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시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였다. 전 재산을 잃고 화병을 얻어 병세가 점점 악화되던 아버지는 두문불출하고 누워계셨다. 이웃들도 문병을 와서 보고는 아버지가 곧 죽게 될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아버지의 한숨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도 찢어지듯 아팠다. 우리 가정은 졸지에 아버지 때문에 앞이 캄캄해졌다. 흑암의 세력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야말로 막막하고 절망적이었다.
그 때 교회에서 한 교역자가 찾아왔다. 윤석면(尹錫冕) 전도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권면했다. “교회에 나오시오. 지금 김씨에게는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는 주님께 맡기면 해결됩니다. 김씨를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토록 피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다음 주일, 아버지는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셨다. 그리고 첫날 교회에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후 일생 동안 주일성수를 하셨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한 뒤로 혹 마을 사람들이 눈치 챌까봐 3년 동안 성경과 복음찬미를 두루마기 안에 감추고 다니셨다고 한다. 과거 아버지의 잘못된 생활로 주님을 욕 뵈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미 아버지는 몰라보게 달라지셨다. 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어린 자녀들을 부양하고 교육하기 위해,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셨다. 아버지는 신앙의 힘으로 그 힘든 일을 불평 없이 기쁨으로 감당하셨다.
그러는 동안 원망과 절망의 긴 터널을 지나 광명의 새아침이 찾아왔다. 이제 아버지는 믿음, 소망, 사랑의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전화위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버지가 일평생 즐겨 부르신 찬송은 455장이다. 아버지는 이 찬송을 항상 감명 깊게 부르셨다.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집에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섭리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열렬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교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유교와 불교는 이 땅의 신앙을 주도해온 두 종교가 아니던가. 비록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은연중에 유교와 불교의 신앙과 관습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집안은 처음부터 불교와 인연이 없었다.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연이었다. 불교와 악연을 맺게 된 것은 조부(祖父) 때부터였다. 그 뒤 우리 집안은 의도적으로 불교를 멀리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이 기독교신앙으로 우리 가정을 택하시기 위해서 벌써 손을 쓰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부는 청년 시절, 동학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셔야 했다. 당시 동학도들은 벼슬아치들이나 양반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부께서 당도한 곳은 공주의 갑사(甲寺)였다. 절 안은 아무도 없었다. 승려들도 동학혁명에 앞장서서 활약하는 시절이었다. 하는 수 없이 조부는 혼자 빈 절에 숨어 있었다. 하루 이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던 조부는 먹을 것을 찾아 절 안을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어느 방의 다락에서 조청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허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때마침 승려들이 일제히 절로 돌아왔다. 조부는 변명도 할 틈 없이 어느 승려가 휘두른 몽둥이에 종아리를 맞아 골절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조부는 한 평생 다리를 절룩거리며 살아야 했다.
조부의 이런 악연으로 인해 우리 가정은 자연스레 불교와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부는 그 이후에 바랑을 멘 승려가 마을에 나타나면 한사코 그를 마을 밖으로 내어 쫓으셨다 한다. 아마도 가슴 속 깊이 원한이 사무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우리 가정이 불교를 가까이 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