 복음이 믿어짐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행전13장에서도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신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했더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양분되는 것은, 복음을 믿고 안 믿고는 전하는 자의 설득력이나 듣는 자의 인간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구원될 자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고전2.5절에서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ㅎ님의 능력, ㅎ님의 지혜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비밀이다’고 말씀하신다. 즉 우리가 IX를 믿는 것은 만세전에 정해진 ㅎ님의 비밀한 지혜의 결과라는 말이니 이처럼 크신 은혜가 어디 있을까?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IX를 믿게 되는 우리 성도요 교회이다. 생각해 보시라. 누가 영이신 ㅎ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왔다는 것을 믿겠는가? 우주물리학을 연구하는 세기적 과학자라도 이러한 영의 세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ㅎ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이신 ㅎ님이 왜?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야 했을까? 두 가지 면에서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고, 둘째는 IX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ㅎ님의 아들 삼기 위해서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인간들이 생각하는 도덕적이고 사회법적인 죄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선악과 따먹고 ㅎ님과 분리된 인간이 자신의 선악 기준을 따라 자기 주체성을 가치로 삼고 사는 라이프 패턴(삶의 양식)을 말한다. 이게 선악과 따먹고 자기세계를 구축한 첫 아담의 정체성이다.
ㅎ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할 피조물이 ㅎ님을 벗어나서 독립체로 살겠다는 탐심은 자아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종교를 만들고 철학을 연구하여 자아실현, 자기성숙, 자기계발을 추구해서 보다 지적이고, 보다 훌륭한 사람을 추구하지만 이게 무화과 나뭇잎으로 포장된 죄이다. 이러한 자아사랑의 탐심은 결국 욕심을 낳고 도덕적, 사회적 죄들을 양산해서 시기, 질투, 미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등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죄의 본질은 ㅎ님을 떠난 자아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이라고 생각하는데 ㅎ님은 악이라고 규정하신다. 가장 좋은 예가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의 종교심과 윤리 도덕적 삶은 아주 특출했다. 바리새인은 머리에 뿔 달린 자들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고상하고 경건한 자들이었다. 여하히 ㅎ님 앞에서 바르게 살까 해서, 경건생활과 청빈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산 자들이었다.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물질에 대한 경건을 실천했다, 빈부를 떠나 자신의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하여 ㅎ님께 드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과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흉내만 내는 건 이미 십일조 아님(물론 십일조는 IX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바리새인은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정말 ㅎ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 식탐으로 대표되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려고 애를 썼다(율법적 금식,1년에 한번). 어디 그 뿐이랴 가난한 자를 돌보며 구제하기를 힘썼고 금식으로 절약한 돈까지도 구제에 보태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날 풍요가 넘치는 대한민국 사회상을 보라. 온갖 먹방 프로가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까지 진출해서 먹방을 방영한다. 보다 잘먹고 보다 잘사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고 있으니 여기에 경건이 어디 있고, ㅎ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신앙이 어디 있는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짐승화된 사회로 추락되고 말았다. 그제나 이제나 이방인의 정신세계가 이러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이방적 가치관을 배격하며 ㅎ님 경외함을 제일로 삼고 살던 자들이었다. 누가 봐도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사람들의 존경과 높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져, 이 독사의 자식들아, 외식하는 회칠한 무덤들아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라고 질타를 하셨다. 한마디로 너희는 모두 악한 죄인들이요 지옥자식들이야! 라고 정죄를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런 지적이 바로 성격적 죄관이다. 각종 종교적 열심과 충성으로 공적을 쌓고 반듯한 삶을 구현해서 ㅎ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가치체계를 죄악으로 규정하신다. 이들이 무슨 도덕적, 사회적 범죄를 지었는가? 