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왕이란 권좌를 놓고 부모형제간 치열한 사건이 발생한다 왕자의 난이다
그 2차 왕자의 난에서 권좌를 차지하지 못한 패자의 묘가 전주에 있다 회안대군묘이다
이름은 이방간(李芳幹).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고려왕조에 벼슬해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회안군(懷安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러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가장 첨예하였다.
태조에게는 전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과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방원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개국에 가장 공이 크고 야심과 재질이 큰 인물이었던 만큼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방원은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다(태조 7년 12월에 추록됨). 또한 세자 책봉 경쟁에서도 탈락했다. 태조 즉위 초의 세자 책봉에서 태조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신 배극렴(裵克廉)·조준(趙俊) 등은 그 위인(爲人)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며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결국 여덟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에게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지게 하였다. 이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방원과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방원은 권력구조의 핵심에서 차츰 밀려나고, 진법훈련이 강화되어 세력 기반의 마지막 보루인 사병마저 혁파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밀모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단번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이숙번(李叔蕃) 등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朴葳)·유만수(柳蔓殊)·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였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었고, 정치 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의 바로 위 동복형인 방간은 1398년(정종 즉위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을 도와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그 뒤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고, 1399년 풍해도(豊海道)와 서북면의 병사를 분령하였다. 이듬해 지중추부사 박포(朴苞)의 이간에 회유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면서 토산(兎山: 지금의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이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당했다.
태종연간에 여러 차례 치죄(治罪)가 논의되었으나 태종의 거부로 완산·홍주로 옮겨지고 직첩이 몰수되었을 뿐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정종과 이방원의 관용으로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배된 토산이 전일에 군사를 분령한 곳이기 때문에 후일의 염려가 있다 해서 안산으로 이치(移置)되었을 뿐, 전지(田地)와 식읍을 받았으며 매년 초하룻날에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1416년 형조·대간의 집요한 청죄로, 아들 이맹중(李孟衆)과 함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1417년 홍주(洪州: 현재 홍성)로 이치되었다. 세종 치세 때에도 누차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상왕과 세종의 관용을 받았다.
1419년 노비 100구만 속공(屬公)되었을 뿐 천명(天命)을 누리다가 홍주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선원록(璿源錄)』에서 제외되다가 1680년(숙종 6)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계품(啓稟)에 따라 그 자손과 함께 『선원록』에 재록(載錄)되면서 신설되었다.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묘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형태와 달리, 태인의 정극인 묘처럼 부부묘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묘가 부인의 묘이며, 위의 묘가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이다.
이 묘자리가 군왕지지(君王之地)라 하여 지기가 흐르는 곳에 뜸을 떠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뜸을 뜬 자리가 남아 있다
이방간은 조선초 정치사의 한 주역일 뿐만 아니라, 전주 지역사와 관련해서도 주목된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역사문화적 특질과 유산을 지니고 있다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에 있는 이 묘는 2005년 12월 16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