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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상적 성령충만 악령충만 분기점>의 줄거리:
오순절 성령충만의 사건을 일회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특별한 기적이나 은사로만 연결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충만함은 성령충만이든 악령충만이든 일상적인 일입니다. 내 인격 안에 가득하게 된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의 첫번째 현상이 너무 평이하게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일상적 성령충만 악령충만 분기점
(사도행전 2장 1절~4절)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일상적 성령충만 악령충만 분기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일상적 성령충만 악령충만 분기점’
본문 말씀을 나누기 전에 광고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주일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의 시간을 오후 7시에서 오후 7시 30분으로 변경합니다. 염두에 두셔서 참여에 차질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금요일과 같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령과 인격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성령으로 충만하거나 악령으로 충만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 사건입니다. 다만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분기점이 존재합니다. 분기점이 있다는 것은 이전에는 공통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통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다가 분기점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의 상태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악령충만의 상태로 가는데 이것이 일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본문 말씀을 통해 인격의 실질적인 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며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흔히 이러한 일들은 나의 주체성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은 언제나 악령 혹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인격의 주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말씀이 “인격의 실질적 현상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오늘은 같은 말씀을 “충만함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나타나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와는 무관한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말입니다. 말은 곧 인격이 가장 먼저 표출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변화란 이른바 하늘의 언어로 표현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방언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서 말의 변화는 의미를 알 수 있는 외국어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난 사건이 베드로의 설교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은 말 즉 언어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염두에 두자면 “성령충만 전에 한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는 말이든 성령으로 충만하기 이전에 하던 말이든 이 세상의 언어라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어도 이 세상의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을 하면 의미가 다 통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말이 있다면 악령충만한 말도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 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일상적인 삶에서 악령이 역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악령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인격의 표현이 주로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악령으로 충만한 말을 하며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성령충만이나 악령충만은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적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충만함 자체는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만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냐 악령으로 충만할 것이냐의 분기점으로 나누어질 뿐입니다. 이 충만함을 일상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3~34절을 보면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가득하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채워져서 여분이 넘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풀어보자면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넘쳐 나온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어서 35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말씀을 단순화하여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과 악령충만의 의미를 알게 하는 힌트가 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쌓았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직역해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의 보물로부터 선을 내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어지는 부분 또한 “악한 자는 그 마음의 보물로부터 악을 내나니…”라고 직역됩니다. 물론 이 쌓는다는 번역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미적으로 잘 부합하는 의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에 보물이 쌓여있는데 그것이 선한 보물이냐 악한 보물이냐의 차이입니다.
선한 보물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악한 보물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의 가치가 보물로써 비유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을 채울 수 있고 만족할 수 있고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담은 보물은 실제로 갖고자 하는 소원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바로 마음의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돈을 마음의 보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건강과 장수를 마음의 보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형통을 마음의 보물로 여길 수 있으며,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승진을 마음의 보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물이 정해지게 되면 소원하게 됩니다. 그것을 실제로 갖고자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소원이 나타납니다. 소원을 하는 동안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움직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한 보물이든 선한 보물이든 보물을 가지면 소원하게 되고, 소원하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며 쌓아집니다. 보물로 인하여 움직이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더미에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보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소원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마음에 보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소원하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소원에 의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며 쌓아감이 나타나게 됩니다. 쌓이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기능적 권능의 행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은사를 받든지 기적을 행하는 것과 연결을 시킵니다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상적으로 모두가 충만함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에서도 제일 먼저 나타난 성령충만의 증거는 말의 사건이었습니다.