오히려 사회의 훈도요 선생으로서 앞장서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나쁜 놈들이라고 일갈하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문제는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있는 자들은 자신이 ㅎ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똥통에서 사는 구더기가 제 딴에는 보다 좋은 똥으로 곤지 찍고 연지 찍고서 ㅎ님 앞에 나아와서 ‘ㅎ님 나 예쁘지요?’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좋은 것이 사람의 눈에는 귀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ㅎ님 보시기에는 다 배설물(똥)인데 그것을 자랑하며 내미는 것과 같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이 그러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아온 것이 자랑거리였는데, 다메섹 사건 후에 눈의 비늘에 벗겨지니 그 모든 게 배설물이었음을 토로한다. 이게 은혜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그 어떤 의도 ㅎ님 앞에서는 다 더러운 옷일 뿐이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이기에 행주로 쓸 수가 없다. 이처럼 탐심으로 조성된 인간에 대해서, 렘17.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라고 고발한다. 은혜가 빠진 상태에서-구제와 선행? 종교적 열심과 충성? 그 무엇하나도 ㅎ님 앞에서는 다 더럽다고 몰수당할 것들이다. 인간 자체가 태생적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사람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ㅎ님만이 하실 수 있으시다. ㅎ님의 ㅎ님에 의한 ㅎ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사람의 의가 아닌 ㅎ님의 의이다. IX를 믿음으로 나오는 의이다. 줄여서 믿음의 의요 은혜의 의이다.(사람의 의는 율법의 의). 그래서 롬10.3절에서 이것을 지적하신다(너희가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어서 사람의 의를 이루려고 ㅎ님의 의를 힘써서 복종치 아니한다)..여기서 지식이란 (ㅎ님의 뜻을 아는 지식) 사람의 열심&거역 크다(ㅎ님을 알지 못하고 내는 열심은 자아사랑의 탐심이기 때문: 악)
ㅎ님의 의이신 IX에 의한 죄사함을 통한 구원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엡1장을 보면 창세전 ㅎ님의 구원의 사나리오가 등장한다. (창세전 IX 안에서 우리 성도를 택하사 IX의 피로 구속, 죄사함을 통해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예정하셨다)고함.
창세전에 이미 죄가 등장하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창세전에 죄가 도입되었다. 죄는 ㅎ님의 구속사에서 도구로 등용되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죄가 나쁜가? 그렇다 나쁘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도입되는 필요악일 뿐이다. 마치 방에 쓰레기통이 있어야 전체가 깨끗해지는 원리라고나 할까? 죄를 모르면 은혜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역설한다. 죄는 은혜를 설명하는 리트머스다. 자칭 의인이라고 여기던 바리새인은 은혜를 몰랐다, 그게 지옥 자식인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뱀, 선악과를 등장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용하신다. ㅎ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종용했다는 말이 틀리는가? 롬11:32보면, (ㅎ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ㅎ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과 길은 측량치 못하리로다.)하심. /봐라,->모든 사람을(택한 성도 모두를)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셨다네요. 죄 짓게 방치하셨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자를 긍휼로 구원시켜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이다.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선악과를 만드시고 동산 구석도 아니고 항상 보이는 중앙에 배치하시고 그것을 꼬드겨 먹게끔 하시려고 뱀을 이용하신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건가? 지으라는 건가? (자명한 일이다. 따먹고 나서~) 너는 눈앞에 펼쳐지는 욕심을 따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라는 의도였다.
너 인간은 자아사랑의 탐심 때문에, 결코 ㅎ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치 못하는 자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는 죄의 저주를 받아 심판받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네가 아무리 별의별 짓을 다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바로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마19장을 보면 부자청년이 주님께 질문~ 선생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주님이 ‘너 계명 잘 지켰냐?’ /청년 대답이( yes,sir!!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키었나이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자신 있다는 말이다.) /주님(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네 소유를 다 팔아 빈자에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 청년이 재산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갔더라.
