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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8
고린도전서 8장 4-6절 [2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으로부터 그 내용을 시작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은 오직 특별계시인 이 성경으로부터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2장 이후 33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통해 계시된 내용에만 근거를 두고 말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서 자체가 성경은 아닙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이렇게 고백한다는, 달리 말하면 성경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때문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고백의 내용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성경의 부요함만큼 다 담고 있는가?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 해석의 결과물이라고 할 때 성경에 교훈한 교리를 총괄한 것이요,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개혁주의 신학을 잘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내용을 배우고 잘 익혀야 합니다.
제1장 성경으로부터 시작한 신앙고백서는 제2장 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하여,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하여, 그리고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제4장)와 섭리(제5장)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전한다고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에 이어 하나님 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의 시작이시고 모든 만물의 과정이시고 모든 만물의 마침이 되십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신학의 주제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순서로 되어 있어서 각각 따로 구별하여 설명하지만, 신앙고백서의 주제도 이런 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 지식인 신론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은 다른 모든 주제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론이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까지를 다 아우르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고백서를 살피면서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이 하나님 지식과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전한다고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2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앞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할 때 사실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 혹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민23:19). 사람의 경우는 어떤 보이는 사실을 통해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핑계요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면서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속성으로 나타내시는데, 제2장 1항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해서 설명하게 됩니다. 일단 신앙고백서 제2장 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1항 전체 내용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살전1:9, 렘10:10) 오직 한 분(신6:4, 고전8:4,6) 외에 없습니다.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26:14),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요4:24), 볼 수 없으며(딤전1:17),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신4:15-16, 요4:24, 눅24:39) 성정들이(행14:11,15) 없으시며, 불변하시며(약1:17, 말3:6), 광대하시며(왕상8:27, 렘23:23-24), 영원하시며(시90:2, 딤전1:17), 측량할 수 없으며(시145:3), 전능하시며(창17:1, 계4:8), 가장 지혜로우시며(롬16:27), 가장 거룩하시며(사6:3, 계4:8), 가장 자유로우시며(시115:3), 가장 절대적이시며(출3:14),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잠16:4, 롬11:36)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며(엡1:11),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요일4:8,16),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출34:6-7),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며(히11:6),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느9:32-33),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시5:5-6),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십니다(나1:2-3, 출34:7).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이 속성에 대한 부분은 고대교회의 고백에서 크게 진전한 바는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속성에 있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일치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고대교회의 고백보다 약간 더 길고 구체적으로 그 속성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인데, 전체 내용을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는 내용과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다.”는 내용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고백할 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외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영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서는 1장 1항에서부터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즉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한,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는데, 먼저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런 이유에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말합니다. 여러분, 신 존재 증명이라고 들어보셨을 텐데,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자연신학적인 논증, 우주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신이 있다고 논증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론은 늘 있어 왔습니다. 반론이 있다는 것은 그것으로 신이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은 이런 신 존재 증명 방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믿음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믿음은 로마서 10장 17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으면 모두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들의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신자조차 믿음에 있어 자라나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면, 불신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에베소서 2장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행13:48).