충만함이 일상적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양동이에 물을 채우는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양동이에 물을 계속 부으면 차오르다가 넘치게 됩니다. 인격을 양동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공백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있음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있는 것 중에 가지면 채워진다고 느껴지는 것이 보물이 됩니다. 그 결과 보물을 소원하게 되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인격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마치 양동이와 같아서 가득 차게 되면 밖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이 넘쳐나는 부분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말은 인격을 대표하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로 행동이나 몸짓이나 표정도 충만함에서 넘쳐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 잠을 주무실 때 제자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 나타난 말과 행동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는 말과 몸짓에서 소원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몸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살아야 장관 자리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러한 소원을 갖고 있는 제자들에게 광풍노도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두려움과 공포로 채우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깨질 위기에 처하자 두려움과 공포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충만함으로 예수님을 깨우는 말과 몸부림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을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인격 속에는 낙담과 좌절이 충만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사업으로 부자가 되어 잘 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원과 반대되는 상황이 펼쳐지자 낙담과 좌절이 생겨나게 됩니다. 낙담과 좌절의 충만함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채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낙담과 좌절이 넘쳐난 결과로써 자살이라는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충만함과 넘침은 삶의 어느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부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배우자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싸우고 있는데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 그리고 생각 감정 의지를 움직이는 소원과 바람이 살아있는 인격 안에 분노로 충만해집니다. 그 충만한 분노가 말로 나타나며 소리를 치게 합니다. 충만함과 넘침은 꼭 이렇게 두려움이나 공포나 극도의 좌절감이나 분노나 시기 등의 부정적 감정들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에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인격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이처럼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날 수 있는 넘침은 인격의 충만함으로부터 나타나게 됩니다. 무엇으로 충만해졌는가는 둘째 문제이고 바로 충만함으로부터 나오게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상적이기에 인격의 충만함 또한 일상적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과 악령충만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어디에서 갈라지게 되는지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충만은 말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악령충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예외 없이 악령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격의 어떤 지점에서 악령이 임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육체를 통해 세상에서 만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사건과 사물과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있음의 느낌을 강하게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에게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하게 일어나고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소원하게 됩니다. 소원하기로 넘어가면서 악이 시작되고 악령이 개입합니다. 사람은 추구하고 바라는 소원이 생겨날 때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이 소원을 기점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처럼 내 안에 악령이 살게 됩니다. 생각을 움직이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가 발동하는 모든 주체적 에너지는 악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재물을 소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가지면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확신 아래에 재물을 소원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주체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소원의 단계에서 악령이 개입하게 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악령이 움직이며 반복해서 마음에 쌓아가고, 충만해진 상태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충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있기에 육체로 접한 대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것까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에게 주어진 유전 죄의 체질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소원의 단계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마음이 소원하는 상태로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며, 다른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에 있음으로 느낄 수가 없음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유일한 보물이 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이론적 믿음을 가지고 나를 진단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있음이고 하나님만이 보물이라는 이론적 믿음에 근거해서 세상 것을 있음으로 느끼고 세상 것의 좋음을 확신하는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인정하면 소원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고 악령의 개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론상의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알아야 적용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론상의 믿음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시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으로서 있음을 느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을 있음의 대상으로 느끼고 있다, 육체로 만나는 것 중에 좋음을 확신하는 죄의 체질이 발동되고 있다, 이러한 나는 부인되어야 한다, 나의 부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이러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하는 것이 기억해야 할 이론적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데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있는 나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예수님의 죽음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질 때 성령은 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하시고, 하나님을 좋음으로 확신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소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며 쌓아지게 되고 충만해집니다. 이 충만함으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홀연히 이루어졌음을 특징으로 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변화의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시간을 두고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충만함의 상태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충만함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날마다 성령에 의해서 인격의 양동이가 가득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부터 말이나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성령충만과 악령충만의 분기점은 소원의 단계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나와 세상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걸려서 세상이 나의 마음으로 들어올 수 없고,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걸려서 나의 마음도 세상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었음을 의식할 때에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면서 내 인격 안에서 쌓아 가시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령에 의한 생각이 충만하고, 성령에 의한 감정이 충만하고, 성령에 의한 의지가 충만해져서 일상적인 말과 행동과 몸짓과 표정에서 성령이 드러나시게 됩니다.