주님이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말씀 =>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사람은 할 수 없으되 ㅎ님은 하시느니라(하심)
여기서 핵심은 주님이 말씀하신 ‘온전하고자 할진데’이다. 사람은 결코 율법으로는 온전함을 갖추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네가 정말 율법을 잘 지켰다면 네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신 것이다. 사람의 의는 ㅎ님을 만족시킬 온전함을 내지 못하기에 ㅎ님이 ㅎ님의 의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부자란 자신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사고체계(율법의 의)를 말한다. 즉 부자의 재물이란, 자기 의로 부요한 자기가치 챙기기를 말한다.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
이렇게 율법의 의로는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기에 ㅎ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창세전 언약의 성취자로 IX가 성육신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두 가지를 해결하신다. 앞서 말한 대로, 첫째 이유는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다. 첫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심판 받고 지옥가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죄인의 조상 아담의 부정모혈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다. IX의 성육신은 창세전 예정대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시작과 동시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3.15절에 벌써부터 복음을 주셨다.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라고..모든 역사는 창세전 언약대로 진행된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은 인간의 혈통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다는 말이다. 이를 예표적 계시로 보여주신 게 이삭의 탄생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아 육신의 능력이 상실되어 마른 막대기가 되었고, 사라 역시 경수가 끊어졌는데, ㅎ님의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삭은 엄연히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다. 사라의 태를 빌려 태어난 ㅎ님의 아들이다.
이삭은 모형이었고 그 실제가 되어 오신 분이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분이 예수다. 눅2.14절의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어보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는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성취하시러 오신 것이다. 이게 ㅎ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 성육신하신 예수를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ㅎ님의 자기백성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창세전 ㅎ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ㅎ님은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대로 오직 아들 예수의 순종만을 기뻐하시지 사람의 그 어떠한 일로 기뻐하시지 않는다. ㅎ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 아들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일 하나뿐이다.
(갈3: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다른 죽음도 많은데 하나님은 왜 예수님에게 가장 잔혹한 십자가형에 처해지도록 하셨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구약 시대에 악한 사람을 사형하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저주를 받아야 하는 자는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저주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고후5:21> 읽고,
<고후5:17~20> 읽고,
구약의 성막제사는 모형이었다. 율법을 먼저 주시고 그로 인해 죄얼이 생각나거든 성막에 와서 흠없는 짐승의 피를 흘려서 용서를 빌면 ㅎ님의 긍휼하심으로 죄를 사해주신다는 언약이 성막제사다. 그러므로 성막제사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그림자였다. 문제는 우양의 목숨이 사람의 목숨과는 가치와 다르기 때문에 우양의 피로는 온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흠없는 짐승의 실제로 오신 분이 말씀이신 ㅎ님이 성육신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육신에 우리의 죄를 다 전가시켜서 우리의 저주가 되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빌2:5~11> 읽고,
예수는 ㅎ님과 본체이셨다. 말씀으로 계시던 ㅎ님이, 창조주, 초월자가 피조물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니~ 이런 자기비하가 어디 있는가? 그 어떤 신도 인간을 구원키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의 신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요 가짜 신이다. 참신은 오직 ㅎ님 한 분 뿐이다. 이방 종교의 신은 구만리장천에 있으면서 인간 편에서 열심과 정성으로 공을 쌓아서 신을 만족시키는 게 그들의 구원관이다. 이처럼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등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을 모토로 삼는다.
문제는 ㅎ님을 오해한 유대교가 이방종교와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 ㅎ님께 나아가려고 부단히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졌다. 유대교나 인본주의에서 발생된 이방 종교나 다 똑같다. 사람의 열심이 신앙의 중심에 서 있다. 불교(힌두교)의 삼보일배나 오체투지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대표적 교리 아닌가? 수천k,세 걸음마다 절하기, 오체를 땅에 대고 절하기나 유대교의 율법 행함이나 인간의 행함에 방점을 두는 자력구원의 모습들이다. 이렇게 사람의 열심을 조장하는 종교의 밑바탕에는 인간에게도 선이 나올 수 있다는 발상에서 인보주의, 경건주의, 성화주의가 나타난다. 모두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어두움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완전한 타력구원이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창조주 ㅎ님의 자기비하와 자기희생으로 성취된 구원을 자기백성들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는 은혜구원이다. 그래서 ㅎ님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 백성들아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니까, 정말 깜도 안되는 너희를 사랑하는 여호와 ㅎ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알아먹고 감사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출34.5절 이하에서 ㅎ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같이 말씀하신다.
