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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5장 1-6절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금까지 언급했던 북이스라엘의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지 않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부터 보게 되는 5장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저들이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주에 살핀 내용은 저들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만을 쌓고 있는 저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징계를 하십니다. 징계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번 징계하시고, 또 다시 징계하시고,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징계하심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마치 누구와 같은가? 애굽과 같았습니다. 이미 멸망하여 사라진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처럼 재앙을 내리고, 그들처럼 멸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강퍅하고 그 마음이 완악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어떤 말씀도 하셨느냐 하면 아모스 4장 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하셨던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징계를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계속하겠다는 것이고, 그런 징계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1:12)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의 너희 행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1:13) 하신다는 말씀도 하는데,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불변하신 사랑, 그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강퍅하고 완악하여 돌이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에 징계를, 말씀에 말씀을 계속해서 하실 것을 알리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4:12)고 하시는 겁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저들을 향한 애가로 나타나는데,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히브리어 원문의 시작은 ‘들으라’입니다. 무엇을 들으라고 하시는가?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애가’란 슬픈 심정을 읊은 노래인데, 하나님께서 지금 북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슬픈 심정으로 노래한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2절에서 나옵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이고, 너희는 이런 나의 슬픈 마음의 노래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다고 할 때 그 일은 누구로 말미암습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앗수르에 완전히 멸망하지만 앗수르를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애가를 지을 수 있는가?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북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징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들의 강퍅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완전히 멸하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멸하신다고 해서 택하신 백성을 버리신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징계를 하시는 것도, 이 땅에서 완전히 멸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가를 지어 저들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저들의 강퍅함 때문에 완전히 멸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보여주고자 하시는데, 그 일 자체가 하나님께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슬픔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녀입니다. 그런 자녀를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다고 할 때 그것보다 안타까운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죄를 너무나도 미워하신다는 것과, 미워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 죄 가운데 거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지 더 이상 죄를 짓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생명을 거두시기까지 해서라도 죄와 결별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결과인 죽음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는데, 죽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더 이상 짓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여기에 완전 성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죽는 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한해서만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는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다시 말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지만 그 목적으로 가지 않을 때 징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징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죽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하나님은 죄와 결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죽이시지만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을 보지 못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죽음이 완전 성화로 들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죽음 이전,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완전 성화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이 있는 것이고, 그런 죄와의 싸움에서 전신갑주를 취하여 싸우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모스를 비롯하여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 싸움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징계를 주시는 이유도 이 싸움을 더욱 잘 싸우기 위해서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입니다.
지금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동일한 차원에서입니다. 단지 너희가 멸망당할 것이라는 정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너희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말씀을 하고 계신 것 자체로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는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실지라도, 미래가 없는 것처럼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 자체가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처녀라고 하면 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순결을 지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아닌 명하시지 않은 예배로 드리고 있는데 어떻게 순결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조롱하듯 하는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으로 순결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갖 부정에 자기들을 내맡겼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칼빈주석).
반면 칼빈은 처녀라는 말로 저들의 가냘픔을 나타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연약하다, 견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처녀 딸 시돈아’(사23:12), ‘처녀 딸 바벨론이여’(사47:1)와 같이 순결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에게도 ‘처녀’라는 표현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로 앞장에서 하나님은 징계에 징계를 더하셨는데, 그런 징계로 말미암아 저들은 연약할 대로 연약해진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모스 당시 여로보암 2세 때는 부국강병의 시대입니다. 연약하고 견고하지 못하다고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징계에 징계를 더하실 것이고, 그 결과는 연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지금 괜찮다는 이유가 나중에도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국강병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면, 주신 이가 거두실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처녀에 불과하다. 연약한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지금은 부국강병할지라도 죄를 버리지 않으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으면 징계에 징계를 더하여 처녀처럼 가냘픈 이스라엘로 만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로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땅에 던지운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어지는 3절의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전쟁을 통하여 그들의 몸이 시체처럼 되어 자기 땅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일으킬 자가 없게 되는데, 시체로 있기 때문에 일으켜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일으킬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천 명이 전쟁에 나갔다가 백 명만 살아남고, 또 그 백 명이 전쟁에 나갔다가 열 명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남은 자 사상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천 명이 나가서 천 명 다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게 하신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은혜를 완전히 거두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것이고, 국민 없는 국가가 없는 것처럼 결국 북이스라엘은 파멸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러한 파멸로 인하여 그나마 남은 자들이 울게 되는데, 아모스 5장 16절과 1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광장, 거리 할 것 없이 온통 울음바다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파멸이 있는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들 가운데로 지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당시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때 애굽 온 땅에는 눈물바다가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이 건너가는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는데, 이런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죽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가?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 번째 재앙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어린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합니다(출12:7).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는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예배하는 것이 없습니다. 금송아지 신상을 두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레위 족속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흉내는 냅니다. 흉내를 낸다고 해서 열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명하신 그대로가 아니라 변경하여 드립니다. 명하지 않은 것을 고안해 내어 드립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멸망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5절과 6절은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될 7절 이하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율법의 어느 한 부분도 온전히 지키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때 너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란 겁니다. 그런데 너희에게는 그런 순종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칠 수밖에 없다, 징계에 징계를 더해도 안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 4절로 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북이스라엘의 파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파멸을 말씀하실지라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 파멸을 말씀하시는가? 왜 완전히 멸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등지는 것이요,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징계를 말씀하고, 완전히 멸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겉으로는 징계와 멸하시는 것이지만 결국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백성이요,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하시겠다, 멸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너희는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찾으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택자에게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때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또 잘못해도, 그래서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처럼 비춰지는 때가 있더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택자가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는 않을지라도 죄의 길은 분명 죽음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생명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택자에게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므낫세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히스기야 왕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다윗의 길로 행했다면, 그의 아들 므낫세는 다윗의 길로 행했던 히스기야의 모든 길을 엎어버렸습니다. 이런 므낫세에 대하여 열왕기하 21장 11절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16절에서는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이런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역대하 33장 10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0-13)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처럼 므낫세가 환난을 당함으로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55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면서 그의 인생 대부분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택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편에 있던 강도 중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의 구원을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악만을 행하다가 결국 사형까지 받게 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다른 강도와 함께 욕했던 사람입니다(마27:44, 막15:32). 그러나 언제 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두둔하기 시작 했습니다(눅23:40-41). 그리고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구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눅23:42-43). 늦은 것 같아 보이지만 늦은 때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십니다.
