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 냄새
‘맛있는 밥이 곧 완성됩니다. 잘 섞어서 보온해 주십시오.’ 예쁜 목소리의 언니가 밥이 다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지난밤 예약 취사를 눌러 놓았으니 지금은 일곱 시 남짓 되었나 보다. 식구들 모두가 꿈나라인지라 조용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서 앞치마를 질끈 허리에 묶는다. 딸과 둘만의 소풍 데이트를 위해 어제저녁 준비해 두었던 김밥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어 나란히 늘어놓는다.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소금과 참기름을 두르고, 이제 시작해 볼까?
어릴 적 소풍날이면 코끝에 와 닿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주방으로 달려가 보면 여지없이 엄마는 김밥을 말고 있었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때그때 썰려 나오는 꼬투리를 하나씩 집어먹다 보면 왠지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마음속까지 든든해졌다.
냄새가 불러온 추억 하나에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따스하게 메워진다. 사람의 감각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머릿속으로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어떠한 감각에 의해 숨이 불어넣어지고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라 현재의 감정까지 지배해 버리니 말이다. 잠시 묻어두었던 기억들에 먼지가 걷히면서 선명한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날 엄마가 입었던 앞치마의 무늬, 갖은 소를 넣고 돌돌 말아 마지막에 꾹, 하고 누르면 탁 펼쳐지면서 내던 소리, 참기름 칠에 반지르르 윤이 나던 고운 자태. 마치 엄마가 내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삼십 년 가까이 된 과거의 하루가 마치 한 컷의 사진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그 시작이 참기름 냄새일 줄이야.
한 김 식은 밥을 김 위에 깔고 재료들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김밥에 대한 추억이 없다. 어려서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먹거리가 다양한 시기에 손이 많이 가고 심지어는 쉽게 상하기까지 하는 김밥을 애써 싸는 일은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드문 일이다. 소풍을 가기 때문에 김밥을 만든다 했을 때 딸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것도 이해가 된다. 김밥과 소풍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냥’ 이라는 대답 속에 함축된 다양한 의미를 고이 맘속에 접어둔다.
동그랗게 말린 김밥을 칼로 썰고 있자니 침이 고인다. 터지지 않고 예쁘게 말린 가운데 부분을 도시락통에 차곡차곡 담으면서 ‘김밥의 하이라이트는 꼬투리인데’ 생각한다. 슬쩍 입으로 몇 개를 가져가 본다. 엄마가 싸주던 김밥의 맛까지 재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서툰 솜씨로 고군분투한 흔적이 맛과 모양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당시에 느끼던 감정을 그대로 건네받는 것처럼.
미처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세월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자연스레 다가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껏 김밥을 말던 뒷모습에도, 동그랗고 예쁜 것은 가족들에게 양보한 채 엄마 몫으로 모아둔 터지고 못생긴 김밥이 놓여 있던 접시에도,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이 녹아 있었음을 이제야 마음으로 듣는다. 삼 십여 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전달된 마음의 언어들이 또다시 세월이라는 이름을 통해 내 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면 좋겠다. 너 역시 언젠가 김밥을 말다가 오늘을 떠올리겠지.
엄마처럼 다양한 감정으로 뒤섞인 관계가 있을까. 떠올리면 애틋하지만 마주하면 투닥투닥 사소한 다툼이 끊이질 않는 관계. 사랑이라는 이름에 상처 주고 상처받는 건 비단 엄마와 딸의 관계만은 아닐 테지만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마음은 흔치 않은 특별함이다.
엄마도 한때는 딸이었고, 딸도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된다. 오롯이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교감이 있다. 복잡 미묘한 감정들은 세월이 지나며 희석이 되기도, 점점 진해지기도 하며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또 딸에게서 엄마에게로 전달된다. 그 중심에 흔들리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없다면 비에 녹아내리거나 태풍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헤아려지는 엄마의 마음이라니. 돗자리를 펴고 김밥을 나눠 먹으며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고 추억을 나눈다. 바람에 흐릿하게 퍼지는 참기름 냄새가 향긋하다.
박새미 / 2020 창작산맥 수필부문 신인상 등단, 시드니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