<출34:5~6>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는 첫 번째 율법 돌판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깨뜨려지고 3천명이 죽어갈 때에, 모세의 중보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후에 두 번째 돌판이 주어지면서 ㅎ님 자신의 이름(속성)에 대하여 알려주는 말이다. 모세는 IX에 대한 예표적 인물이다. 즉 IX의 십자가 대속으로 자기백성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ㅎ님의 성품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은 IX의 십자가 대속의 새언약을 상징한다. 아들의 피로 죄인들과 화목을 여신 ㅎ님의 사랑이 녹아있다.
그ㅎ님은 어떤 분이시다? 자비와 은혜와 인자와 진실(진리)의 ㅎ님이시라는 말이다. 여기서 인자란(어머니의 자궁: 모성애적 사랑이 넘치시는 긍휼하심을 의미함). 이게 ㅎ님의 ID다.(사랑!)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IX안에서는 심판의 ㅎ님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의 ㅎ님이시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사랑의 ㅎ님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만 잘못해도 가차없이 심판의 칼을 휘두르시는 엄중한 ㅎ님으로 아는가? 말로는 ㅎ님 아버지라고 하면서 심판의 ㅎ님으로 알고 있다면 그는 율법 아래 갇힌 자이다.
그래서 항상 두려워서 떠는(계21.8/지옥) 자가 아닌가? 아직 IX안에 있는 자가 아니다. IX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IX안에서는 자유함과 구원의 즐거움이 넘쳐난다. 정말 엉터리 같은 나를 사랑하시는 ㅎ님의 마음이 만져질 때마다 기쁨이 생수처럼 배에서부터 솟아난다. 이는 받은 자만 아는 차원이다.
주님의 성육신하신 두 번째 이유는 의로운 삶을 자기백성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이다. 성육신의 첫 번째 이유인 죄사함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는 있지만 두 번째 이유는 모르고들 있다. 주님이 오셔서 이루신 율법의 요구는 죄사함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연약해서 행하지 못한 율법의 온전한 행함을 XI가 대신 성취하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키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는 이 세상에 어린 아이로 출생하셨다.(아담처럼 어른으로 오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율법에 따라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자라면서 율법대로 삶을 살아내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대로 지키려고 애썼으나 율법의 내용(의와 인과 신)은 모르고 껍데기만 지켰기 때문에 외식으로 흐르는 회칠한 무덤과도 같았으나, 주님은 율법의 내용을 파악하여 지켜냈다. 이스라엘은 이미 모세로부터 주어진 두 번째 율법을 받은 자들이었다. 겉으로는 잘못하면 저주라고 명시되었지만 내용은 자비와 용서와 은혜가 넘치는 새언약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말을 하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물러가게 했다. 남을 정죄하기 전에 자신에게 죄가 없는지를 돌아보라는 말씀이 율법이다. 특히 10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죄 앞에서 좌절하게 만든다. 율법은 탐심 그 자체를 죄로 삼기 때문이다. 탐심이 없는 자가 있는가? 범죄를 안 저지르는 것은 행할 수 있지만, 누가 마음에서 탐심 자체를 뽑아내 삭제시킬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탐심으로 얼룩진 존재이다.
