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며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라떼 이영란.
블랙스미스에서였다. 파스타를 돌돌 포크에 말아서 한입 가득 넣고는 달궈진 철판 위에서 여전히 지글거리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예쁜 빛깔의 연초록 오이와 고운 연분홍빛의 무 피클들이 나란히 내 입맛을 한층 돋구었다.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치즈가 듬뿍 발린 감자를 다시 한입 가득 밀어 넣었고 뽀글뽀글 스파클링을 일으키는 사이다의 달콤함을 즐겼다. 창밖으로 몇몇의 사람들이 지나갔는가... 나는 주절주절 무슨 말들을 뱉었는가... 따끈하고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입으로 가져 갈 즈음에야 문득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로망스’ 달콤한 사랑이라.... 클래식에 암만 무지해도 알 수 있는 낯설지 않은 그 음률이 나를 깨웠다.
'김약국의 딸들' 이번달 독후감으로 정해진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자꾸만 입안이 씁쓸해졌다. 시럽을 넣지 않은 진하디진한 사약 같은 커피를 마신 느낌이었다. 내리는 어둠처럼, 녹아드는 커피맛처럼 그렇게 스멀스멀 그들의 슬픔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자물쇠를 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며 무미건조하게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 김약국 성수. 애초에 사랑이 없었음으로 사랑을 부정하며 사랑을 인정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는 엄마인 한실 댁과 달콤한 시럽이 되고 싶으나 저어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쉽게 녹지도 스며들지도 못하는 설탕 같은 딸들이 있었다. 김약국과 한실 댁, 그들이 정말 사랑을 했었더라면.. 그랬다면 얘기는 달라졌을까.. 사랑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고 견디게 하고 바꾸고 또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졌으므로 그 긍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딸들에게 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튼튼한 자양분이 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정말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비록 소설이지만, 내 아쉬움의 생각은 여기까지 달린다.
책을 읽는내내 슬프고 화나고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냥 빨리 읽어서 덮어버리고 싶었던 마음마저 생기기도 했다. 누군가의 삶, 어떤 삶들이 회오리쳐 나에게 오는 파장은 컸다. 그만큼 여운도 커졌다.
문득 신달자 시인의 ‘커피’란 시가 생각났다.
'안으로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어도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어서 깡소주처럼 사약처럼 커피를 마신다.'
견디고 끝까지 지켜내는 해피엔딩이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토록 씁쓸하지는 않았겠지만, 인생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 갑자기 마주하게되는 비극이나 충돌은 소설 속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만 좀 더 지헤로운 우리가, 내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쩌면 현실 속에 있을지도 모를 김약국의 딸들... 그들에게 튼튼한 우산이 생기길 바란다.
"곧 지나가요~"
그들에게, 나에게 던지는 흔하지만 가장 큰 위로.
오랜만에 분개하고 흥문하며 책을 읽었다. 소설이 현실이 되던 시간. 글이 주는 힘은 강하다. 글이 주는 위로도 크다.
앞으로도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생애와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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