그러니까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논리, 사람의 설득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짐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믿게 하신다는 겁니다. 믿음이 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야지 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그것도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늘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양심의 법으로 하나님 존재를 새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밖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라는 말씀도 있는데, 하나님 존재와 관련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증거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증거 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늘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적해야지만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존재하시는데, 그분은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성경은 많은 구절들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4장 35절에서는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다른 신이 없기 때문에 같은 장 39절에서는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이고, 신명기 5장에서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5:7)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전서 8장 4절 이하 6절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우상은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고전8:4).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요, 없기 때문에 우상은 헛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알리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렘10:14-15) 반면 하나님은 존재하시는데, 어떤 분으로 존재하시는가? 구약에서부터 알리신바 된 것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안다고 말합니다.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결코 여럿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2장 3항에서 설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 분인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한 하나님만 계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바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3항을 살필 때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인데,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처럼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8:5). 그러나 그렇게 불리는 대상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본래부터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방금 언급한 예레미야 10장의 말씀처럼 사람이 만든 것들입니다. 혹은 사람이 만들지만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이 신이라, 주라 부른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할 때 결국 신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사람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의 타락과 부패가 작용하는데, 로마서 1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고 설명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고 할 때 모든 만물, 다시 말해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피조물 안에 ‘우리’라는 존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할 때 그도 역시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계신데,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중보자가 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예정론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다시 말해 때가 되어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을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고 누구를 위하여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이런 한 분 하나님을 설명함에 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살아 계시다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다시 말해 죽은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참되다는 것은 참되지 않은, 다시 말해 거짓된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된 분이라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만들었거나 인간이 그렇게 바라보는 모든 신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살아 있지 않고 참되지 않은, 달리 말하면 죽은 것에 지나지 않고 거짓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시편 115편에서는 사람이 만든 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시115:4-7)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8)고 말씀하시는데,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섬기는 자들은 결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는, 한 마디로 영적인 무지함 가운데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여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8절에서는 우상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살아 있지도 않고, 거짓에 불과한 것이, 그래서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상 앞에 가서 지극정성을 드린다 할지라도 우상으로부터 유익한 것을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혹 실제로 받는 일이 있다면 방금 말한 것처럼 죄를 죄로 벌하시는 성격으로 있을 뿐입니다. 영적인 어두움에 더욱 깊이 들어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든 생각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 다른 신이 있다고 믿는 생각들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임을 고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신들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 이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다고 고백합니다. 정요석 교수의 책(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을 참고하면 이 무한성은 다른 속성들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께서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심을 뜻한다고 말합니다(R. C. 스프로울 교수도 동일). 모든 한계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이 무한성은 상대적인 무한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한성입니다. 소위 밤하늘의 별들, 바닷가의 모래가 무한히 많다고 할 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러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의 속성 안에 하나님의 광대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하여 말하는데, 여기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공간에 있어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하나님의 광대성이라고 하는데, 이 광대성은 하나님께서 끝없는 공간을 점유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무한한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공간의 영향을 받거나 공간에 갇히시지 않고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간을 장악하시고 점유하시고 통치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시간에 있어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하나님의 영원성이라고 하는데, 이 영원성 역시 하나님께서 끝없는 시간을 점유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무한한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영향을 받으시거나 시간에 갇히시지 않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그래서 시간을 장악하시고 점유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여러분,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무(無)란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공간도 시간도 만드셨다면 만드신 하나님은 그것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무(無)일 때도 하나님은 존재하셨는데, 그것을 창조했다고 어떻게 영향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을 친히 다스릴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 사람이지만, 사람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은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것도 유한한 사람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우리 생각에는’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 33절은 언제나 진리로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무한성에 대하여 욥기 11장과 26장을 인용하는데, 욥기 11장 7절에서 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방금 읽은 로마서 11장 33절은 욥기 11장 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한하신지 사람이 헤아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능자라고 불리는데, 그분은 능력에 있어서도 제한이 없다,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 26장 14절도 인용하는데,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그가 얼마나 전능하신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이신 모든 행사는 단편일 뿐이라는 것이고, 너희에게 들린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 모든 말씀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 있어 무한하시다,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존재에 있어서 무한하시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나타내는 모든 것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겁니다. 그분의 본질, 그분의 속성, 그분의 일하심 등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십니다. 계속해서 속성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할 때 신앙고백서는 부정의 방식과 최상급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부정의 방식은 다음 주에 보겠지만 하나님을 영이라고 할 때 영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때 적어도 무엇은 아니라는 것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부정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최상급의 방식으로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다고 할 때 ‘가장’이라는 말을 붙여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있어 무한하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그분의 모든 속성에 최상급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성만이 아니라 일하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일하심은 가장 탁월하신데, 얼마나 탁월하신가? 실패나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하며 완벽합니다. 완전에 있어 무한하시다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은 거기에 부족함이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는데, 그것이 무한하다는 것은 그만큼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실수나 실패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할 때 거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로마서 11장 33절의 말씀이요, 욥기 11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왜 주셨는가를 다시금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충분히 알도록 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비록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피면서 하나님을 배워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는 사실로 모든 죽은 우상들, 그리고 거짓된 신들을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혹 다른 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우상화해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완전에 있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장소와 시간, 우리의 인식, 모든 하나님의 속성에 있어 한계가 없으신, 그만큼 최상급을 돌릴 수밖에 없는, 좀 더 정확하게는 최상급으로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최상급이라는 것 자체가 비교급인데, 하나님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