그래서 롬7.9절에서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토설하며,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 맞다’라고 고발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란, 행함으로 저질러야 죄가 성립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런 일을 안했으니까 자신이 의인인줄 당당했기에(살았고), 계명이 이르매(탐심 자체가 죄라는 고발 앞에서는 범법을 저지르는 일이 없었어도, 자신이 죄인임이 알게 되니까) 자신은 죄로 죽은 자로 인식 되더라..(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자: 죽은 자라는 인식을 하게 됨)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IX는 성령으로 출생하여 죄없는 몸을 입으셨고, 어려서부터 33세 십자가 지시기까지 ㅎ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심으로 아담이 거역한 불순종의 죄를 답습하지 않고 온전하고 완전한 의의 삶을 성취해 내셨다.
<히5:7~10> 읽으면서..
7절: 육체로 계실 때에(사생애 30년과 공생애 3년 모두를 포함하는 때다).
사53장을 보면 주님의 인생의 여정에 대해 대략 감 잡을 수가 있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순 같고 간고와 질고를 아는 자라~) 마른 땅에서 나온 순이란(육신의 모습이 아주 연약하게 태어나셨음을 암시한다.) 간고와 질고를 안다~가난과 역경을 많이 겪었고, 질병치레도 많이 하셨기에 질고를 아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령으로 잉태되셨다면 이왕이면 튼튼하게 태어나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연약하게 태어나서 질병을 달고 살았으며 게다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살게 했을까? 그 대답이 8절이다.
8절: (ㅎ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소연했다고 함) 육신이 건장해서 돌을 씹어도 소화되고 추위도 잘 안타고 근육질 몸을 가졌으면~ ㅎ님을 찾고 의지할까? 웬만한 일은 씩씩하고 저돌적이며 공격적으로 인생을 살 것이다. 그러나 강한 만큼 ㅎ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게 된다. 반면에 연약하면 매사에 ㅎ님만을 의지하고 의탁하는 신앙이 형성되는 것이다.
9절~10절: 그 모든 일 속에서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ㅎ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배우면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게 의의 삶이고 온전함이다(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ㅎ님만 의지하는 자세). 그래서 의의 삶을 살아냈기에 자기를 순종(믿는 자들)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전가시키는 의를 성취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참된 중보자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의 직임을 감당케 되었다는 말이다. 아론의 반차는 율법의 계열이고 멜기세덱의 반차는 은혜로 주어지는 영원하신 중보자 직임을 상징한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시고 계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IX께서 이루신 의를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시키셨다는 말인가? 이 부분이 구원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우리 성도 안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의의 삶을 살아낼 수 없으니까 아예 예수께서 의의 삶을 사시고 그 영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ㅎ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ㅎ님이 옆에서 남편이 되어 동행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아예 ㅎ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이 성취된 것이다(할렐루야!)
이것이 ㅎ님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셨던 성도의 구원의 실체이다. 단순히 천국이라는 곳으로 공간이동 되는 게 아니라, ㅎ님과 아들 예수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한영으로 연합된 존재가 되는 구원이다.
이것을 요14.20절(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그날에는~성령을 받으면, (내 안에 오시면 말씀이 믿어짐으로 알게 됨)
고전3.16절(너희가 ㅎ님의 성전인 것과 ㅎ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도는 ㅎ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ㅎ님의 처소이다.
롬8:14절(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게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 ㅎ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른다) 고함. 종의 영이란(율법의 영을 말함: 죄와 사망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 은혜)
(오늘 말씀 정리)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어떤 구원인가?
창조주이시며 초월자이신 ㅎ님이, 티끌에 불과한 하찮은 피조물인 사람 안에 거하시사 우리를 거쳐 삼으시고 사랑으로 한영이 되시기 위한 놀라운 구원이다.
ㅎ님은 이런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그 계획에 따라 IX가 성육신하사 십자가 대속으로 죄를 사하신 후에는 아들의 영을 보내사 ㅎ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영화로운 자리까지 성도의 신분을 높여주시는 ㅎ님의 망극하신 사랑의 구원이요, 은혜의 구원이다.
이 크신 ㅎ님의 사랑을 날마다 더 알아가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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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