다만 이런 내용 때문에 나도 늦게 회개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늦은 것처럼 보여도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죄에 거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모스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고 있다는 것은 너희가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 징계에 징계를 더하여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림으로 돌이키게 만들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 대한 정당한 우리의 자세는 늦은 때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야 돌이키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받고 파멸되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로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높고 깊은지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그 은혜를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감사를 돌리도록 하기 위해 알리신 것입니다. 내 공로란 하나도 없다는 것,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우리 됨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정론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죄를 지어도 구원에 있어 실패함이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무뎌지는 현상들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로 말미암아 은혜를 더욱 깨닫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죄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거해도 되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더 알기 위해 죄 가운데 머물러도 되는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물론 우리에게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것이 모든 성도의 탄식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탄식이 있다고 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롬8:25). 그래서 확증적으로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심지어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로 이런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모스 4장에서부터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인데, 돌아온다는 것은 방향만 바꾸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분명한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5절과 6절은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 말씀하는 것이고, 7절 이하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 내용만 살피겠는데, 5절을 보시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여로보암 1세 때부터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두던 곳입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다고 벧엘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 시대 때 길갈은 매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림 받도록 이끌었던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곳에 하나님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모스서에서 브엘세바는 여기서 처음 나오는데, 벧엘과 길갈과 같은 성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창세기 21장 33절인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는 이삭을 바치고 난 뒤 이곳 브엘세바에 머물렀습니다(창22:19). 이삭 역시 이곳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입니다(창26:23-25).
그런데 이 브엘세바는 북이스라엘 지역이 아닙니다. 남유다 지역입니다. 예루살렘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북쪽 끝 단에서부터 남쪽 끝 브엘세바까지란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쪽에 있는 종교적인 중심 도시 벧엘과 길갈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남유다에 속한 브엘세바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남유다 지역에 속해 있지만 브엘세바 역시 벧엘과 단과 다르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들의 열심은 남유다의 맨 아랫 지역에까지 찾아갈 정도였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교하자면 브엘세바보다 훨씬 가까운 예루살렘 성전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리보다 두 세배는 더 가야 하는 그 거리를 가서는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참된 종교가 아닌 거짓된 종교라면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아닌 명하시지 않은 예배, 하나님께서 명하셨지만 사람이 좋다고 여겨서 일부 수정하여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는 환영하지만, 철저히 하나님 명령에 따른 예배는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하나님은 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회개의 진정한 성격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거짓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 그는 ‘너희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올 때에, 지금까지 집착해 온 모든 미신적 행위를 끊어 버려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죄인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스스로 애통하며, 이전에 즐기던 모든 것을 미워하며,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만 온전히 헌신할 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칼빈은 그 시대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하고 거룩한 예배에 교황권의 잔재들을 혼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많은 중재인들은 우리의 교리가 나무랄 데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느 정도 중간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복음적인 가르침과 가톨릭교의 교리를 조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혼합된 것을 전혀 참아 주실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힌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이 어두움과 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패란 제거되지 않는 한 항상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뒤엎기 마련이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 세상의 타락이 만연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한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도 여전히 진리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 그것은 지금 벧엘을 찾고 길갈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이 특심일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합당한 예배가 아닌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브엘세바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만 너희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5절 후반부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이이라 하셨나니” 브엘세바는 빠져 있는데, 남유다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특별히 북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종교 중심지입니다. 그곳을 하나님께서는 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계속해서 그곳을 찾기 때문에 그곳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다면 세상을 향해 있는 그것을 치실 수 있습니다. 물질에 우리 마음이 있다면 그 물질을 치실 수 있습니다. 자녀에 우리 마음이 있다면 그 자녀를 치실 수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 등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하여 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향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6일은 너희를 위한 날로 있도록 하셨지만 일곱째 날만큼은 내 날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날에 6일의 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섞고 있습니다. 주일이 주일이 아닌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 혼합을 제거해야 합니다. 주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무엇을 섞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경고로 하나님은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하시는데, 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우리의 참된 가치, 우리의 유일한 가치는 하나님만을 찾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는 길로 가기까지 충성스러운 것은 결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분명의 죄의 길이요, 죄의 길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영원한 사망으로 나아가지는 않지만, 죄만을 쌓고 있는 그 자리는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지상에서의 삶을 단축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멸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게 되겠지만, 너희는 여호와를 찾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할 것이라는 것이고,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다는 것은 참된 예배도 없고, 참된 말씀도 없음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생명을 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종교적 혼합주의는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만남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라고 할 때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섞는 것은 다 혼합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재물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재물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한 주인이 아니라 두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세상에 있는 것들,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저부터도 그렇지만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섞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합니다. 두 주인이 아니라, 한 주인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이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이 주인이 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고 말씀합니다(출20:2 참고). 그렇기 때문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고(출20:3),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출20: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다고 여겨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순종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에게 복이요, 생명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