성령충만의 비밀은 의식적으로 십자가를 기억함에 있습니다. 죄의 체질이 늘 살아있기 때문에 의식으로 십자가를 늘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나를 부인할 때에 성령은 임하십니다. 그럴 때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것보다 들리는 어떤 것보다 확실하게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주체가 되셔서 쌓아가실 것이고, 그 쌓은 것이 밖으로 넘쳐 나오는 충만함의 삶을 살게 해주실 것입니다.
흔히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성령충만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으셨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현격한 변화를 동반하는 것만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닙니다. 악령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임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마다 돈을 강조하고 있다면 악령에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소원이 충만하여 말로 넘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을 쫓고 싶다면 친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세상을 탈출하는 연쇄 사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악령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내 안에서도 일상적으로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일상적으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 박사가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팝니다. 괴테는 구원의 낙관론을 가지고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는 쪽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만 실제로 이런 낙관론적인 구원관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을 소원하기로 일관하는 삶 즉, 지금 돈 많이 벌기를 소원하고, 자녀가 형통하기를 소원하고, 건강하기를 소원하고 있다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없다면 그 무엇을 소원하더라도 영혼 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심지어 목사님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수적 부흥을 소원하고 있다면 목회 현장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께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목회의 부흥이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음의 보물이 될 수 없고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이 마음의 보물이 될 수 없으며, 자녀의 형통이 마음의 보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소원의 주체로 알게 하는 것은 마귀의 전략입니다. 실은 마귀가 주체라는 것을 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하며 세상을 소원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소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 주셔야만 합니다. 설령 몸이 아플 때에도 성령이 주체가 되신다면 건강을 소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보물은 건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보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에 대한 문제, 재물에 대한 문제, 인생의 진로에 대한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주체가 되시는 분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지 않은 내일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을 성령님이 받으셔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면서 내 안에서 쌓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쌓은 것이 넘쳐나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소원이라는 분기점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성령충만은 이루어집니다. 내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 성령의 충만은 일상적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악령의 충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충만이 일상이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사건입니다. 성령충만은 결코 오순절 날에만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특별히 오순절파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상적으로 일어나야만 합니다.
성령충만의 첫 번째 증거는 말입니다. 인격에서 가득하게 쌓여진 것이 밖으로 흘러나올 때 먼저 말이 바뀌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말없이 세상을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충만은 일상적 사건입니다. 세상 것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단계까지는 죄의 체질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소원하고자 할 때 악령의 개입은 이루어집니다. 악령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고 그로부터 충만함으로 악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하여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면 다 악령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나 악령충만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꼭 기억하실 것은 세상 것을 소원하기로 넘어가면 영혼을 악령에게 팔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소원한다는 것은 “악령이여! 나는 세상 것을 얻고 싶으니 내게 들어와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해주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돈을 소원하고 건강을 소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소원을 갖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분명합니다. 내가 건강이 나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의 창조주이시라면 나의 몸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실까요? 의사일까요? 물론 의사는 지식을 통해 나의 몸의 상태를 파악하고 적절한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께서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몸이 아플 때라도 죽으면 죽으리라 먼저 성령충만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건강을 소원하고 싶어 하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라 부를 정도로 괴로운 지병을 평생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원을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만을 보물로 여긴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아픈 몸에 대해서도 성령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어떤 병원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을 것이며 의사를 추천받게 하셔서 합당한 치료를 받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병원을 가더라도 그 과정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면 인격에 충만함이 생겨납니다. 그럼으로써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이 일상인 자들이 바로 교인이고 성도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악령충만이 일상인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악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자아의식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남자라는 자아의식, 여자라는 자아의식, 부모라는 자아의식, 사장이라는 자아의식, 실업자라는 자아의식과 같은 세상이 주는 자아의식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나의 신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악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충만이든 악령충만이든 충만함이 일상의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소원의 분기점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나를 부인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만 소원하는 중에 땅을 향해서는 오직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 충만하게 하시고 그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